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4화
제9편 탈옥(?) (2)
멋진 중년 귀족.
집사장이라 불리지만, 황태자 담당 집사장이었고, 지금은 제국의 황제, 황궁의 집사장이었다.
제대로 된 작위도 가지고 있는 정통 귀족이었고, 아마도 조직 쪽에서도 지위가 높은 사람일 터였다.
뭔가 나름의 능력이 있을 테지만, 저번 삶에서 확인한 바로는 전투에 관련된 능력은 아니었다.
대신, 예언가의 호위, 잔드라라는 이름을 가진 귀족이 문제였다.
저번 삶에서는 기습으로 처리했었지만, 아쉽게도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번개같이 들이쳤지만, 복도의 소란이 방 안에까지 들린 듯했다.
그녀는 소란이 일자마자 능력을 일으킨 모양이었다.
방 안에 있는 그녀의 모습이 조금씩 흔들려 보였다.
초점이 잡히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슬쩍 뒤가 비쳐 보이기도 했다.
어딘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듯한 모습.
처음 만났을 때, 내 검을 전부 무시했을 때의 모습이었다.
기습은 불가능했다.
기습이 아니더라도 다른 방법을 준비해 놓기는 했지만, 일이 무척이나 귀찮아진 듯했다.
그런데, 잔드라의 모습은 처음 봤을 때와 조금은 달라 보였다.
호위의 모습을 보고, 씩 웃었다.
생각보다 고생을 덜 하게 될 듯했다.
“역시, 그 능력도 무적이 아니었어.”
지난번 삶에서 보았을 때는, 그녀의 능력이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었지만, 지금은 모습이 진해졌다가 흐려지는 게 반복되고 있었다.
뭔가,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듯한 모습.
발레아에게도 제약을 준, 마나가 흐르는 것을 막는 유물이 그녀의 능력도 막아선 것이다.
“누구?”
“설마…….”
잔드라는 나를 보고 의아해했지만, 집사장은 나를 알아본 것 같았다.
놀란 얼굴에서 뭔가, 이해한 듯한 얼굴, 그리고 다시 경악한 얼굴로 변하는 모습이 신기했지만, 그것을 계속 볼 상황은 아니었다.
나는 바로 검을 휘둘렀다.
서걱.
허공에 휘두른 검에서 검기가 튀어 나가 집사장의 목을 잘라버렸다.
허무한 죽음이었다.
다시 만나면 몇 가지 물어볼 생각이었지만, 지하에서 만난 사람 때문에 생각을 바꾸었다.
이어서 나는 호위 잔드라에게도 검을 휘둘렀다.
부웅.
검기가 그녀를 통과해 벽에 깊게 흠집을 냈다.
다른 곳이었으면, 벽이 잘려 나갔을 텐데, 확실히 외부의 마나는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호위는 능력을 발휘해서 내 검기를 잘 피해냈다.
물론, 완벽하게 피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이런 검기를 다 피해내는 것도 쉽지 않은 건가.”
검기가 스쳐 지나간 자리에 흔적이 남아 있었다.
옷은 반쯤 잘려서 나풀거리고 있었고, 드러난 피부도 붉은 선이 보였다.
마치 채찍으로 맞은 것 같은 상처였다.
“왜 도망치지 않았나 했더니, 도망칠 수가 없었던 거였군.”
그녀는 전처럼 벽을 통과하는 것도, 나를 뚫고 지나가기도 어려운 모양이었다.
아직도 쉽게 죽일 수는 없을 것 같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했다.
도망치지 못하는 상대를 죽일 방법은 무척 많았다.
나는 신검을 겨누었다.
도망치지 못하는 특수 능력자에게는 해볼 만한 실험이 무척 많았다.
저벅, 저벅.
내가 다가가는 모습이 너무 무섭게 보였을까?
내가 다가가자, 창백하게 질린 호위가 나와 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 결심한 얼굴이 되더니, 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쿠구구구궁.
하지만, 그녀가 벽을 향해 달리는 순간, 벽 앞에 새로운 벽이 솟아올랐다.
발레아였다.
쉬라고 했지만, 역시 발레아는 그냥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
잔드라는 갑자기 솟아난 벽에 눈이 커졌지만, 그대로 통과하려 했다.
하지만, 발레아가 만든 벽은 방 내부만이 아니었다.
안과 밖에 동시에 만들어진 두꺼운 벽.
잔드라는 반도 지나가지 못하고 다시 튕겨 나오고 말았다.
“컥. 커억. 컥.”
튕겨 나온 잔드라는 바닥에 피를 토했다.
억지로 능력을 쓰다가 마나가 역류한 모양이었다.
나는 검을 치켜들었다.
집사장에게는 물어볼 말이 있었지만, 호위에게는 따로 물어볼 말도 없었다.
나는 검을 내리쳤다.
서걱.
그렇게 두 사람을 죽이고, 나는 다시 복도로 나왔다.
복도에는 흥건한 피와 함께 시체가 널려 있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이 소란이 밖까지 전해지지 않은 것이었다.
밖에 있는 기사들의 마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나는 가려던 마지막 남은 방, 내가 알고 있는 마나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예언가가 있는 방.
나는 안쪽으로 걸어가, 방의 문을 열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예언가가 방에 들어가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먼저 내게 물었다.
“샤를 자작이군요.”
나는 그녀 반대편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으며 대답했다.
“백작입니다.”
내 말에 예언가 율리아는 슬픈 얼굴로 말했다.
“전에는 정말 깜빡 속았네요. 정말 미래를 아는 이는 당해 낼 수가 없군요.”
예언가는 사절단에 있을 때, 그녀를 속인 일을 다시 이야기했다.
전에도 들었던 이야기였고, 미래를 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 다른 것도 아니어서, 이번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예언가는 계속 말을 늘어놓았다.
“나는 더 이상 미래를 보지 못하는데, 당신은 아니군요. 그래서 이렇게 미리 찾아온 거겠죠? 알리나를 죽이고, 바로 여기로 달려온 걸 테고.”
바로 온 것은 아니었지만, 공간 이동으로 왔다는 것을 모르면 그렇게 생각할 만했다.
“설마, 테스트에서 지는 미래를 보기라도 했나요? 이렇게 찾아와 다 죽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요. 대주교의 조언도 의미가 없네요.”
이어서, 예언가는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 때문에 온 게 아닙니다.”
다른 오해는 그냥 넘어가 줄 수 있지만, 이런 오해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같이 있던 호위가 지금 어디 있다고 생각하나요?”
내 말에 예언가의 눈이 커졌다.
“설마……. 잔드라도 도망치지 못한 건가요?”
그녀는 호위가 도망쳤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지금, 황궁 집사장과 같이 있습니다.”
내 말에 예언가는 얼굴을 푹 숙였다.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나한테는 화장실을 다녀온다고 했었는데…….”
내 말에 예언가도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차린 듯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게 당연하네요. 하지만, 하지도 않은 일로 이렇게 다들 죽임을 당하다니……. 내가 할 때는 몰랐는데, 당하는 쪽이 되니, 이런 기분이었군요.”
예언가는 허탈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그녀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 같았다.
저번 삶에서 내가 테스트를 통과했을 때와도 다른 느낌이었다.
나에게 떠넘기는 느낌이 아니라, 그냥 놓아버린 것 같은 느낌.
얼굴은 아직 젊었지만, 그 표정에는 오랜 세월이 담겨 있었다.
조금은 안쓰럽고, 안타까운 기분도 들었지만, 나는 예언가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희생하고, 인류를 위해 최선을 다했었지만, 그 최선은 내게 큰 피해를 줬다.
내가 되살아나지 못했다면, 예전에 죽었을 터.
나는 나를 죽였던 이를 용서한 적이 없었다.
거기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눈앞의 예언가는 쓸모가 없었다.
그녀의 능력은 나로 인해 모두 막혀 버렸고, 제국과 조직에서의 지위도 이제는 쓸모없어질 터였다.
당장 손을 쓰지 않는 것도 그녀에게서 들을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물어보세요. 미래를 보지 못하는 나에게 당신이 알고 싶은 게 있다는 것이 이상하지만……. 내 앞에 앉아 있는 것은, 묻고 싶은 게 있는 거죠?”
예언가의 말에 나는 입을 열었다.
나는 그녀에게서 다시 한번 예언과 예언을 막을 준비를 어떻게 해오고, 할 생각인지 물었다.
예언에 관해 묻자, 예언가는 성실히 내게 말해주었다.
그녀는 내가 대신 마왕을 막으리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물론, 마왕도 막을 생각이었지만, 그녀에게 물은 것은 예언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미 그녀의 예언은 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없어진 시간대였었지만, 마물 왕들이 나오고 그 뒤에 마왕이 등장한다는 예언은 예언가에게 직접 들은 말이었다.
“……마왕이 봉인을 깨는 시기는 정확히 보지 못했어요. 당신이 제 예지를 막은 것처럼 봉인된 마왕도 제 시야를 가리니까요. 다만, 마물 왕이 등장한 것을 보니, 몇 년 남지 않았어요.”
기간은 전보다 줄어들었지만, 이렇게 마왕이 언제 나오게 되는지, 정확하게 모른다는 말도 전에 들었었다.
그런데도 다시 물어본 것은 사실 예언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조직과 제국이 준비한 것들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조금 전까지, 관심이 없었던 것들이었다.
마물을 끌어들이는 지팡이같이 나와 카를로스 왕국에 피해를 주는 계획이라면 모를까,
그들이 알아서 마왕과 싸우는 것은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알아서 싸우게 하는 것보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싸우는 것이 더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조직과 저 황제와 같이 싸울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다행히, 대신해줄 사람이 조금 전에 나타났다.
“저희가 어떻게 준비했느냐면요…….”
뭔가 생각보다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유언이라고 생각하고 조용히 이야기를 들었다.
시간이 지났다.
이야기가 끝나고, 나는 방에서 나왔다.
예언가는 영원히 잠이 들었다.
평안한 얼굴을 보니, 마지막에 고통은 없을 터였다.
나는 피투성이 복도를 지나, 건물 안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건물 중앙, 막힌 벽에 멈춰서서 건틀렛으로 벽을 부쉈다.
쾅!
벽이 부서지고, 벽에 묻혀있던 쇠막대기가 보였다.
복잡한 문양이 그려진 막대기였다.
나는 막대기를 잡아 바로 유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우우우웅.
막대기를 집어넣자, 정체되었던 마나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주변 마나를 잡아놓고 있었던 유물이 바로 이 막대기였다.
“수고하셨어요.”
마나가 움직이자, 발레아가 바로 모습을 보였다.
내 옆에 나타난 발레아가 복도를 가리키며 물었다.
“전부 치울까요?”
기사들의 시체와 피로 엉망이 된 복도.
그녀는 내가 승낙하면 건물 안에 남긴 흔적을 모두 없앨 터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
“수도 밑에 있는 하수도를 여기까지 연결할 수 있어?”
“시간이 좀 필요하지만……. 어렵지 않아요.”
“그럼 부탁해.”
내 말에 다시 발레아가 바닥에 지팡이를 세웠다.
지팡이에서 마나가 뻗어나가는 게 느껴지고, 이어서 바닥이 떨려왔다.
터널, 땅굴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발레아를 보며 손을 펼쳤다.
“소환.”
내 손에도 지팡이가 나타났다.
얼마 전, 발레아가 묻어놓았던 지팡이.
마물을 부르는 지팡이였다.
나는 쇠막대를 꺼낸 벽에 지팡이를 집어넣었다.
내가 지팡이를 부서진 벽 안에 넣은 것을 보고, 발레아가 미소를 지으며, 슬쩍 손을 휘둘렀다.
부서졌던 벽이 지팡이를 품은 채로 다시 복구되었다.
원상태로 복구된 벽을 확인하고 지하로 다시 내려갔다.
철창을 잡고, 입구를 노려보던 황자는 내가 나타나자 반색했다.
“정말, 돌아왔군.”
떠날 때 약속했지만, 마냥 믿지는 못했던 모양이었다.
“지키던 자들은 모두 처리했습니다. 지금 구해드리겠습니다.”
나는 황자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하고, 검을 꺼내 창살을 잘라냈다.
유물의 방해가 없으니, 창살은 두부처럼 잘려 나갔다.
내 검에 황자의 팔에 채워진 수갑도 잘려 나갔다.
수갑이 잘려 나가자, 황자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마나를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군.”
“지금, 바로 움직여야 합니다.”
황자는 탈옥의 기쁨을 만끽했지만, 나는 바로 그를 재촉했다.
서둘러야 했다.
지팡이의 위력은 내 생각보다 대단했다.
쿠루루루룽.
멀리 지하에서 진동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물들이 몰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