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1화
제16편 쿠데타 (2)
무너진 요새.
사방에 널려있는 병사와 기사들의 시체.
그리고, 폐허가 된 요새 한가운데에는 찌그러진 투구를 쓴 거대한 거인이 서 있었다.
갈라진 배에서 흘러내린 내장.
쏟아지는 피와 벗겨진 피부 아래로 꿈틀거리는 근육들.
찢기고, 터져나간 거인의 모습은 마물이라도 살아 있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이미 시체, 언데드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갈비뼈 사이로 언 듯 보이는 심장은 문제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더구나, 최근 생긴 것 같은 상처들은 빠르게 치료되고 있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다른 곳들의 상처가 더 벌어지고 있었지만, 거인은 그런 상처는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폐허가 된 요새에 홀로 서 있는 거인, 마물 왕의 모습은 상처 때문에 멈춰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요새를 무너뜨리고 잠시 쉬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황제는 멀리 보이는 마물 왕을 보며 혀를 찼다.
“튼튼한 요새를 이용하는 것도 소용없었군.”
“몸을 복원하는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그렇다고 마나 없는 일반 공격이 먹히는 것도 아니고요. 요새를 이용한 공격은 먹히기 어려웠습니다.”
황제의 말에 옆에 같이 서 있던 투레 백작이 입을 열었다.
투레 백작은 전과 모습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황제와 함께 수도를 떠날 때는 무척이나 깔끔하고 정정했었는데, 지금은 온몸이 상처로 가득했다.
갑옷 아래로 붕대가 감긴 몸이 보였고, 그의 얼굴에도 전에 보지 못한 안대가 보였다.
그는 요새에 있는 거인, 마물 왕과의 싸움에서 눈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백작의 대답에 황제가 투덜거렸다.
“젠장, 그 늑대인간 놈을 잡는 것은 이 정도로 어렵진 않았는데…….”
황제의 말에 백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의 말과 달리, 늑대 인간, 늑인 마물 왕을 잡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마물 왕을 잡기 위해 황제가 이끌고 나온 제국 기사들의 반을 잃었다.
더구나, 그 잃은 기사들의 상당수는 마물 왕을 따르는 늑대 마물들을 마물 왕에게서 떨어뜨리기 위해 미끼로 써먹었다.
그들 덕분에 정예 기사단과 황제, 검호 메레트는 마물 왕과 따로 전투를 벌일 수 있었던 것이었지만.
그 피해가 작은 것일 리가 없었다.
더구나, 마물 왕과 싸움 중에 정예 기사단 태반과 검호 메레트까지 죽어 버렸다.
마지막에 그가 마물 왕을 쓰러뜨릴 수 있기는 했지만, 그동안의 피해를 생각하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마물 왕들에 의해 제국의 동부가 유린당하고, 영지들의 고통이 심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생각 없이 들이박을 일이 아니었다.
피해를 생각하면 분명 거기서 멈춰야 할 일이었지만, 황제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늑대 인간 마물 왕을 쓰러뜨린 뒤, 황제는 여세를 몰아 누더기 거인을 잡으려 한 것이다.
제국으로 몰려온 마물 왕은 총 셋.
마물 왕 하나를 쓰러뜨렸으니, 마물 왕이 둘 남게 되었지만, 누더기 거인 이외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성 파괴자로 이름 높은 다른 마물 왕은 봉인지에 있을 때부터 움직임이 없기로 유명한 마물 왕이었다.
이번에도 작은 영지 하나를 박살 내고, 무너진 성에 자리를 잡은 채로 꼼짝하지 않았다.
결국 누더기 거인 마물, 거인 마물 왕만 잡으면 제국으로 넘어온 마물 왕을 정리한 셈이었다.
황제도 그 생각에 저 거인 마물 왕을 잡으려 했지만, 황제의 말대로 거인 마물 왕은 늑대 인간과 달랐다.
백작은 뒤를 돌아보았다.
언덕 아래쪽에는 상처투성이가 된 기사들 수십 명과 귀족 장교 몇 명이 모여 있었다.
저들이 거인 마물 왕과 싸우고 남은 병력이었다.
대부분 황실 기사들인 정예 기사들이었지만, 처음 수도를 떠날 때를 생각하면 어이없을 정도였다.
황제는 황실 기사단 중에 정예만을 데리고, 차르마니아를 떠났었다.
이곳으로 오는 중에 주변 영지에 사람을 보내, 기사들과 귀족들을 모았고, 마물 왕과 대치하고 있던 병사와 기사들까지 모아, 황제는 대부대를 만들었었다.
그런 대부대 중에 남은 것이 수십 명의 기사뿐이라니.
마물 왕이 대단하기도 했지만, 백작이 생각하기에는 저들밖에 남지 않은 것은 황제의 욕심 때문이었다.
늑대 인간 마물 왕에 기사의 반을 잃고, 남은 기사들과 병사들은 저 거인을 잡기 위해 모두 소모되었다.
다른 방법들이 실패해, 요새로 끌어들여서 잡아보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이제 남은 방법이 없었다.
“잠시 물러서시지요.”
백작과 황제와 함께 언덕에 올라와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죽은 집사장 대신 조직에서 온 귀족이었다.
조직에서 온 귀족이라 그런지, 그는 자작에 불과했지만, 가문 명만 보면, 제국이 세워질 때부터 내려온 뼈대 있는 가문이었다.
도대체 조직은 어디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인지.
백작은 조직의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질려 버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백작은 저 자작의 말에 동의했다.
너무 늦었지만, 이제라도 물러서야 했다.
여기서 제국의 힘을 다 소모할 수는 없었다.
물론, 이곳에 모인 이들이 제국 전체는 아니었지만, 이 인원으로 저 마물 왕을 상대하는 것은 자살과 다르지 않았다.
“확실히 이 인원으로는 뭘 할 수 없겠군.”
황제도 뒤를 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황제는 그의 말에 수긍한 것이 아니었다.
“영지들과 수도에 전령을 보내. 남은 기사와 각성한 귀족들을 전부 보내라고. 국경의 요새들에도 전령을 보내서 병력을 빼라고 해. 기다렸다가 병력이 어느 정도 모이면 다시 친다.”
황제의 말에 백작과 조직에서 온 자작이 서로 마주 보았다.
황당한 얼굴들.
둘은 똑같은 생각인 것을 알게 되었다.
자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상대는 실시간으로 회복이 가능한 마물입니다.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공격하다가는 병력만 낭비할 뿐입니다.”
국경을 지키는 기사와 병사. 그리고 영지와 수도를 지키는 기사들까지 끌어들이다니…….
이건 마물 왕을 쓰러뜨려다가 제국이 흔들릴 수도 있었다.
“그 말대로입니다. 차라리 수도로 되돌아가서 병력을 정비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솔직히 백작은 마물 왕을 그냥 내버려 두자고 말하고 싶었다.
황제의 행적을 보아하니, 그건 불가능해 보여 차선을 택한 것이었지만.
황제는 그것마저도 듣지 않았다.
“그럴 수 없다. 내가 여기서 물러나면 무슨 소리를 들을 줄 모르나?”
당연히 욕을 먹을 테지.
하지만, 목이 날아가는 것보다, 제국이 흔들리는 것보다, 욕을 먹는 게 나았다.
다만, 황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친정을 나섰는데, 도중에 그냥 물러서다니. 그럴 수 없어.”
황제는 말을 하면서 손을 움켜쥐었다.
“내가 친정에 나서자, 다들 어떤 얼굴로 나를 보았나. 전부 비웃었었지.”
그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쓰러뜨리지 못하는 마물 왕을 벌써 하나 쓰러뜨렸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 이 마물 왕만 쓰러뜨리면 끝이다.”
열변을 토하는 그는 말을 하면서 자기감정에 취한 것처럼 보였다.
“명령이다. 근처에 숙영지를 만들고, 우선, 가까운 영지에서 병사와 군량을 받아내라. 그리고, 다른 영지에도 바로 전령을 보내도록.”
황제는 자작과 백작에게 명령을 내렸다.
자작은 황제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어쨌거나 황제의 명령이었다.
백작도 고개를 숙이며 안대를 쓰다듬었다. 보이지 않는 눈이 무척 아팠다.
그렇게 모두 황제의 명령을 따르려고 할 때, 멀리서 새 한 마리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황태자 때 황제가 많이 쓰던 조직의 전서구였다.
전서구는 자작의 팔 위에 내려앉았다.
자작은 전서구의 발목에 묶인 통에서 쪽지를 꺼냈다.
평범하게 쪽지를 꺼내 본 그는, 쪽지를 읽고, 입을 딱 벌렸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자작답지 않은 모습에 황제가 물었다.
“무슨 일이지?”
“그게…….”
황제의 물음에도 그는 다시 한번 쪽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한 뒤에 입을 열었다.
“……얼, 얼마 전부터 수도에서 조직을 공격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지하 기지도 파괴되었고.”
“뭐라고? 어디가 파괴되었다고?”
“죄송합니다. 조직이 범인을 찾은 뒤에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하, 조직이 찾아냈으면 입을 닫았겠지. 찾아내지 못하고 더 문제가 생겼으니 지금 이야기하는 걸 테고.”
황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래서 누군지는 알아내긴 한 건가? 혹시, ‘적대자’라 부르는 자였나?”
황제의 비웃는 듯한 물음에 자작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게……. 2 황자, 요하네스 황자였습니다.”
“……뭐?”
황제는 자작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북쪽에서 냉동되고 있어야 할 놈이 수도에 있다고?”
설마, 그 얼음 감옥을 탈옥했다는 건가? 거기다, 무사히 수도까지 돌아왔다고?
“잡았나? 아니 잡았으면 말도 안 했겠지.”
황제의 말에 자작은 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쪽지에 들어 있는 내용을 황제에게 말해야 한다니.
이건 잘못하면 목이 달아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역시, 죽은 집사장 대신에 이 일을 맡은 것은 큰 실수였다.
자작은 떨리는 손을 감추며 쪽지에 적혀 있는 내용을 모두 쏟아냈다.
“2 황자는 조직원들을 죽이고, 귀족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수도 차르마니아는 반란군에게 장악되었고, 황궁도 그들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황제도, 백작도 자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들은 2 황자가 살아 있다는 말보다 훨씬 더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도대체 감옥에서 도망쳐 나온 2 황자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게 사실이라고?”
“네.”
“반란을 일으킨 정도가 아니라 황도가, 황궁이 점령되었다고? 차르마니아가 넘어갔다고?”
“네…….”
“그럼, 설마, 내 아내와 아이들도 잡힌 건가?”
“……네.”
마지막 물음에는 자작도 겨우 대답할 수 있었다.
물어보는 황제의 눈은 붉게 변해 있었다.
“도, 도대체! 조직은 뭘 하고 있었던 건가!”
황제는 사방으로 삿대질을 했다.
자작에게도, 백작에게도, 멀리 떨어져 있는 기사들에게도.
“황실 기사단은! 내게 충성했던 귀족들은! 병사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건가!”
“죽기도 하고, 항복하고, 전향도 한 모양입니다.”
자작의 대답에 황제는 우뚝 멈췄다.
으득.
이빨이 갈리는 소리가 들리고, 황제의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아내와 아이들은 무사하겠지?”
“……그게, 반란이 있고 난 뒤에 공고가 올라왔다고 합니다. 황후와 황자들을 살리고 싶으면 돌아와서 황위를 바치라는…….”
“하. 하. 하.”
자작의 말에 황제는 황당한 얼굴로 헛웃음을 흘렸다.
“가족을 잡고 내게 협박을 했다고? 요하네스 그놈이?”
황제는 몇 번이나 하늘을 보며 피식거리더니, 고개를 내리고, 자작을 노려보았다.
“요하네스가 많이 변했군. 내가 변했으니, 그 녀석도 변한 건가. 뭐 상관없겠지. 직접 물어보면 될 테니.”
황제는 백작을 보며 말했다.
“돌아간다!”
그 말에 놀란 자작이 황제를 말렸다.
“곧바로 수도로 가면 위험합니다. 수도로 가기 전에 병력을 모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자작의 말에 황제는 비웃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놈들의 말은 이제 신물이나. 그동안 서로 잘 이용하였지만, 이제 끝이야. 내 동생이 내게 덤빈 거다. 이건 황제인 내가 알아서 할 일이지.”
황제는 자작을 비웃고는 백작에게 명령을 내렸다.
“기사들을 이용해서 저 거인, 마물 왕을 유인한다.”
“네?”
백작이 놀라 황제에게 되물었다.
“마물 왕을 끌고, 수도 차르마니아로 가는 거야.”
황제는 즐거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병력을 모으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고 확실한 방법 아냐? 동생 놈도, 수도에서 놀고 있는 귀족과 제국민들도 나처럼 마물 왕을 구경해봐야 하잖아.”
황제의 말에 백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자, 확인해 보자고. 누가 제국의 마지막을 장식할 황제인지. 마왕을 상대할 자가 누군지. 모두에게 보여주는 거야. 안 그래? 차가운 감옥에서 돌아온 동생아…….”
황제는 멀리, 마물 왕을 바라보았다.
잠시 뒤, 말을 탄 기사들이 언덕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본 마물 왕이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