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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천재는 무한리셋 중-438화 (438/563)

제438화

제13편 연판장 (2)

내가 보여준 연판장에는 대주교 조아나에게 보여 주었던 명단이 다 들어 있지는 않았다.

황자와 귀족들에게 보여준 연판장은 교단과 셀린 신도들과 관련 있어 보이는 이름을 모두 뺀, 귀족과 기사들의 명단이었다.

유물의 마나를 볼 수 있으니, 유물의 주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름을 지우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어차피 이곳에 있는 이들은 내 동료가 아니었다.

단지, 적의 적일 뿐.

모든 정보를 줄 이유가 없었다.

“이, 이건, 거짓말입니다!”

사람들이 급하게 허공에 떠오르는 이름을 확인했고, 그중에 한 명이 붉어진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예상대로 이 안에 있는 사람 중에도 명단에 들어 있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황자와 주위 사람들을 향해 억울함을 토해내더니, 내게 손가락질을 했다.

“감히 어디서 이런 말도 안 되는 물건을 가져와서 사람을 모함하는가!”

억울함이 가득 담긴 얼굴, 떨리는 손가락. 그러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목소리.

내가 보아도 진짜 모함을 받은 제대로 된 귀족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다른 귀족들은 그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며, 조금씩 그와 거리를 벌렸다.

그렇지만, 그만큼 나도 의심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를 의심의 눈으로 보는 만큼, 사람들은 나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에는 어디서 구한 것인지 말해 주어야 할 것 같은데…….”

회의실의 분위기를 보고, 황자가 내게 물었다.

어차피 말해 줄 생각이었다.

나는 바로 대답했다.

“조직의 지하 기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밤에 무너진 저택과 장원을 들어보셨을 텐데요. 그곳이 조직의 숨겨진 기지였습니다.”

내 말에 다들 깜짝 놀랐다.

모두, 밤에 있었던 폭발과 진동을 느꼈었기 때문이었다.

“그 무너진 장원이 조직의 기지였다고?”

“설마……. 그곳은 거의 버려진 장원일 텐데요?”

“확실히……. 말이 많았던 곳이긴 했죠.”

“그렇지, 별의별 소문이 많은 곳 치고는 방문하는 귀족도 많았고.”

처음에는 믿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들 사이에 대화가 이어지면서 장원과 저택에 대한 의문점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점점 내 말을 믿게 되는 분위기가 되어가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와 있었던 귀족이 다시 한번 나를 가리키며 고함을 질렀다.

“그 말이 사실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거기다, 저 용병 나부랭이가 그 넓은 장원을 가라앉히다니요.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의 말에 그제야 다들 깨달은 모양이었다. 모두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확실히, 분명 장원 전체가 내려앉았다고 들었는데…….”

“설마, 그게 가능한 능력이 있습니까?”

“글쎄요. 지형 관련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어려울 텐데…….”

확실히 그런 넓은 지형을 움직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발레아는 가능하려나?

물론, 장원이 내려앉은 것은 내 탓이 아니었다.

나와 기지를 지키던 조직원들과의 싸움 때문에 일어난 일이기는 했지만.

내가 벌인 일이라기보다는 기지에 있던 유물과 실험 재료들이 같이 터지면서, 공간이 많은 지하 수로로 함께 매몰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이들에게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

내가 한 것은 아니었지만, 비슷한 증거는 이미 주변에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회의실을 메운 수많은 송곳.

발레아가 펼친 능력은 오히려 모두가 나를 인정하게 했다.

하지만, 그들이 감탄한 쪽은 내가 아니라, 나를 데리고(?) 있는 2 황자였다.

“전부 준비가 되어있으셨군요. 역시 저희는 황자님의 혜안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이 명단이 있으면 정보가 유출될 염려가 없습니다. 역시 황자님이십니다.”

그들은 말끝마다 내가 아니라 황자에 대한 칭찬을 끼워 넣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칭찬을 들으며 명단을 보던 황자가 입을 열었다.

“확실히, 나중에 적들을 정리할 때 큰 도움이 되겠군.”

황자의 말에 사람들의 말이 뚝 끊어졌다.

갑자기 회의실이 추워졌다.

사람들의 칭찬도 황자를 바꾸지 못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복수가 우선인 그의 초심은 쉽게 바뀌지 않을 듯했다.

다들 뻘쭘하니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때,

기사단장이 황자의 지시를 받고, 명단에 있는 귀족에게 다가갔다.

기사단장은 검을 검집에서 꺼낸 뒤, 그 귀족에게 말했다.

“같이 가시지요. 잠시 조사를 받으시면 될 겁니다. 그 뒤에 며칠 동안 모처에서 쉬고 계시면 됩니다.”

그가 진짜 조직의 일원인지 상관없이 가두겠다는 말이었다.

하기야, 괜히 진실 공방을 하는 것보다, 일이 끝날 때까지 가두는 편이 나아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 귀족은 조금 전과 달리, 사방으로 눈을 움직이며, 말을 더듬었다.

뭔가, 틈을 엿보는 듯한 표정. 하지만, 그걸 발레아가 그냥 놔둘 리가 없었다.

파파팍.

더 많은 송곳, 아니 꼬챙이가 그의 주변을 에워쌌다.

마치, 꼬챙이가 가득한 고문 도구에 갇힌 것 같은 모습.

앞에 서 있던 기사단장도 주변에 펼쳐진 가시들을 보고, 식은땀을 흘릴 정도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자가 기사단장에게 수갑을 던졌다.

“내가 쓰던 마나 억제구야. 한번 잘린 거지만, 수리해서 쓸 만해.”

기사단장이 받은 수갑을 살펴보니, 얼마 전에 내가 잘라냈던 수갑이었다.

황자의 손에 차고 있었던 마나 억제 장치.

설마, 공녀 말고도 유물 수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나?

놀라서 자세히 유물을 살펴본 뒤에,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분명 수리가 되긴 했지만, 유물에는 내가 자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유물에 흐르는 마나도 전과 달리 무척 불안정했다.

유물을 원래 모습으로 돌려놓는 공녀와 달리, 저 유물은 억지로 이어붙여 놓은 모습이었다.

오래 버티지도 못할 것 같은 모습.

공녀가 수리한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마, 공녀의 외가, 제국에 있는 가문의 유물 수리사가 유물을 수리한 모양이었다.

분명, 평범한 마나 억제 장치일 텐데. 저런 수고를 들일 이유가 있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황자는 내 생각과 달랐다.

“기뻐해도 될 거야. 자작이 내가 쓰던 억제구를 쓰는 첫 손님이니까. 그동안의 내 고통을 자네들도 한번 느껴보는 게 좋을 거야.”

미소를 지으며 억제구를 차는 귀족을 바라보는 황자의 모습에서 복수 이상의 광기가 느껴졌다.

나는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복수를 위해서는 앞뒤 안 가리고 달릴 테고, 계약으로 제어도 가능하다지만, 계속 풀어놓았다가는 분명 사고를 칠 것 같은 황자였다.

‘그냥 황제가 되게 해도 되려나…….’

일이 끝난 뒤에 그냥 놔둘지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았다.

목록에 이름이 있었던 귀족은 억제구가 채워진 채로 기사들에게 끌려 나갔다.

나로서는 저렇게 가두는 것보다, 죽이는 게 편해 보였지만, 이들 말마따나, 나는 외인이었다.

계획에 문제가 없다면, 이들이 하는 일에 참견할 이유가 없었다.

그가 끌려 나간 뒤, 회의는 술술 진행되었다.

내가 지켜보는 것에 신경 쓰는 이들도 없었고, 그들은 서로 섭외할 귀족들을 추천하고, 황자에게 아부하기 바쁠 따름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내가 조직의 명단을 가져왔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해서는 황위를 찬탈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래도 황자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황자는 나를 따로 불렀다.

기사단장이 내어준 집무실.

황자는 집무실의 책상에 앉지 않고, 집무실 중앙에 멈춰 섰다.

그는 몸을 돌려, 따라 들어간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백작에게 구해진 뒤에 한 번도 백작의 비밀에 관해 묻지 않았네.”

그동안 서로 무시했던 일을 갑자기 꺼내다니.

갑작스러운 황자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어떻게, 수많은 기사와 병사들 사이에서 나를 구하고, 교단의 대주교에게 ‘부탁’을 할 수 있고, 제국 수도에 있는 조직의 비밀 기지마저 박살 낼 수 있는지, 나는 한 번도 묻지 않았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황자가 말하는 것을 계속 들어주었다.

황자는 내가 가만히 있자, 갈수록 열변을 토했다.

“검호 이상으로 뛰어난 실력과 조직의 비밀 기지를 알아낼 수 있는 정보력까지.”

그는 내 검과 내 머리를 가리키더니,

“백작이 평범한 이가 아니라는 것은 볼 때마다 정말 잘 알 수 있었네. 그리고, 백작이 내 마지막 기회라는 것도.”

결국, 내게 고개를 숙였다.

“도와주게. 이 차르마니아를, 황궁을 장악하려면 백작의 도움이 필요하네.”

실권을 잃기는 했지만, 제국의 황자가 내게 고개를 숙이다니.

이건, 뭔가 뿌듯한 기분이었다.

그걸 노리고, 황자도 내게 고개를 숙인 것이겠지만.

알고 있어도 기분이 좋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위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누르며 그에게 물었다.

“어차피, 지금도 돕고 있습니다만……. 제게 무얼 원하시는 거죠?”

황자가 이렇게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면, 평범한 부탁이 아닐 게 분명했다.

내 말에 황자가 입을 열었다.

“사람들을 죽여주게. 자네가 가져온 명단에 있는 인물들과 내가 지정한 사람들을.”

아쉽게도, 황자가 꺼낸 말은 내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 모르는 강력한 기사를 가지게 된 자가 할 만한 생각.

“암살자가 필요한 겁니까?”

“자네의 명예에 큰 상처가 되겠지만, 제발 부탁하네.”

내 물음에 황자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확실히, 황자의 기사라 해도, 나 정도 되는 기사에게 암살을 부탁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기사는 실력이 강한 만큼 자존심이 강한 자들이었다.

더구나, 나는 황자와 관계없는 외국인. 그의 부탁을 들어줄 리가 없었다.

“말로만 부탁하는 게 아닐세. 일이 끝나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주겠네. 대주교와 한 계약 말고, 백작과 따로 계약을 맺도록 하겠네.”

물론, 나는 다른 기사들처럼 암살을 혐오하지는 않았다.

전생을 기억하는 덕에 기사의 명예를 우습게 생각하는 경향도 있었고.

더구나, 황자를 밀어주기로 작정한 만큼, 충분히 들어줄 만한 일이었다.

거기다, 일방적인 황자와의 계약이라니.

황자는 모르지만, 나도 계약이라면 대주교 이상으로 힘을 쓸 수 있었다.

저렇게 협조적으로 나와준다면, 황자의 목에 무척이나 단단한 재갈을 물릴 수 있을 터였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궁금한 점을 물었다.

“그런데, 그들을 죽이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그래봤자, 수도와 황궁 정도만 장악할 수 있을 텐데요.”

내 대답에 황자는 씩 웃으며 내게 말했다.

“수도를 장악하면 되네. 이 수도에는 형수와 형님의 아들들. 현 황후와 황자들이 남아 있으니까.”

그는 양팔을 활짝 펼치며, 말을 이었다.

“그동안 정신이 많이 나가버렸다지만, 가족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형님이니, 내가 차르마니아를 장악했다는 것을 알면, 가족이 걱정되어서 달려올 수밖에 없을 걸세. 아니면, 내가 달려오게 만들면 되고.”

환하게 웃는 2 황자를 보며, 나는 다시 다짐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그와는 세상에 다시없을 강한 계약을 맺어야 할 것 같았다.

복수에 미친개에게는 정말 강한 재갈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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