제445화
제20편 검을 겨눈 형제
어둠 속에서 황제가 걸어 나오며 황자에게 말했다.
“너답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달라졌구나.”
황제의 말에 황자가 자리에 앉은 채로 여유롭게 대답했다.
“황태자님께서도 많이 달라지셨는걸요. 황제 자리가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나 보죠?”
황제는 여유로운 동생의 얼굴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주변에는 말만 번지르르한 놈들만 있고, 사방에서 일은 터지고, 직접 나서니 이렇게 동생까지 방해하고 있잖아.”
황제의 말에 황자는 피식 웃었다.
“아버지도 동생도 전부 죽였으면 그 정도 각오는 했어야죠.”
가족을 죽인 이야기는 황제도 듣기 싫었던 걸까?
황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놈이 뭘 안다고! 내가 이렇게 나선 게 나를 위해서라고 생각한 거냐? 나는 제국과 대륙을 위해…….”
“봉인된 마왕이 다시 등장한다는 예언 말인가요?”
황자는 황제의 말을 끊고, 책상 위에 놓인 와인 잔을 들었다.
“너도 알고 있었냐…….”
황제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저도 누군가에게 들었죠. 근데 형님이 여태 그 준비를 했는데, 그 결과가 제국을 이 꼴로 만든 건가요?”
“그건, 방해하는 놈들이 있어서…….”
“그럼 방해하는 사람부터 잡지, 왜 가족부터 죽였나요.”
“너는 아직 이해를 못 하는 거다.”
여유롭게 동생을 보던 황제는 어느새 자신이 한 일을 변명하고 있었다.
황자는 황제의 변명에 피식 웃으며 잔을 들이켰다.
잔에 있는 술을 전부 들이켠 그는 다시 황제를 보며 말했다.
“그럼요. 그런 걸 이해하려고 돌아온 게 아니거든요. 나는 죽은 아버지를 위해, 미쳐서 죽은 내 동생을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돌아온 거니까요.”
황제도 어느새 안정을 되찾았는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아쉽겠군. 그렇게 돌아왔는데,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황제의 말에 황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너무 잘되었는데요. 이렇게 잘 찾아오셨으니까요. 미쳐버린 형님이라면 이렇게 직접 찾아올 거로 생각했어요.”
황자는 기사들이 하나씩 빠져나오고 있는 서고에 생긴 통로를 가리켰다.
“황제만 아는 비밀 통로 같은 것도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황제는 동생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하, 이게 함정이라는 말이냐? 네가 지금 내 앞에 있는데?”
말로는 비웃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황제의 눈은 빠르게 주위를 훑고 있었다.
“당연하죠. 나 스스로 미끼가 되지 않으면 형님이 나타나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덕분에 잘 성공했…….”
황자가 그렇게 반문하는 순간이었다.
푹.
집무실 안에 검이 박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책상 앞에 서 있던 황제가 검을 내밀고 있었다.
한순간이었다.
일반인은 눈으로 따라가기 힘들 정도의 속도. 평범한 기사 이상의 실력이었다.
황제가 내밀은 검은 집무실 책상 반대쪽에 있는 동생의 가슴에 박혀 있었다.
검은 황제가 허리에 차고 있을 때보다 배 이상 길어져 있었다.
황제가 차고 있던 검은 길이가 길어지는 유물 검인 듯했다.
황제는 검을 동생의 가슴에 박아넣은 채로 이죽거렸다.
“네가 죽으면 그 함정은 무슨 소용이 있는데. 나는 이대로 비밀 통로로 빠져나가면 그만이야.”
황자는 자신의 가슴에 박힌 검을 보고, 다시 황제를 쳐다보았다.
입가에 흐르는 피. 하지만, 황자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죽어도 상, 상관없으니까요. 복수만 이룰 수 있다면…….”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벽을 쳐다보았다.
“안 그래?”
황자는 벽을 향해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 물음이 끝나는 순간,
구구구구궁.
집무실 내부가 변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황제와 기사들이 나왔던 비밀 통로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이어서 벽도, 바닥도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놀란 기사들이 황제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이게 무슨!”
“환상이다! 환상 능력이야! 마나로 머리를 감싸서 정신 공격을 막아!”
“황제 폐하를 지켜!“
그들은 고함을 지르며 움직이는 벽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그들도 황제를 모시는 기사들이었다. 정신 공격에 대한 대처법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아쉽게도 이 현상들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었다.
꿀렁.
바닥이 움직여 기사들의 발을 빨아들이고. 이어서, 벽과 천장에서 가시가 튀어나왔다.
“정신 차려! 환상일 뿐이야!”
“마나로 머리를 감싸는 데 주력해!”
기사들은 그 모습을 보고 다시 소리쳤지만, 그건 잘못된 바램일 뿐이었다.
푹!
기사 하나가 꼬챙이에 머리를 꽤 뚫렸다.
방패로 막은 다른 기사는 벽으로 튕겨 나갔다.
벽에 부딪힌 기사는 벽을 뚫지도, 튕겨 나가지도 않았다.
기사는 마치 푸딩에 부딪힌 것처럼 그대로 벽에 먹히기 시작했다.
“크윽. 이건 환상이 아냐!”
벽에 먹혀가는 기사가 발버둥을 치며 고함을 지르자, 다른 기사들도 이게 평범한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젠장! 마나를 감싸도 그대로야. 검호급 환상 능력자인가!”
“라르스가 정말 죽었어!”
“막아! 환상이든 아니든 당하면 죽는다!”
기사들은 튀어나온 가시들을 막고, 검으로 튕겨냈다.
그리고, 문과 가까이 있던 기사가 외쳤다.
“문을 뚫는다! 선두는 나다!”
그 말과 함께 그 기사를 선두로 황제를 가운데에 둔 기사들이 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
벽에서 튀어나오던 가시들이, 이제는 송곳이 되어 기사들에게 쏟아졌고, 바닥은 늪처럼 변해 기사들의 전진을 막았다.
하지만, 기사들은 필사적으로 공격을 막아가며 문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선두에 선 기사가 힘껏 몸을 던져 집무실의 문을 부쉈다.
와지끈.
그렇게 집무실 밖으로 나오니, 기사 갑옷들이 늘어서 있는 홀이 나왔다.
기사는 의아했다.
집무실 밖은 분명 복도가 나와야 할 텐데?
그를 따라 나온 다른 기사들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분명 전시홀인데?”
그들은 모두 이곳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곳은 제국의 황실 기사단의 역사를 전시해 놓은 전시관이었다.
황실 기사단이 쓰던 무기들과 갑옷들이 전시된 곳.
“황제 폐하는?”
“어?”
“여기 계셨는데?”
“빨리 황제 폐하를 찾아!”
놀란 기사들이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들이 뚫고 나온 문은 평범한 벽으로 바뀌어 있었다.
놀란 기사들이 검을 내질렀지만, 돌로 되어 있는 벽은 깨져 나갈 뿐이었다.
황당한 일이었지만, 기사들은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환상이 맞았어.”
“폐하를 찾아야 해.”
“분명, 입구가 있을 거다.”
그들은 다시 이 홀에서 나갈 입구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문을 찾기 전에 걸음을 멈춰야 했다.
또다시 벽에서 이상한 것들이 튀어나온 것은 아니었다.
대신, 전시해 놓은 갑옷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두 개의 갑옷이 아닌, 전시해 놓은 수십 개의 갑옷이.
동시에 벽에 걸려 있는 검과 창. 모든 무기가 벽을 따라 스르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 기사들이 있는 방향으로.
홀 안에 있는 모든 장식물. 모든 무기와 갑옷이 기사들을 적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더구나 어이없게도 다가오는 갑옷과 벽을 따라 움직이는 모든 무기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모두 마나가 담겨있는 게 분명했다.
기사들은 그 모습을 보고 허탈하며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평범한 방에서도 겨우 도망쳐 나왔는데, 저런 무기들을 어떻게 이겨낼지 막막했기 때문이었다.
기사들의 예상대로 홀에 있던 기사들은 홀 안에 있던 장식물들을 이기지 못했다.
격렬한 싸움이 끝나고, 홀은 조용해졌다.
무기와 갑옷들은 원래대로 돌아갔고, 벽이었던 곳이 다시 문으로 변했다.
기사들의 시체는 바닥 아래로 사라졌다.
홀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바닥의 피도 시체와 함께 사라져 버렸지만, 다음날 홀에 들어온 시녀는 홀을 보고는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갈 수밖에 없었다.
무기와 갑옷에 묻은 피들은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기사들이 홀로 넘어갔을 때, 황제는 그들과 달리, 황제의 집무실에 남아 있었다.
기사들은 문을 부수고 나갔지만, 황제는 마지막 순간, 늪처럼 변한 바닥이 그의 발을 잡아채서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발을 금방 빼내긴 했지만, 그 짧은 시간에 기사들이 부수고 나간 문은 벽이 되어 있었다.
황당한 얼굴로 벽을 두들겨보던 황제는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를 듣고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린 황제는 조금 전까지 없었던 여성이 책상에 엎어져 있는 동생 옆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평범한 외출복을 입은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동생이 데리고 있었던 여자인가 했지만, 그런 것치고는 여자의 표정이 이상했다.
여자는 한 손에 포션을 들고, 책상에 엎어져서 피를 흘리고 있는 동생을 보며 고민을 하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도 한 폭의 그림 같았지만, 죽어가는 동생을 보며 그러고 있으니, 뭔가 소름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제국의 황자와 황제를 앞에 두고 저런 표정을 하는 여자가 평범한 여자일 리가 없었다.
황제는 팔을 쓸어내리며 여자에게 물었다.
“네가 동생이 말하던 그 함정인가? 네가 환상을 일으키고, 기사들을 다른 곳으로 보낸 건가?”
턱에 손을 대고 고민하던 여자가 고개를 돌려 황제를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 황제는 언 듯 기억이 떠올랐다.
황제는 반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분명 어디서 본 얼굴인데……. 아, 그렇군. 자네는 카를로스 사절단과 같이 왔었지? 그때, 샤를 자작과 같이 있는 걸 봤…….”
푹.
황제는 동생과 같이 채 말을 끝내지 못했다.
벽에서 튀어나온 꼬챙이가 그의 등을 뚫고 가슴으로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놀란 얼굴로 여자, 발레아를 쳐다보았다.
“왜?”
황제의 물음에 발레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다른 기사들과 시체가 섞이면 귀찮아져서 빼놓았던 거예요. 설마, 살려줄 거로 생각한 건가요?”
놀리는 말이 아니었다.
담담한 표정으로 꺼내놓은 말은 그녀의 진심이 담겨있었다.
황제는 죽어가면서도 여자의 아름다운 얼굴이 정말 무섭게 느껴졌다.
쿵.
숨이 멈춘 황제가 바닥에 쓰러졌다.
대륙을 좌지우지하는 제국 황제가 죽은 것이었다.
대단한 일이었지만, 황제를 죽인 발레아는 죽은 황제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
발레아는 피를 쏟고 있는 황자를 보며 인상을 썼다.
“이대로 놔두면 죽을 것 같은데…….”
엄청난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황자는 아직 죽지 않았다.
이 주변에 영역을 펼쳐놓은 발레아가 황제의 검을 황자의 심장에서 살짝 빗나가게 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황자가 검에 찔리지 않게도 할 수 있었지만, 발레아는 그러지 않았다.
알렉스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충격을 줘서 정신을 좀 차리게 하라고 했는데……. 그 와중에 죽으면……. 안 되겠지?”
발레아는 책상에 엎어져 있는 황자의 머리를 잡아 세운 뒤, 포션을 입에 물렸다.
그리고, 포션 하나를 또 꺼내서 구멍이 뚫린 가슴에 부었다.
“후유증이 꽤 남을 테니, 충격은 충분히 받을 테지.”
황자가 조금씩 숨이 살아나는 것을 보고, 발레아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 시킨 일은 다 끝냈으니, 이제 알렉스를 도우러 가볼까나.”
발레아는 그 말을 끝으로 집무실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녀가 떠난 황제의 집무실.
그곳에는 겨우 목숨을 부지한 황자와 시체가 된 황제만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