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6화
제11편 형제의 난 (2)
새 황제는 황제가 되면서 계속된 실패로 황태자 때의 총명함을 잊어버리고, 폭군이 되어가고 있었다.
새로운 황제의 이점은 얼마 가지 않았다.
황자들과의 내전과 때맞춰 쏟아져나온 마물들.
다른 황자들을 모두 정리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피해는 작지 않았다.
거기다, 제국이 생긴 이후 처음으로 마물 왕들에게 제국 동부가 유린당하기까지 했으니, 새 황제의 인기는 바닥을 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황제의 난폭함에, 마왕에 대한 소문까지.
새 황제는 신이 버린 황제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이런 분위기를 반전시키려면, 황제가 마물을 잡기 위한 친정에 나서는 것이 당연할지도 몰랐다.
물론, 황제가 친정을 하기 위해서는, 그가 없는 틈을 타서 일을 벌일 사람이 없어야 했다.
황제가 친정에 나선 것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하지만, 언제나 그렇지만, 일을 벌일 사람이 있었다.
새 황제의 동생인 요하네스 황자.
그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황제가 투레 백작과 황궁 기사단 본대를 끌고 수도를 떠난 다음 날 밤.
요하네스 황자가 움직였다.
그는 제일 먼저, 수도 기사단 단장을 찾아갔다.
단장의 저택은 치안 기사들이 돌아가면 지키고 있었지만, 그 정도 기사들은 나와 발레아가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소리 없이 기절하는 기사와 병사들.
황자는 나와 발레아의 실력에 다시금 놀란 눈치였지만, 놀란 얼굴을 최대한 숨기며, 걸음을 옮겼다.
열린 정문을 통과한 뒤, 복도를 지나, 요하네스 황자는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단장이 있는 응접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혼자 응접실에서 술을 마시던 기사단장은 갑자기 등장한 황자를 보고 크게 놀랐다.
“살아계셨군요.”
단장의 말에 황자는 피식 웃고는 그의 앞에 앉았다.
황자는 테이블에 놓인 술병을 잡고, 바로 입에 들이부었다.
술이 입가에서 흘러나와 앞섶을 적셨다.
쾅.
황자는 술병을 테이블에 내려친 뒤, 기사단장을 노려 보였다.
“단장도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었나?”
“그건…….”
단장은 난감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황제께서 황자님을 북쪽 얼음 감옥에 가뒀다고 들었습니다. 3 황자님도 죽었고, 그곳에 갇힌 사람은 다시 살아나오지 못하는 것으로 유명해서…….”
황자는 그 말에 다시 웃었다. 과거 보았던 부드러운 웃음이 아니었다.
어둡고 쓴웃음.
그런 미소를 지으며 황자가 말했다.
“그런가……. 하지만, 지금 난 여기 와 있지.”
“정말 다행입니다……. 다만, 이곳에 오신 것은 잘못이 아닐는지. 황제의 손이 닿지 않는 먼 왕국으로 피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그건,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습니다.”
“쯧쯧.”
문가에 서서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나는 단장의 말에 혀를 차고 말았다.
“넌 누구냐?”
내 혀 차는 소리에 단장이 벌컥 소리쳤다.
그는 이제야 나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대답을 따로 할 필요는 없었다. 황자가 먼저 나에 대해 설명했다.
“나를 돕는 기사다. 나를 구출하고 나를 지켜주었지.”
나는 지금, 용병 투구에 평범한 가죽옷을 입고 있었다.
신분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제국의 일에 왕국의 백작이 끼어들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집을 지키는 기사들을 다 죽인 것은…….”
이번에는 내가 대답해야 했다.
“기절만 시켰을 뿐입니다.”
나는 거친 목소리로 그의 말에 대답했다.
“들키지 않고, 기절시켰다고? 그럴 리가, 다들 실력 있는 기사들이었는데…….”
단장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단장은 고개를 젓더니, 황자에게 말했다.
“지금도 이런 실력의 기사를 데리고 계시다니, 아무 생각 없이 저를 찾아오신 것은 아니시군요.”
“내가 설마 도망치게 도와달라고 찾아왔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차라리 그게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전에 내가 수도에 들어오면 치안 기사단이 호응해주기로 약속했었지? 이제 약속을 지킬 때야.”
“……그건 황자님의 세력이 온전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새로운 황제가 제국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이미 황자님의 군대는 황제의 군대에 흡수되고, 영지들은 마물들에게 망해버렸죠.”
단장은 적나라한 현실을 늘어놓았지만, 황자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황제가 제국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그럼, 마물이 날뛰는 제국 동부는 제국의 땅이 아닌 모양이군.”
“그건…….”
“그리고, 그 황제가 제국을 온전히 지킬 수 있을 것 같은가? 폭군이 되어버린 내 형이?”
“…….”
기사단장은 더는 반박을 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황자에게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저는 이런 상황에서는 도와드릴 수는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역시, 사람의 마음을 돌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예전에 포기하고 마음을 돌린 사람을 다시 끌어들이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었다.
황자도 이렇게 될 것을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감옥에 갇히기 전 황자였으면, 여기서 포기했을 테지만, 새로 만난 황자는 전과 다른 사람이었다.
‘복수심이 가득 찬 황자는 이제 어떻게 하려나?’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황자가 꺼낼 말을 기다렸다.
황자는 먼저, 입 안쪽에서 작은 구슬을 꺼냈다.
작은 육면체 구슬이었다.
주사위를 닮은 구슬. 황자는 그 구슬을 이빨 대신 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황자가 구슬을 내려놓으니, 구슬에서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그 창에는 사람 이름이 쭉 적혀 있었다.
그 이름들 사이에는 단장 이름도 적혀 있었다.
“설마, 이건…….”
허공에 떠오른 자신의 이름을 보자, 단장은 화들짝 놀라버렸다.
“잊었나? 그때, 나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연판장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걸.”
말을 들어 보니, 저 구슬은 일종의 유물인 것 같았다.
어떤 목적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이름을 남기는 유물.
“……이, 이건, 그냥 형식에 불과한 것이었는데.”
확실히, 전생에 보았던 혈서도 아니고, 유물이라지만, 확실히 본인이 올렸다는 증명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황자는 허공에 떠오른 명단을 보며 즐겁게 웃었다.
“쓸 때야 형식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다르지. 미쳐버린 형님, 아니 황제가 이걸 보고 용서해줄 것으로 생각하는가?”
황자의 말에 단장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버렸다.
확실히, 지금 황제라면 사실이든 아니든 그를 가만히 둘리가 없었다.
“형님은 실수하셨어. 형님답지 않게 내 세력을 너무 많이 살려두었어.”
황자의 말대로였다.
황제는 2 황자의 세력을 마물에게 던져주고서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항복하는 자들도 받아주었고, 중립을 지킨 자들도 적과 아군을 구별하지 않았었다.
처음에는 다들 관용이 넘치는 황제라고 칭송했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 그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황제가 진짜 관용이 넘쳐서 그런 것은 아닐 터였다.
그 뒤에 들이닥친 마물들 때문에 신경을 못 써서 일수도 있었고, 마물 왕과 마왕을 상대하기 위해 조직이 살려놓은 것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저 명단에는 줄이 그어지지 않은(살아남은) 이름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하얗게 질려있던 단장이 겨우 입을 열었다.
“……전과 많이 달라지셨군요.”
“제국의 황제를 노리려면, 전과 달라져야지.”
황자의 말에 단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단장에게는 제국의 황제를 노린다는 황자의 말이 황제가 되겠다는 말로 들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 귀에는 다르게 들려왔다.
황자의 말은 황제가 되겠다는 게 아니라, 황제를 죽이겠다는 말이었다.
뭐, 황제가 될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지금 저 황자의 저 과격한 추진력은 권력욕이 아니라, 복수심 때문인 것이 확실했다.
수도 치안 기사단장은 결국, 황자를 따르기로 했다.
그가 황자를 따르기로 한 것이, 변한 황자의 모습 때문인지, 아니면 저 연판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이제 상관이 없었다.
한번 발을 들여놓았으니, 이제 그는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황자가 기사단장과 함께 명단을 확인하는 것을 보고, 나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더는 확인해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황자는 생각 이상으로 쓸모가 있었다.
제대로 하지 못하면, 손절해 버릴 생각이었는데, 이런 식이라면, 제대로 도와야 할 듯했다.
아무래도, 영지로 돌아가는 것은 좀 더 늦춰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발레아에게 황자를 지켜달라고 부탁을 한 뒤에 기사단장의 집을 빠져나갔다.
이제부터 황자를 도울 귀족과 기사들을 모으는 일에 내가 따라다닐 필요는 없었다.
치안대의 기사단장을 꼬셔놓았으니, 황자는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면 될 터였다.
외국인인 내가 할 일은 따로 있었다.
황제가 친정을 위해 제국 수도를 떠났지만, 아직 수도에는 황제의 손발이 남아 있었다.
그중에 가장 강한 손은 ‘조직’일 터였다.
조직이야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곳이니, 삼자인 내가 설치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거기다, 나는 제국 수도에 있는 조직의 기지를 한 곳 알고 있었다.
전에 지팡이를 심기 위해 발레아와 함께 찾아낸 조직의 지하 기지.
그때는 사절단으로 왔었기에, 신분이 드러날까 봐 지팡이만 묻어놓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 기지가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황제가 된 황태자도 찾아갔었던 곳이니, 평범한 곳은 아닐 터였다.
검호들도 꽤 죽였으니, 그때처럼 대단한 사람들이 모여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나는 조직의 지하 기지를 향해 빠르게 달려 나갔다.
* * *
그날 밤, 제국 수도 차르마니아의 제국인들은 또다시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다.
사람들은 한참 동안 땅에서 올라오는 지진에 마물이 튀어나올까 봐, 벌벌 떨어야 했고.
결국, 밤늦게 큰 폭음과 함께 북쪽에서 솟구친 불길을 보고, 그들은 자식들을 품에 안고 들어주지 않는 신에게 기도해야 했었다.
다행히, 그날 밤에 마물이 나오는 일은 없었지만, 아침에 본 광경은 마물 이상으로 놀랄만했다.
수도의 북쪽에 있던 커다란 장원 하나가 저택과 함께 땅속으로 가라앉았기 때문이었다.
많은 이들이 소식을 듣고 두려움에 떨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무너진 장원으로 찾아와 그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구경했다.
전과 달리, 이 장원에는 구멍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장원의 대지 전체가 십여 미터 아래로 가라앉아 있었다.
담벼락은 물론, 정원과 저택까지.
대단한 폭발이 일어났던 것처럼 땅 전체가 엉망이 되어 있었다.
무너진 장원 근처에 모인 사람들은 폐허를 구경하며 떠들어댔다.
“며칠 전엔 길에 큰 구멍이 뚫렸었는데, 이제는 집과 장원이 무너진 건가?”
“여기도 구멍이 난 것 아냐? 그 구멍으로 저택 전체가 빨려 들어가다가 메워진 것 같은데…….”
“젠장, 정말 여기서는 못 살겠어. 피난을 가야 하나.”
“아니, 수도를 벗어나면 어디로 갈 건데.”
“흠……. 카를로스 왕국?”
“아, 제국 말고? 그럼 뭐…….”
“그것보다, 다음에는 황궁이 무너지는 거 아냐?”
“그럼 차라리 속이라도 시원하겠네.”
전에는 들을 수 없었던 이야기가 구경하는 시민들 사이에 돌아다녔다.
그들 사이에서 이야기를 듣던 나는 조심스럽게 물러섰다.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지난밤, 생각 이상으로 고생했지만, 그래도 지하 기지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지하 기지는 생각 이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제국 수도에 있는 조직의 총괄 기지였고, 이상한 실험을 하는 곳이기도 했다.
나는 그곳에서 조직의 중요한 물건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 물건이라면, 황제의 팔 하나는 부러뜨린 셈이었고, 조직에 치명타를 가할 수도 있을 터였다.
나는 어젯밤 지하 기지에서 찾아낸 물건을 꺼내 들었다.
작은 육면체 돌.
어제 황자가 보여 준 연판장과 같은 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