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2화
제17편 차르마니아 전투 (1)
거사가 성공한 뒤, 제국 수도 차르마니아의 정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요하네스 황자는 회유할 수 있는 귀족들은 회유하고, 정리해야 할 귀족들은 단칼에 정리해나갔다.
수도에 살벌한 피바람이 불었지만, 다행히 그 수가 많지는 않았다.
생각 외로 회유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수도에 있는 제국민들의 저항도 없다시피 했다.
교단이 요하네스 황자를 새로운 황제로 인정하고, 귀족들이 빠르게 포섭되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요하네스 황자나 황제나 제국인들에게는 다를 바 없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어차피 황위 계승 전쟁이 이어진 것일 뿐이었다.
황제의 소문도 좋지 않았기에, 황자가 정권을 잡게 된 것을 반기는 사람들도 상당수였다.
다만, 마물 왕을 잡으러 떠난 황제가 돌아오게 되면 어떻게 될지, 그게 걱정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소식은 예상보다 빨리, 충격적인 내용으로 전해졌다.
황제가 거인 마물 왕을 수도 차르마니아로 유인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당연히 소식을 들은 귀족들은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인지 믿지 못할 정도였다.
요하네스 황자는 그 소식을 듣고, 감탄한 얼굴로 손뼉을 쳤다.
“내가 부르긴 했지만, 정말 이런 짓까지 할 줄은 생각도 못 했어.”
그래도 황자는 생각 외의 움직임에 감탄이라도 했지만, 다른 귀족들은 달랐다.
그들 모두는 창백한 얼굴로 황제를 성토했다.
“황제는 미쳤습니다.”
“데리고 있던 기사와 병사들도 태반을 잃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마물 왕을 이쪽으로 유인한다니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아니, 그럼 이건 ‘같이 죽자’라는 소리도 안 되잖습니까. 지금 수도에 있는 병력도 많지 않은데…….”
차르마니아를 차지한 황자파 귀족들은 황제가 마물 왕을 버려두고, 주변의 영지들에게서 병력을 모아 천천히 수도로 진격할 것으로 생각했다.
결국, 다시 황위 쟁탈 내전이 되어 버릴 테고, 이번에는 수도를 차지한 자신들 쪽이 유리하리라 믿었다.
지금 회의도 그것을 전제로 다른 영지들을 포섭할 계획을 짜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마물 왕이라니!
미친 짓이기는 했지만, 황자의 감탄처럼 확실히 뒤통수를 맞은 것이기도 했다.
“마물 왕을 차르마니아에 끌고 오다니……. 그런 짓을 하면 싸움에 이기더라도 따를 사람이 없을 텐데…….”
“그러니까요. 정말 황제는 미친 겁니다.”
노 재상의 말에 다른 귀족이 소리쳤다.
황궁의 커다란 회의실에 모인 귀족들의 소란은 더욱 커졌다.
귀족들은 뜻밖의 소식에 대응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자,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른 황제를 욕하고만 있는 것이었다.
요하네스 황자는 지루한 얼굴로 그 소란을 바라보다가 황좌의 팔걸이를 두들겼다.
탕, 탕, 탕.
“자, 속풀이는 다 하셨을 테니, 이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말해보시죠.”
황자의 말에 갑자기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그게…….”
“우선, 주변 영지들에게 말해서 병력을 모으는 게…….”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겨우 원론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서는 너무 늦습니다. 벌써 근처까지 왔다고 합니다. 우선 당장, 경계를 강화해야 합니다.”
그중에 현실을 깨닫고 그나마 제대로 된 말을 꺼낸 귀족도 있었지만, 그가 한 말은 이미 실행된 뒤였다.
“연락을 받고, 바로 모든 기사단과 병력을 소집시켰습니다.”
치안 기사단장의 말에 다들 다시 입을 닫았다.
그 정도 준비로는 마물 왕을 상대하기에는 어림도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수도의 성벽이 높고, 도시는 커도, 마물, 마물 왕과 싸울 수 있는 자는 마나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이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수도에는 전투가 가능한 마나 사용자가 많지 않았다.
기사와 귀족 장교들은 황제가 다 데리고 나가, 마물 왕에게 먹이로 던져주었고.
수도에 남아 있던 귀족과 기사들도, 거사와 뒷정리를 하는 중에 여럿 목숨을 잃었다.
제국의 수도인 만큼, 아직도 수도에 있는 마나 사용자를 다 모으면 대단한 수가 되겠지만, 황제가 끌고 나간 병력을 박살을 낸 마물 왕을 상대하기는 무리였다.
그래서인지, 귀족들은 지금 없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수도에 검호들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황제 편에 선 검호들은 정말 다 죽은 걸까요? 실종이라고 하지만, 다들 보이지 않는데…….”
“알리나 검호도 실종되고, 메레트도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투레 백작은 살아 계신다고 들었지만, 황제와 같이 움직이고 있으니.”
“황제파가 아닌 검호들은 전부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 문을 닫아걸어 버렸으니 시간에 맞춰 올 만한 사람이 없군요.”
하지만, 아무리 떠들어봤자, 없는 사람이 나타날 리가 없었다.
“그래도, 교단이 도와주기로 했으니, 교단에 기대를 거는 게…….”
“황실 기사단도 아직 있습니다. 희망이 없는 건 아닙니다.”
“차라리 오다가 전멸당해서 마물 왕이 다른 곳으로 가던가, 멈추면 좋으련만.”
결국, 그들은 희망 사항만을 떠들어 댈 뿐이었다.
황자는 그 모습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황태자였던 형은 대단한 사람이긴 한 모양이었다.
복수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마물 왕을 끌고 온다는 것은 생각도 못 했었다.
물론, 형이 과거 찬란하게 빛났던 황태자였을 때는 절대로 하지 못할 일이기도 했다.
솔직히 황자도 길이 보이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까놓고 수도를 버리고 도망가면 되는 일이긴 했지만, 그래서야 복수도 다 부질없는 일이 되어 버릴 터였다.
황자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귀족들을 보다가 결국 한 사람을 찾게 되었다.
그를 구해주고, 이 자리에 앉게 해 준 자.
황자는 카를로스 왕국의 젊은 백작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넓은 회의실이었지만, 그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얼굴을 반쯤 가린 투구와 용병 갑옷을 입은 채로 멀찌감치 따로 서 있었다.
다만, 전과 달리 그는 지금 회의장 안을 보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쪽으로 난 창.
그는 창을 통해 먼 하늘을 보며 투구 아래로 무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창밖을 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몇 번을 보게 되는 건지.
반가운 기분이 들 정도였다.
멀리, 도시의 성벽 너머, 먼 하늘에 마나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너무도 잘 아는 마나였다.
처음 싸웠던 마물 왕의 마나, 그 뒤에도 여러 번 보고 싸워 온 마나였다.
조금 전부터 보이기 시작한 마나는 점점 크기를 키우고 있었다.
이쪽으로 똑바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유인이겠지만, 이제는 유인이 아닌 것 같은데.”
마물 왕이 기사들에게 유인되고 있다면 저렇게 똑바로 다가올 리가 없었다.
저건 분명, 이곳 수도를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다른 마물들이었으면,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을 알고 수도로 오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저 마나는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분명 저 마물 왕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더 피하기는 어렵겠지?”
까놓고 더 피할 이유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황자를 쳐다보았다.
때마침 황자도 나를 보고 있었다.
황자는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나는 멀리 떨어져 있는 황자가 듣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마물 왕은 도시 밖에서 제가 막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수도에 피해가 안 가도록 해 주십시오.”
내 예상대로라면, 저 좀비 마물 왕은 어차피 나를 따라올 놈이었다.
정 안되면, 다른 곳으로 유인하면 그만이었다.
내 말이 끝나자, 회의실이 단박에 조용해졌다.
귀족들은 각양 각색의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놀란 얼굴과 황당한 얼굴, 비웃는 얼굴까지.
하지만, 그런 귀족들의 표정은 내게 의미가 없었다.
황자도 믿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게 가능……. 한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꺼낸 황자의 말.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물 왕은 전에도 잡아 본 적이 있습니다.”
내 말에 귀족들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설마, 그런 말도 안 되는…….”
“카를로스 왕국에서 마물 왕을 잡았다는 소식이 있기는 한데, 하지만, 그건 왕자 군대와 공멸했다고…….”
그중에는 사실에 근접한 말을 하는 귀족도 있었지만, 다들 믿지 못하는 얼굴들이었다.
그나마 황자의 표정은 좀 나았다.
반신반의 정도랄까.
“그렇다면, 차라리 우리 기사단과 병력과 함께 마물 왕을 상대하는 게 좋을 것 같지 않나.”
거기다, 나름 좋은 의견까지.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 예상대로 마물 왕이 나를 따라다닌다면, 다른 이들과 같이 싸울 수 없었다.
도시의 성벽에서 싸우다 보면 다른 이들도 마물 왕이 나를 쫓아다닌다는 것을 알 터였다.
그렇게 되면, 내가 마물 왕을 끌어들였다는 괜한 오해를 사게 될 수 있었다.
물론 마물 왕을 제국으로 불러들인 것은 내가 맞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오해를 살 수는 없었다.
나는 그렇게 말을 하고, 회의실을 나섰다.
사람들의 시선이 뒤를 따라왔지만, 나는 무시하고 복도를 걸어갔다.
“어디서 싸울 거죠? 미리 준비해 놓을게요.”
몇 걸음 걷기 전에, 옆에서 발레아의 음성이 들려왔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녀가 내 옆에서 걷고 있었다.
발레아의 표정은 다른 때와 달리, 심각해 보였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지금 다가오는 마물 왕은 발레아도 싸워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우리가 마물 왕을 내쫓기는 했지만, 그건 마물 왕이 골렘 군단에 지쳐서 물러가 준 것일 뿐이었다.
그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본 발레아였다.
발레아의 표정이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미안한 얼굴로 발레아를 바라보았다.
“미안하지만, 발레아는 따로 할 일이 있어요.”
“네?”
내 말에 발레아는 눈썹을 찡그렸다. 오랜만에 내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
“부탁할게요. 중요한 일이에요.”
내 말에 발레아는 나를 한참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죽지 말아야 해요. 죽으면, 이 도시를 부활의 제물로 삼을 거예요.”
역시, 이번에도 농담이 무시무시했다.
아니, 농담이 맞겠지?
“약속할게요. 나는 항상 약속을 지키는 거 알죠?”
솔직히 조금 겁이 나서, 나는 그녀에게 약속했다.
내 말에 발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는 약속을 지키니까요. 좋아요. 맡긴 일을 끝내고 최대한 빨리 합류할게요.”
다행이었다.
발레아가 나서주면 안심이었다.
* * *
차르마니아의 성벽에서 마물 왕이 모습을 보인 것은 하루가 지난 뒤였다.
소식이 너무 늦은 것인지, 아니면 마물 왕의 이동이 너무 빨랐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수도의 병사, 기사들은 멀리 모습을 드러낸 마물 왕을 보고 공포에 질렸다.
그리고, 나는 성에서 조금 떨어진 벌판에 서서 마물 왕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등에는 대검을 메고, 건틀릿을 낀 손에는 신검을 쥔 채로 홀로 서 있었다.
멀리, 다가오는 마물 왕 앞에는 십여 명의 기사들이 말을 달리고 있었다.
피곤에 지쳐 숨을 헐떡이는 말들과 기사들.
그들 중에 황제와 투레 백작은 보이지 않았다.
황제야 직접 유인할 리도 없으니, 보이지 않는 것도 이해가 되었지만, 투레 백작이 안 보이는 것은 조금 걱정이 되었다.
“설마, 다시 반복해야 하는 건가?”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신검을 쥐고, 마나를 끌어올렸다.
우우우우웅.
내 마나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오던 마물 왕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마물 왕은 똑바로 나를 쳐다보더니, 하늘을 향해 괴성을 질렀다.
크아아아아아앙!
역시, 내 예상대로였다.
저놈은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나도 좀비 거인을 보며 마주 웃어주었다.
자, 드디어 미뤄두었던 결판을 볼 때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