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4화
제19편 차르마니아 전투 (3)
“퉤!”
나는 입 안에 모인 피를 툭 뱉고, 찌그러진 투구를 집어 던졌다.
투구를 내던지고, 반쯤 묻혔던 구덩이에서 빠져나왔다.
내 몸 형태로 푹 파인 구덩이.
지금, 내가 만든 구덩이였다.
젠장, 그동안 잘 피했는데, 한 방 맞고 말았다.
하기야, 저런 괴물과 이렇게 오래 싸우는데 한 대도 맞지 않기는 어려웠다.
대검으로 막아서긴 했지만, 덩치와 그에 따른 힘이 너무 차이가 났다.
허공에 뜬 채로 맞아서 버텨낼 방법도 없었고.
덕분에, 이렇게 땅에 반쯤 파묻히고 말았다.
일어나 보니, 투구가 우그러지고, 갑옷도 엉망이었다.
입 안도 터지고, 갈비뼈와 왼쪽 팔도 부러진 것 같았다.
포션이 있더라도 바로 낫기는 불가능한 상황. 다른 사람이라면 바로 전투 불가 판정을 받을 만한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내게는 신검이 있었다.
나는 가슴에 손을 넣어, 신검을 뽑아 들었다.
나는 신검에 마나를 불어넣었고. 신검을 통과한 마나가 내 몸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신검의 효과는 좋았다.
한참 동안 쓰지 않아서인지, 부작용도 없었고.
나는 실시간으로 몸이 낫는 게 느껴졌다.
터져버린 입 안도 원래대로 돌아가고, 다른 곳의 상처들도 빠르게 치료되었다.
그래도, 처음 만났을 때, 마물 왕에게 한 대 맞을 때보다는 부상이 크지 않았다.
그때는 한 대 맞고 사경을 헤맬 뻔했었는데……. 신검이 아니었으면 정말 죽었을지도 몰랐다.
몸이 낫자, 나는 신검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대검을 주웠다.
그 공격을 정면에서 받고도 대검은 멀쩡했다.
‘튼튼한 것만 따지면, 성물 급이려나…….’
신검처럼 특별한 능력은 없었지만, 처음부터 쓰게 되어서인지, 이 대검에 더욱 애착이 갔다.
나는 다시 준비를 끝내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내 앞에는 엉망이 된 마물 왕이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있었다.
마물 왕은 전에도 엉망이긴 했지만, 지금은 더 처참해 보였다.
한쪽 팔은 반쯤 잘려 나가고, 발목 뒤꿈치가 전부 터져나가 있었다.
그리고, 배도 난자되어서 내장이 십 미터 이상 흘러나와 있었다.
평범한 동물, 아니 마물이라도 살아 있을 것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 저 거인 마물 왕의 상처는 빠르게 낫고 있었다.
한 대 맞는 것을 감수하고 공격한 것이었는데, 저렇게 낫는 것을 보니, 입맛이 쓰긴 했다.
그래도, 마냥 막막한 것은 아니었다.
확실히 처음보다 상처가 치료되는 속도가 늦어졌다.
역시, 예상대로 저 마물 왕도 무적은 아니었다.
신검의 치유가 한계가 있는 것처럼 저 마물 왕도 치료되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물론, 이제야 겨우 표시가 날 정도로 한계가 무지막지하게 컸지만, 그래도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한 번 정도는 죽어야 하려나…….”
나는 내가 만든 상처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마물 왕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 마나를 느끼고 나를 따라다니는 마물 왕이었다.
여기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승부를 봐야 하는 마물 왕.
그래서, 나는 이 마물 왕을 내 영지나 카를로스 왕국 대신, 제국에서 막아선 것이다.
다만, 까놓고 말하자면, 자신 있게 나선 것 치고는 생각보다 고전 중이었다.
마물 왕과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강해졌지만, 마물 왕도 전과 달라져 있었고.
처음 마물 왕을 상대했을 때는 나 혼자 상대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도움이 있었다.
대공녀와 기사들.
그리고, 골렘들과 발레아까지.
그들의 도움 없이 혼자 상대하려니,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
“발레아를 데려왔어야 했나…….”
그랬다면 훨씬 편했을 텐데.
하지만, 발레아에게 맡긴 일도 무척이나 중요했다.
“그렇다고, 한 방에 쓸려나갈 방패막이 기사들을 데려올 수도 없었고…….”
마물 왕을 유인했던 기사들도 모두 죽었다.
처음, 옆으로 피해 목숨을 구했던 기사들도, 나와 마물 왕의 싸움에 끼어들어 헛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양심 때문이었으려나?
아니면 기사도 때문이었는지…….
하지만, 여기까지 마물 왕을 끌고 온 주제에 마물 왕에게 목숨을 던져버리다니.
이곳에서 배워온 교육 덕분에 왜 그렇게 한 것인지 알 것 같기는 했지만.
솔직히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이기도 했다.
“잘 쉬었지? 자, 2라운드 시작이야.”
마물 왕이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나도 몸을 풀었다.
다행히 잠깐 쉰 덕에 한 대 맞았던 통증이 사라져 있었다.
역시, 신검이나 회귀나, 통증이 문제였다.
통증만 없었으면, 바로 덤볐을 텐데, 좋은 기회를 날리게 되어 버렸다.
그렇게 다시 붙으려는 순간, 마물 왕과 내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수도 반대편에서 이곳으로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거리가 있었지만,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투레 백작이잖아? 여기는 왜 오는 거지?”
황제와 함께 보이지 않아서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뜬금없이 혼자 달려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설마, 싸움을 방해하려고? 아니, 그건 좀 너무한데…….”
그의 일을 여러 번 방해하고, 죽이기까지 했지만, 이렇게 중간에 끼어들다니.
아무래도 친해지기는 어려운 사람인 듯했다.
나는 우선, 뒤로 움직여 마물 왕과 거리를 두었다.
지금 마물 왕과 싸울 수는 없었다.
싸우는 중에, 저 정도 실력의 기사가 끼어들면 위험했다.
나는 물러서서, 달려오는 그에게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한마디 하려는 순간,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잠깐, 기다리게. 내가 돕겠네!”
백작의 뜬금없는 말에 나는 발이 꼬일 뻔했다.
백작은 말 한마디로 나를 멈춰 세우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이 괴물과 싸우고 있어서 대단한 기사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젊은 기사일 줄 생각도 못 했군.”
내 앞에 선 백작은 나를 보며 감탄했다.
어라?
나를 못 알아보는 건가?
아, 다시 생각해 보니, 그는 내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그가 내 이름을 듣고, 내 얼굴을 본 것은 전부 없어진 세상에서였다.
지금 세상에서 그와 만난 것은 단 한 번, 공국 북쪽 성벽 앞에서였다.
더구나, 그때는 공국 기사의 갑옷과 투구를 쓰고 그를 상대했었다.
그것도 검으로 싸우지 않고, 목소리를 바꾼 말로 그를 농락했었다.
물론, 없어진 삶에서 그 일을 한 게 나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가 엄청 화를 냈었지만.
이유는 모르겠지만, 투레 백작이 나를 도와준다면 나로서는 대환영이었다.
나중에 공국 때 일이 들키더라도 그건 나중 일.
나는 원래 목소리로 나를 소개했다.
“반갑습니다. 투레 백작님.”
“카를로스 왕국 출신 맞나? 카를로스 왕국 쪽 검술이 보이던데…….”
“대답은 나중에 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만……. 저 녀석이 더 기다리지 않을 모양입니다.”
크르르릉.
투레 백작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주춤했던 마물 왕이 다시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 마물 왕을 보고, 백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궁금한 것은 살아남고 하지. 묻고 싶은 게 많거든.”
“저도 궁금한 게 많습니다. 우선 왜 저를 도와주는지부터요.”
“하하, 그냥, 노인의 변덕이네. 그리고, 저 녀석과도 결판을 지어야 하거든.”
그 말과 함께 백작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크아아아앙!
마물 왕도 동시에 움직였다.
나도 몸을 날렸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다시 전투가 시작되었다.
생각보다 더 백작과의 호흡은 무척 잘 맞았다.
백작도 저 거인 마물 왕과 여러 번 싸워본 경험이 있었고.
나는 마물 왕은 물론, 백작과도 싸워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흡이 잘 맞은 덕에, 싸움은 꽤나 일방적으로 흘렀다.
내게 공격하면, 백작이 마물 왕의 심사를 거슬렀고, 마물 왕이 백작을 보면, 내가 마물 왕의 몸을 잘라냈다.
마물 왕은 투레 백작을 무시할 수 없었다.
투레 백작은 제국 검호의 제일 위쪽에 있는 실력자.
백작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가는 마물 왕도 그에게 몸이 썰리는 것을 각오해야 했다.
다만, 마물 왕의 회복 능력은 정말 반칙이었다.
백작이 시선을 끌어준 덕에 마물 왕에게 정타를 훨씬 많이 먹일 수 있었지만, 마물 왕은 그 이상으로 상처를 치료했다.
가슴을 파헤쳐 허파에 구멍을 뚫어도, 다리 근육을 갈가리 찢어도 마물 왕은 그 상처들을 모두 원상태로 되돌렸다.
그래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공격했고, 결국 마물 왕의 팔 하나를 끊어낼 수 있었다.
털썩.
마물 왕은 황당한 얼굴로 바닥에 떨어진 팔을 바라보았다.
팔을 잘라낸 나도, 어깨를 짚고 있는 백작도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떨어진 팔을 쳐다보았다.
“다시 붙는 것은 아니겠지?”
“……안 붙는 것 같은데요.”
“팔 하나에 팔 하나라 이 정도면 수지가 맞는 거겠지?”
백작의 한쪽 팔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싸우는 와중에 팔을 잃은 것이었다.
그리고, 백작의 몸과 얼굴에도 전에 없었던 흉이 가득했다.
“그래도 자네의 검 때문에 한쪽 팔로 끝난 거지. 그 검이 아니었으면 벌써 몇 번을 죽었을 거야.”
그의 말대로였다.
백작도 대단한 기사였지만, 나조차도 완전히 피하지 못하는 마물 왕의 공격을 그가 모두 피해낼 수는 없었다.
몇 번이나 공격을 받아 튕겨 나갔고, 그때마다 사경을 헤맸었다.
나는 신검을 써서 매번 그를 치료했지만, 결국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마물 왕처럼 그도 더는 치료가 안 된 것이다.
생각보다 빨리 한계가 온 것은 그의 나이 때문인 것 같지만, 나는 그 생각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남은 통증은 꽤 끔찍하군. 이쪽 팔은 있지도 않은데, 왜 이리 아픈지……. 이걸 환상통이라고 하던가.”
투레 백작은 잘린 팔을 보며 투덜거렸다.
그리고, 그는 마물 왕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슬슬 막바지인 것 같기는 한데……. 나는 도움이 안 될 것 같아 걱정이군.”
잘린 팔이 검을 쓰는 팔은 아니었지만, 투레 백작은 통증 때문에 당장 더 싸우기는 어려울 듯했다.
백작의 말대로 마물 왕의 회복 능력은 거의 사라진 상황.
나도 그의 낙오가 무척이나 아쉬웠다.
하지만, 그 생각은 너무 짧은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저희도 싸움에 참여하겠습니다.”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수도 방향에서 말을 탄 기사들이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하, 내가 혼자 싸울 때는 구경만 하더니…….”
아무리 봐도, 수도에서 달려오는 기사들은 투레 백작이 싸우는 것을 보고 오는 기사들이었다.
“허허, 아직도 기사들은 나를 인정해주는 모양이야.”
백작은 인상을 쓰면서도 달려오는 기사들을 보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역시 나는 이 세계의 기사를 이해하지는 못할 듯했다.
서로 갈라져서 싸우고, 다른 주인을 섬기다가, 이렇게 돕겠다고 나서다니…….
전생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어찌 되었건, 시선을 끌어줄 기사들이 왔으니, 이제 끝을 낼 때가 되었다.
나는 다시 검을 쥐고, 마물 왕을 바라보았다.
팔 하나가 잘린 마물 왕은 이제 전처럼 무섭게 보이지 않았다.
* * *
같은 시간, 황제의 집무실.
황자는 집무실 창 앞에 서서, 멀리 동쪽 성벽을 보고 있었다.
이곳에서도 들려오는 충격음.
아마도, 마물 왕과 카를로스의 기사가 싸우는 소리일 터였다.
소리를 듣던, 요하네스 황자는 고개를 저었다.
복수를 위해 몸을 던졌지만, 일이 굴러가는 것은 전부 그의 예상 밖이었다.
“도대체, 이 끝은 어떻게 끝날는지…….”
황자가 중얼거리자, 그의 말에 대답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떻게 끝나긴, 반란을 일으킨 동생은 죽고, 수도는 마물 왕에게 박살 나고, 나, 제국의 황제는 서쪽으로 수도를 옮기겠지.”
넓은 집무실 한쪽, 어두운 서고 구석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황자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서고의 모습이 전과 달라져 있었다.
한쪽으로 밀려나 있는 서고, 서고가 있던 자리에는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생겨나 있었다.
그리고, 그 계단 앞에는 오랜만에 보게 된 그의 형이 있었다.
황자가 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잘 왔어. 형.”
동생의 미소를 보고 황제도 입꼬리를 올렸다.
형제는 자신의 형제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