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3화
제18편 차르마니아 전투 (2)
다시 보게 된 거인 마물 왕은 처음 봤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투구를 쓴 거대한 거인.
거인의 근육과 내장이 다 보이는 몸은 망가지는 동시에 회복되고 있었다.
괴성을 지른 마물 왕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쿵. 쿵.
“피, 피해!”
마물 왕 앞을 달리고 있던 기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좌우로 피하는 기사들과 말에 박차를 가해 속도를 높이는 기사들.
마물 왕은 좌우로 몸을 피하는 기사들은 신경 쓰지 않고, 앞에서 걸리적거리는 기사들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쩌어어억.
황당하게도 마물 왕이 휘두른 팔은 근육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길게 늘어났다.
마치 채찍처럼 늘어난 팔이, 앞에서 도망치는 말 탄 기사들을 휩쓸었다.
살점과 피가 튀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말과 기사들.
마물 왕은 쏟아지는 살점을 튕겨내며 계속 달렸다.
한쪽 팔이 몇 배나 늘어난 기괴한 모습.
달려오면서 그 팔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아마도 실시간으로 치료되고 있는 거겠지.
마물 왕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재생하는 신체를 훨씬 더 잘 쓰게 된 것 같았다.
“너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는 거겠지?”
수백 년간 살아왔던 괴물이 나를 만났다고 뭔가 달라진 게 웃긴 일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마물 왕은 나를 처음 만났을 때, 나를 두고 도망친 게 분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검을 들고, 다가오는 거인을 보며 그동안 상대해왔던 마물들을 떠올렸다.
변형된 마나에 오염된 돌연변이 짐승부터, 유적 깊숙이 숨어 있던 버려진 마물.
그리고, 인간에게 봉인되었던 마물 왕과 봉인지에 가득했던 여러 마물.
마지막으로 전에 상대해봤던 저 좀비 거인까지.
그때는 실력이 부족해 유적의 골렘들 덕에 겨우 쫓아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마물 왕의 모습이 확 다가왔다.
역시, 덩치가 크니 걸음도 빨랐다.
순식간에 마물 왕의 모습이 정면을 가득 채웠다.
찌그러진 투구 안, 마물 왕의 눈이 빛났다.
분노에 가득 차 있지만, 어찌 보면 반가워하는 듯한 눈.
착각일 게 분명했지만, 분명 그렇게 느껴졌다.
그렇게 느껴지는 순간, 마물 왕의 팔이 휘둘러졌다.
부우우우웅.
조금 전과 달리, 저 거대한 덩치가 휘둘렀다고 볼 수 없는 엄청난 속력.
팔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을 내가 놓칠 정도였다.
평범한 사람은 인식도 못 할, 나조차도 팔의 잔상이 보일 정도의 스피드.
마물이라고 하지만, 저런 속도를 몸이 버틸 리가 없었다.
콰지지직.
당연하게도 휘두르는 팔의 근육과 피부가 터져나갔다.
박살 나면서도 내게 짓쳐들어오는 뭉개진 주먹.
역시, 이 괴물은 전과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나도 전과 달랐다.
나는 뒤로 피하는 대신, 다리에 마나를 밀어 넣으며, 슬쩍 안으로 몸을 날렸다.
밀려오는 풍압에 피부가 쓸리는 기분이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부우우웅.
오히려, 그 풍압을 등에 받아 가며, 속도를 올렸다.
한순간에 눈앞에 다가온 마물의 다리, 아름드리나무 같은 다리를 향해 신검을 휘둘렀다.
서걱.
신검은 거인의 발목을 지나갔다.
피가 튀고, 거인의 발목에 흠집이 났다.
흠집이라…….
역시, 신검으로 저 마물에 상처를 입히기에는 신검의 길이가 너무 짧았다.
더구나, 상대는 엄청난 회복력이 있는 마물.
검이 지나간 즉시, 상처가 회복되는 게 눈에 보였다.
거인은 느끼지도 못하는 듯한 모습.
하지만, 나도 괜히 대검이 아니라 신검을 쓴 게 아니었다.
원래 신검은 평범한 사람도 마물의 마나 방벽을 뚫어버릴 수 있는 유물.
하지만, 마나 방벽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 신검을 사용할 때는 다른 사용법이 있었다.
피센 후작의 동생 세르히오 기사단장에게서 훔쳐낸 기술.
처음 만났을 때, 마물 왕의 가슴에 썼던 그 기술을 다시 쓴 것이다.
퍽!
다음 순간, 내가 흠집을 낸 마물의 발목 뒤쪽이 터져나갔다.
작은 폭탄이 내부에서 터진 듯한 모습이었다.
터진 부위는 발목 힘줄이 지나가는 곳.
크아아악.
마물 왕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휘청였다.
‘역시, 이 정도로는 무릎을 꿇릴 수 없나?’
다른 마물이었으면, 벌써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되었겠지만, 이 마물은 터져나간 힘줄이 바로 다시 붙고 있었다.
“뭐, 네가 몸을 낮추지 않는다면, 내가 올라가면 될 일.”
나는 휘청이는 거인의 다리를 박차며 위로 치솟았다.
휘청이는 허리를 다시 밟고, 투구 앞까지 솟구쳤다.
투구의 틈으로 마물의 번쩍이는 눈이 보였다.
나는 그 눈을 향해 힘껏 검을 내질렀다.
퍽!
피가 튀고, 동시에 옆에서 손이 날아오는 게 보였다.
나는 검을 놓고, 아래로 몸을 던졌다.
광풍과 함께 주먹이 내 머리 바로 위를 지나갔다.
나는 떨어져 내리며, 다시 신검을 소환했다.
내 손에 신검이 나타나고, 다시 마물 왕의 괴성이 들려왔다.
크아아앙!
상처를 막고 있는 검이 사라져서인지, 투구 사이로 마물 왕의 피가 솟구치는 게 보였다.
만약을 대비해서 마나를 가득 담아 찔러넣은 검이었다.
조금 전처럼 눈 안에서 마나를 터트리기까지 했으니, 타격이 만만치 않을 터였다.
쿵. 쿵.
마물 왕은 뒤로 휘청이며 피가 뿜어져 나오는 눈을 손으로 가렸다.
“설마, 먹힌 건가?”
저 마물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물의 저 투구를 의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저런 회복력이 있는 마물이 투구를 썼다는 것은 저 투구 안에 약점이 있다는 것일 터.
그래서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머리를 먼저 공격한 것이다.
그리고, 저 덩치가 수백 년 동안 쓰고 있는 투구가 보통 물건일 리가 없으니, 나는 우선 투구 사이로 보이는 눈을 공격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눈은 약점이 아닌 모양이었다.
뒤로 휘청이며 물러서던 마물이 그대로 멈추었다.
마물이 손을 내리니, 투구 안의 두 눈이 전부 멀쩡하게 있었다.
투구에 피가 흘러내린 흔적이 없었다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다만, 마물의 두 눈은 전보다 더 나에 대한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
마물 왕은 눈에 담긴 분노와 달리,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크르릉.
마물은 바로 덤비지 않고, 자세를 낮추고, 두 팔을 늘어뜨렸다.
기습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모습.
“보스 전, 페이스 투인가.”
나도 신검을 품에 넣고, 등에 멘 대검을 뽑았다.
나는 대검으로 마물 왕을 가리키며 말했다.
“뭐, 기습이 먹히지 않는다면, 재생을 못 할 때까지 박살 내면 될 테니까. 누가 먼저 지칠지 두고 보자고.”
저런 눈을 가지고 다시 도망치지는 않을 터.
이번에는 분명 승부를 낼 수 있었다.
크아아아앙!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마물 왕도 괴성을 지르며 내 말에 화답했다.
다음 순간, 나와 마물 왕은 다시 맞붙었다.
거인과 인간의 싸움.
죽지 않는 괴물과 시간을 반복하는 인간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마물 왕과 한 인간의 싸움은 수도의 성벽에서도, 반대쪽 돌산에서도 잘 보였다.
성벽 위의 병사와 기사들이 얼빠진 얼굴로 싸움을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돌산 중턱에 올라와 있던 투레 백작도 마물 왕과 인간의 싸움을 감탄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기사군요. 한번 싸워보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의 말에 옆에 서 있던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낙향한 검호 중 하나겠지? 누가 동생 편에 붙은 거려나?”
이 돌산에서는 거리가 멀어, 거인과 싸우는 상대의 모습이 잘 안 보였다.
하지만, 황제와 백작은 마나가 담긴 눈으로 그가 투구를 쓰고 있는 것은 볼 수 있었다.
자신을 숨기려는 모습.
황제는 그 투구를 보고 그가 낙향한 검호 중 한 명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백작은 황제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제국의 검호가 아닙니다. 제국의 검호 중에는 저런 식으로 싸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국이 아니라, 차라리, 카를로스 왕국의 검술과 가까워 보입니다.”
“하, 카를로스 왕국의 기사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금 백작은 카를로스에 검호 급 기사가 있다고 하는 건가?”
백작은 마물과 싸우는 용병 차림의 기사를 보며 입을 열었다.
“검호급이 아닙니다.”
“응?”
백작의 말에 황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물 왕과 저렇게 잘 싸우는데 검호급이 아니라니. 황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이상입니다. 저 기사는 저보다 강합니다. 그래서 한번 싸워보고 싶은 거고요.”
저 마물 왕과 싸워본 경험이 있기에 확실히 알 수가 있었다.
마물 왕과 지금 싸우고 있는 기사는 마나양도 검술 실력도, 경험도 백작 자신보다 뛰어났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백작의 말에 황제는 입을 딱 벌렸다.
제국인도 아닌 기사가 제국의 검호보다 강하다니.
그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말이었다.
표정이 변한 황제가 급하게 다시 물었다.
“설마, 저 놈이 마물 왕을 이기는 건 아니겠지?”
황제의 말에 백작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무리일 겁니다. 저 마물 왕이 무서운 것은 어떻게 해서도 죽이지 못한다는 점이니까요.”
백작의 대답에 황제는 다시 의기양양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면 되었어. 동생 놈이 데려온 기사는 저기서 죽어버리면 될 테니.”
황제는 싸움에서 시선을 돌렸다.
“동생이 왜 도망치지 않고, 황위를 노렸나 했더니, 저런 기사가 도와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나 보군.”
황제는 혼자서 결론을 내리더니, 한참 작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그 정도면 충분해. 입구가 드러났으니, 모두 물러서.”
그의 말에 쌓여 있는 바위를 옮기던 십여 명의 기사가 뒤로 물러났다.
그들이 물러난 곳에는 줄이 가 있는 바위벽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끼와 흙이 붙어 있는 것을 보니, 바위벽은 오래전부터 다른 바위와 흙에 파묻혀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황제는 선이 그어진 바위벽 앞에 서서, 바위벽에 손을 올렸다.
그의 손에 끼고 있던 반지, 황제의 반지, 옥쇄가 빛나기 시작했다.
그그그그긍.
그리고, 벽에 나 있는 선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선이 벌어지는 게 아니라, 바위벽 일부가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이 안이 황궁의 비밀 통로입니까?”
옆으로 다가온 백작의 물음에 황제는 자랑스럽게 벽에 뚫린 구멍을 가리켰다.
구멍은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계단으로 이어진 구멍은 아래로 계속 이어져 있었다.
계단의 끝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그 안에서는 수백 년은 묵은 듯한 퀴퀴한 바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황제와 황태자만 알고, 황제만 열 수 있는, 황궁에서 외부로 통하는 비밀 통로지.”
자랑스럽게 통로를 가리키던 황제는 곧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 선황은 제국의 위기 때만 쓰라고 말하긴 했지만……. 뭐, 지금이 위기가 아니면 언제겠어.”
황제는 어깨를 으쓱였고, 이어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모두 안으로 들어가도록. 통로 반대쪽은 본궁 안이니, 싸울 준비를 하고.”
황제의 말에 기사들은 통로 안으로 차례로 들어갔다.
이들은 황제가 출발할 때부터 반으로 나눠놓았던 기사들이었다.
마물 왕을 유인하는 기사 반에, 황궁에 침투할 기사 반.
마물 왕을 유인할 기사들이 너무 적어 걱정이었지만, 다행히 마물 왕은 유인하는 기사들을 잘 따라갔다.
얼마나 잘 따라갔는지, 나중에는 안내하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어찌 되었건, 마물 왕을 수도 앞까지 유인한다는 계획은 성공했다.
마지막에 생각지도 않은 방해자가 등장했지만, 생각해 보면, 동생하고 만나는 것을 방해할 자를 치워버린 것이었다.
황제는 통로를 보며 키득거렸다.
“동생이 어디 있으려나. 집무실일까? 회의실일까? 침실일까? 갑자기 튀어나온 나를 보고 놈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정말 궁금하다니까.”
아쉽게도 황제의 즐거움은 거기까지였다.
옆에서 백작의 말이 들려온 것이었다.
“아무래도 저는 여기에 남아야 할 것 같습니다.”
황제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백작은 황제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멀리, 마물 왕을, 아니 마물 왕과 싸우는 기사를 보고 있었다.
백작은 조금 전과 표정이 달라져 있었다.
마치 젊은 시절의 백작이 다시 돌아온 것 같은 표정.
그가 황제에게 말했다.
“저는 처음부터 제국을 위한 기사였습니다.”
그가 검을 뽑아 들었다.
“많은 일을 참고, 여기까지 황제 폐하를 모셨으니, 제가 할 일은 다 한 것 같습니다. 이제 저는 제국을 위해 일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백작은 그렇게 말하며 검을 들어 황제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는 바위산 아래로 몸을 날렸다.
그는 처음 보는 기사와 싸우는 마물 왕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