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9화
제14편 친우의 아버지
황제가 친정을 떠난 제국 수도 차르마니아에 조금씩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황제가 미쳤다는 말부터, 폐위된 황자들이 돌아왔다는 소문까지.
도시를 휩쓴 마물 떼로 불만이 가득 찬 가운데, 퍼지기 시작한 소문은 모두에게 한 가지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겠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전부 허튼 소문인 줄 알았는데, 사실도 있었군요.”
중앙에 앉아 있는 노인이 앞에 서 있는 젊은 황자를 보며 말했다.
이곳은 수도에 있는 노인의 저택 안.
노인 옆에는 여러 귀족이 앉아 있었고, 황자의 뒤에도 기사단장과 여러 귀족이 서 있었다.
지금 황자가 만나러 온 노인은 얼마 전까지 제국의 재상이었던 로마이어 백작이었다.
새로운 황제가 권좌에 오른 뒤, 모든 관직을 내려놓고, 자택 연금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그는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황자는 그런 그를 설득하기 위해 다른 귀족들과 함께 몰래 로마이어 백작의 집에 방문한 것이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 말고도 소문이 사실인 것은 더 있습니다. 형님이 미쳤다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황자의 말에 노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 갇히다시피 한 상황이었지만, 그도 지금 제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고 있었다.
황태자에게 과격한 면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다른 두 황자를 지원하기도 했었는데…….
하지만, 그도 황태자가 황위에 오른 뒤 이렇게 변할 줄 생각도 못 했었다.
“하지만, 그가 황제가 되고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더구나, 저는 이미 손발이 다 잘려나간 늙은이일 뿐입니다. 저를 찾아온 것은 다른 이에게 알리지 않을 테니, 다른 곳을 찾아가 보시지요.”
“그럼, 옆에 계신 분들은 손발이 아니라 몸에 난 털인가요? 유명한 자작님에, 수도 방위 부대 지휘관까지 모두 털에 불과하다니. 잘린 손발은 죽은 제 동생보다 더 대단한 사람인가 보군요.”
자신들을 비하하는 말에 화를 내려던 사람들은 2 황자가 죽은 3 황자에 대해 이야기하자, 난감한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전과 달라지셨군요.”
“형님과 다른 분들이 여러 가지 경험을 많이 시켜주더라고요.”
황자의 말에 노인은 혀를 찼다.
“조금만 빨리 달라지셨으면 좋았을 텐데……. 달라지신 것을 보여주셨으니, 저도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황자님의 거사는 실패할 겁니다. 차라리 외국으로 피하십시오. 지금 이 수도에 황제는 없지만, 그의 손발이 남아 있습니다.”
조금 전에 로마이어 백작이 한 말과 비슷한 말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황자의 뒤에 서 있는 귀족들이 한 말과도 다르지 않았다.
“조직 이야기인가요?”
“아시는군요. 하지만, ‘조직’은 황자님이 아시는 것 이상입니다. 수백 년간 제국을 암중으로 제어하던 곳. 지금 황제를 세운 것은 물론, 선황께서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곳입니다.”
백작이 굳은 표정으로 꺼내 놓은 말이었지만, 황자는 그 말을 듣고 씩 웃었다.
며칠 전이었으면, 대꾸할 말이 없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며칠 전 있었던 장원 함몰에 대해 들어보셨을 텐데요. 그 장원은 평범한 곳이 아니라, 조직의 기지가 있던 곳이었습니다. 그 장원이 무너진 것도 마물 때문이 아니었고요.”
황자의 말에 백작의 표정이 바뀌었다.
“설마, 황자님이 하신 일입니까?”
“지금도 거사를 방해할 자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일을 마칠 때까지, 형님은 알아차리지 못할 겁니다.”
황자의 말에 백작은 침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백작이 입을 열었다.
“새 황제가 황태자 때의 모습만 계속 보였어도, 나서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어쩔 수 없군요. 제국을 위해 폭군은 물러나야 하니.”
노인의 말에 황자는 피식 웃고 말았다.
백작의 말은 제국의 안위를 생각하는 늙은 귀족의 충정처럼 들려왔지만, 이제 황자는 그런 말을 믿지 않았다.
모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이들.
그런 이들의 욕심을 이용해서 복수를 할 수 있기만 하면 될 터였다.
황자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그를 도와주고 있는 이국의 백작이 떠올랐다.
샤를 백작.
과연 그의 욕망은 무엇인지.
무슨 이익을 위해 자신을 도와주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백작과 한 계약도 황자에게는 도통 알 수 없는 계약일 뿐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황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무슨 욕망이든 상관없었다.
솔직히, 뒷일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지금 황자에게는 복수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찌 되었건, 이제 전 재상, 로마이어 백작을 가담시켰으니, 준비는 거의 끝난 셈이었다.
물론, 거사를 일으키기에는 아직 걸림돌들이 남아 있었지만, 그 걸림돌들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마지막 걸림돌이 제거되는 그 순간, 황자는 황궁으로 향할 것이었다.
* * *
같은 시간.
수도의 귀족 저택가.
그 가운데에서도 손꼽히게 큰 장원에도 급박한 보고가 올라오고 있었다.
장원의 집무실.
그곳에는 장원의 주인이자, 대를 이어 제국의 중앙 귀족으로 자리를 잡고 있던 시라흐 백작이 우울한 눈으로 말을 전하는 젊은 기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몸을 피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제 토르벤 남작이 실종되었습니다. 라저 단장도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기사의 말에 백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는 연락할 곳도 남지 않은 건가?”
백작의 말에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단 조직원들은 아직 남아 있고, 일반 기사도 몇 있지만, 그중에 도움이 될만한 사람은 없는 게 아닐지…….”
백작은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 인간들이 다 죽은 건 아닐 텐데……. 설마, 다들 몸을 사리고 있는 건가.”
백작의 말에 기사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백작의 말이 틀린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대답하기 힘들었던 기사는 말을 돌렸다.
“갑작스러운 황제의 친정을 수뇌부가 따라간 게 문제였습니다. 거기다, 차르마니아 본부가 당할 줄은 생각도 못 했고.”
“그건 그렇지……. 나도 마물 때문에 벌어진 일인 줄 알았으니까.”
그날 기지에 있지 않아, 살아남았던 조직원들은 모두 기지가 당한 것은 마물에 의한 천재지변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 뒤에 벌어진 실종에 제대로 대처를 못 했고, 결국 이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도 사람이 벌인 일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우니까. 도대체 누가 벌인 일이지?”
“……그, 적대자가 한 것이 아닐까요?”
“당연한 이야기를……. 적대자가 아니면 조직에 이렇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백작은 옆에 있던 병을 기울여 잔에 술을 채웠다.
그는 보고하는 기사를 앞에 두고 술을 들이켰다.
둘째 아들이 죽으면서 다시 마시기 시작한 술이었다.
셋째 아들이 죽었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는 이렇게 집무실 책상에 두고 마시게 되었다.
그 술은 다시 마시기 시작할 때처럼, 무척이나 썼다.
“나는 그 ‘적대자’가 누구, 아니 어떤 이들인지 정말 궁금해.”
빈 잔을 내려놓으며, 백작은 말을 마쳤다.
수백 년간 제국을 좌지우지하던 조직이 몇 번이나 공격을 당하면서도 그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자라니.
이렇게 진짜로 당하지 않았으면 그조차도 믿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연락은 보냈지?”
“네. 하지만, 수뇌분들도, 황제도 믿을지 모르겠습니다.”
기사, 아니 연락책이자 감시자의 말에 그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 차르마니아에 있는 조직 전체가 박살이 나다니.
이건 직접 당하고 있는 자신도 믿기 힘든 일이었으니.
아무래도 자신은 선택을 잘못한 듯했다.
기사는 다시 재촉했다.
“어서, 수도를 떠나야 합니다. 언제 이곳에 들이닥칠지 모릅니다.”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떠나고 싶은 생각도 없었지만, 번뜩 머리에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왜 지금이지?”
“네?”
“그 ‘적대자’가 왜 지금 조직을 깨부수고 있는 거지?”
“그건…….”
“왜, 황제가 친정을 떠난 지금 일을 벌이고 있냔 말이야.”
“설마! 아, 그러고 보니, 귀족들의 움직임이 이상했습니다. 감시 대상자들이 모이기도 하고, 수도 기사단의 움직임도 이상했습니다. 마물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고 있는 소문도 마찬가지일 테고…….”
백작은 말을 하면서 기사의 뒤, 집무실 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언제 들어왔는지,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드디어 보게 되었군요.”
백작의 말에 기사가 놀란 얼굴로 몸을 돌렸다.
“누구냐!”
그는 말과 함께 검을 뽑았지만, 그 검은 전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푹.
기사는 자신의 가슴, 심장에 박힌 검을 보고, 앞에 선 자를 쳐다보았다.
생각보다 젊은 얼굴.
상대의 실력에 경악했던 기사는 상대의 젊은 얼굴에 다시 놀라고 말았다.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기사는 숨을 거두었다.
허물어지는 기사.
나는 기사의 가슴에서 신검을 뽑았다.
“어찌 되었건, 목적은 이룰 수 있었군.”
나를 보고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는 그의 손에는 긴 검이 들려있었다.
평범한 검이었지만, 나는 그 검을 본 적이 있었다.
몇 년 전, 아카데미에 다닐 때, 보았던 검.
요하힘이라는 이름을 가진 제국 유학생의 손에 들려있었던 검이었다.
내 앞에 서 있는 중년 귀족은 바로 요하힘 선배의 아버지였고,
공국에서 나와 싸웠던, 화염 능력까지 두 가지 능력을 썼던 용병 비드, 버나드 자작의 아버지였다.
나는 앞으로 나서는 중년 남자를 보며 입을 열었다.
“원래 조직 일원은 아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내 말에 그는 피식 웃었다.
“망나니 둘째가 죽고, 셋째의 부탁을 들어준 거였지. 솔직히 조직의 대의에는 별로 동의할 마음은 없었지만, 아버지로서 죽은 아들의 뜻을 잇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니까.”
그의 말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요하힘을 설득하는 편이 좋았을 텐데요.”
“존경하는 형이 죽었는데, 설득될 리가 있나……. 아니, 잠깐, 요하힘을 아나?”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카데미를 같이 다녔습니다.”
“……설마, 알렉스?”
나를 알 줄은 생각 못 했는데.
요하힘이 나에 대해 말한 모양이었다.
나는 백작에게 제대로 나를 소개했다.
“처음 뵙습니다. 알렉스 데 샤를 백작입니다.”
내 인사에 백작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럼 자네가…….”
“네. 제가 ‘적대자’입니다. 당신의 두 아들을 죽인.”
나는 그에게 진실을 이야기해주었다.
적어도 그는 진실을 알 자격이 있었다.
“하하하.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셋째가 존경한다는 소년이 알고 보니, 조직의 ‘적대자’라니. 설마, 내 아들들의 죽음은 우연에 불과한 건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서로 길이 달랐을 뿐입니다. 어차피 시기가 다를 뿐 결국, 부딪혀야 했을 테니.”
내 말에 백작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자네는 카를로스 왕국인이지. 그럴 수밖에 없겠군. 지금도 마찬가지고.”
백작은 검을 뽑았다.
그는 나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이군. 죽기 전에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게 되었으니,”
“그런데, 아들들을 죽인 적을 앞에 두고도 복수심이 끓어오르지 않는 것은 별로 마음에 안 드는군.”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백작은 검을 내질렀다.
다음 순간, 좁은 집무실 안에 검광이 난무했다.
두 아들들이 대단한 실력을 가졌던 만큼, 백작의 실력도 대단했다.
아차 했으면 나도 당했을 만큼, 집무실이라는 좁은 지형을 잘 활용했다.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바닥에 누운 백작을 바라보았다.
가슴에서 붉은 피가 솟구치고 있는 백작의 얼굴은 무척이나 편해 보였다.
“발레아……. 부탁해.”
잠시, 백작의 얼굴을 쳐다보던 나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스르르르르.
먼저 죽인 기사 시체와 백작의 시체가 땅속으로 사라져갔다.
백작을 끝으로 황자가 내어준 숙제가 끝났다.
장애물은 모두 사라졌고, 이제 거사를 치를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