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2화
제7편 차르마니아의 밤 (2)
신관 기사들의 경계는 마물들의 등장과 상관없는 듯했다.
그들은 마물들보다 사람, 특히 검을 든 나를 더 경계하는 듯했다.
하기야, 새 황제와 한껏 틀어진 상태니, 사람을 더 경계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내가 갑자기 나타난 덕에, 잘못했으면 말도 붙이기 전에 싸울 뻔했다.
“경계하지 않아도 돼요. 알렉스 명예 신관 기사예요.”
다행히, 엘레나의 중재 덕에 기사들이 내게 겨눈 검을 치웠다.
다만, 명예 기사라는 말에 몇몇 기사들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정식 기사들은 나 같은 낙하산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사실 그들은 모르지만, 나는 수많은 신관 기사들을 죽이고, 전 대주교까지 죽였었다.
그들이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한 일이었다.
기사들을 제지한 뒤에, 그녀는 앞으로 나섰다.
기사들을 쉽게 제지하는 것을 보니, 엘레나도 전보다 지위가 높아진 모양이었다.
하긴, 대주교와 같이 복귀한 측근이니, 조아나가 그녀를 평범한 사제로 놔둘 리가 없었다.
물론, 그전에도 평범한 사제는 아니었지만.
그런데, 생각보다 새 대주교, 조아나가 엘레나를 총애하는 듯했다.
제국 수도에까지 데려올 줄은 몰랐었다.
나 때문이라면, 차라리 다른 안전한 곳으로 보냈을 텐데.
나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간섭할 문제는 아니었다. 실제로 이렇게 내게 도움이 되었고.
“제국까지 무슨 일로 오신 거죠?”
엘레나는 딱딱한 어조로 내게 물었다.
주변의 시선 때문인지, 전과 달리 거리감 있는 존댓말로 내게 물었다.
나도 그녀가 껄끄러워서인지, 오히려 이런 거리감이 마음에 들었다.
“대주교님을 뵙고 싶습니다.”
내 말에 엘레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지금 당장은 대주교님을 만나기 어려워요.”
도움이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방해하는 건가?
대답을 들었을 때는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말끝에 슬쩍 보여준 손동작 덕분에 그런 생각은 사라졌다.
엘레나의 손동작은 셀린 교인임을 나타내는 표식이었다.
나는 조아나가 왜 엘레나를 수도까지 데려왔는지 알 것 같았다.
조아나가 엘레나를 셀린 교단으로 정말 끌어들일 줄 생각도 못 했었다.
종교를 바꾸는 것은 정말 힘든 것일 텐데.
그런데 이렇게 되니, 나는 엘레나를 대하는 게 더 난감해졌다.
어찌 되었건 내가 두 번째 공작부인, 엘레나의 어머니를 죽였다는 사실은 없어지질 않았으니까.
차라리, 관계가 없거나 적이면 더 속 편할 텐데.
이렇게 아예 아군이 되어, 자주 얼굴을 보게 되면, 더 껄끄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엘레나가 일부러 못 만나게 하는 것이 아니었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내가 고심을 하는데, 엘레나가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설마, 그녀도 알려나? 어차피 대주교를 만나는 게 목적은 아니었다.
“혹시 예언, 아니 율리아라는 분이 대주교를 만났습니까?”
“아, 네. 조금 전에 만나 뵙고 돌아가셨습니다.”
이런, 한발 늦었다.
그래도 엘레나가 그 사실을 알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정확한 시간을 알려 주겠습니까?”
내 말에 엘레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간을 알려 주었다.
역시, 시간이 모자랐다.
예언가는 생각보다 빨리, 교단을 방문했었다.
내가 다시 반복한다고 해도, 교단에서 마주치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렇다면, 다음 방법을 선택해야 했다.
나는 엘레나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럼, 대주교님께도 안부를 전해주십시오.”
“네? 이대로 돌아간다고?”
갑작스러운 내 인사에 누이는 말을 높이는 것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고, 반대로 달려갔다.
발레아도 엘레나에게 인사를 한 뒤에 뒤를 따랐다.
뒤에서 엘레나가 멍하니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내가 교단 본부로 제일 먼저 달려온 것은 혹시나 예언가가 대주교를 만났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운이 좋으면 예언가가 아직 교단에 있거나, 교단에 오기 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쉽게도 예언가는 대주교를 만난 뒤였다.
시간을 계산해보니, 다시 반복하더라도 더 시간을 줄이기는 어려웠고, 알란 신관의 공간 이동이 항상 같은 위치일지도 알 수 없었다.
결국, 예언가가 대주교를 만난 뒤, 찾아간 곳으로 향해야 했다.
호위를 만난 곳.
바로 조직의 안가였다.
저번 삶에서 나는 레스티에게 이 장소를 찾으라고 강하게 부탁했었다.
강압적으로 들릴 정도로 강하게 내린 부탁.
레스티도 놀랄 정도의 말이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죽기 전에 레스티는 호위가 있었던 장소를 알아 왔다.
그는 제국 수도에 있던 교인들을 전부 이용했다.
강한 내 부탁 때문인지, 교인들은 들어가지 못하는 곳까지 몰래 들어갔고, 몇 명은 감옥에 갇히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그 이름들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없어진 일이 되었으니, 모두 자기 생활을 영유하고 있을 테지만, 내가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없어진 삶에서 당한 일을 복수하려면, 도움받은 일도 기억해야 했다.
물론, 당장 뭔가 보답을 할 수는 없었으니, 결국 다 자기만족일 뿐이었지만…….
아무튼, 호위가 지냈던 안가는 내 생각보다 찾기가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예언가가 방문하고, 예언가와 같이 호위가 나섰던 집.
나는 호위가 떠났으니, 집도 쓸모가 없어졌을 테고, 그 집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집은 호위가 떠난 뒤에도 철통같이 감시되고 있었다.
덕분에 주변을 염탐하던 교인들이 전부 감옥에 갇혀버리는 불상사가 생긴 것이다.
뭔가, 내 생각보다 더 중요한 곳일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별 상관없었다.
나를 조직이 알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바로, 발레아가 말한, 증인을 없애는 법.
예언가만 알고 있으면, 그녀의 입만 막으면 되지만, 몇 사람 더 알고 있더라도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전부 입을 막으면 될 뿐이었다.
뭔가 발레아가 들으면, 어이없어 할 것 같지만, 나는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호위가 머물고 있던 장소는 제국 수도의 외성 밖에 있었다.
외성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외곽 경비 초소라 불리는 낡은 장원이었다.
수백 년 전, 제국 수도가 세워질 때 만들어졌다는, 주변을 감시하기 위한 높은 탑과 병사들을 수용하기 위한 돌로 만든 건물.
멀리서 보면 작은 성처럼 보일 정도였다.
원래 이 건물들은 외성이 완성되기 전, 수도를 지키기 위한 기사와 군인들이 거하던 장소였다.
기사단과 수백의 군인들이 머물던 장소.
하지만, 경비 초소는 차르마니아의 외성이 완성되고, 그 가치를 잃게 되었다.
더구나, 이 경비 초소는 통행로와 멀리 떨어져 있어, 그 가치를 완전히 잃게 되었고, 지금은 몇 명의 기사와 몇십 명의 병사만 주둔하는 한적한 장소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기사 몇 명이 있는데 한적한 장소라고 할 수 있나?”
나는 레스티의 보고를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한적한 곳에 기사들을 보낼 만큼 제국의 힘이 왕성한 것인지, 아니면, 전통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조직의 안가라서 그런 것인지.
그건 직접 가서 확인해 봐야 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최악의 경우라도, 손을 봐야 할 사람이 많지 않을 듯했다.
거리를 지나, 도시를 가로지른 뒤, 나는 발레아의 도움으로 성벽을 지나쳤다.
그렇게 성벽을 지나, 열심히 달려가니, 멀리, 옆에 높은 탑이 세워져 있는 낡은 건물이 보였다.
레스티가 말한 장원, 경계 초소였다.
노을이 지고 밤이 되었지만, 내 눈에는 장원이 잘 보였다.
확실히 불이 밝혀진 탑과 건물은 레스티의 말대로 수백 년은 되어 보였다.
성벽에서도 멀리 떨어져서 일이 벌어져도 봉화 같은 것이 없으면, 수도에서는 알기 힘들어 보였고.
문제는 지금 그 낡은 초소는 들은 것처럼 한가롭지 않았다.
탑과 장원 밖에 나와 있는 병사 수는 들은 것과 비슷해 보였지만, 느껴지는 마나양은 전혀 달랐다.
나와 있는 기사만 해도 수십이었고, 건물 안에 느껴지는 기사는 그보다 더 많았다.
하나같이 평범치 않은 기사들.
저 건물에는 왕실 기사단 급 기사들이 모여있었다.
“제길.”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언제나 그렇지만, 편하게 지나간 적이 없었다. 계획대로 된 적도 없었고.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얼마 전 느꼈던 환상통이 다시 떠올랐다.
몸이 갈가리 찢기는 지독한 고통.
이번에 죽는다고 그 환상통을 다시 느끼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만일이라는 게 있었다.
그 고통을 어느 정도 잊어버리기 전에는 죽을 수 없었다.
나는 더 접근하지 않고, 언덕 뒤에 숨어 장원과 탑을 살펴보았다.
자세히 살피자, 생각보다 기사들이 많은 이유를 조금은 알게 되었다.
장원 안쪽에 마차 하나가 서 있었다.
전에 보았던 문양이 그려진 마차였다.
제국 황실의 문양.
저 마차는 황실의 마차였다.
물론, 황제가 타고 다니는 마차는 아니었지만, 지금 저 장원에는 황실에 소속된 귀족이 온 것이 분명했다.
“예언가 때문이겠지?”
다른 이유가 있을 리가 없었다.
예언가를 만나러 황실, 아니 조직에서 찾아왔다면,
설마, 호위가 아니라, 예언가가 직접 말한 것일까?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은 어느 쪽이든 별 상관이 없었다.
단지 일이 힘들어졌을 뿐.
장원을 좀 더 살펴보니, 환하게 밝혀진 탑 위에도 병사들과 함께 기사가 서 있었다.
저 기사도 마나로 눈을 강화할 수 있을 터였다.
밤이긴 하지만, 저 장원에 접근하는 사람은 탑 위에 있는 기사의 눈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물론, 나도 그렇고.
다행히 내 옆에는 발레아가 있었다.
그녀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저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발레아에게 부탁했다.
* * *
알렉스의 예상과 달리, 황실 마차를 타고 온 사람은 예언가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예언가의 호위를 만나러 온 것도 아니었고.
결국, 예언가와 그가 같은 시간에 이곳에 온 것은 우연일 뿐이었다.
“율리아 님이 왔다고?”
“네. 잔드라 호위를 만나고 계십니다.”
기사의 대답에 황실에서 온 귀족이자, 조직의 수뇌 중 한 명인 황궁 집사장이 혀를 찼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따로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설마, 알리나 검호가 실종되신 것을 아신 걸까?”
그가 그 사실을 안 것이 얼마 안 되었고, 예언가에게도 알리지 않았지만, 예언가라면 따로 알아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미래를 알기 위해 칩거했던 예언가가 밖으로 나오다니.
그로서도 무슨 일인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일 때문에 온 것이 아니었다.
“다들 잘 계시지?”
“네. 전과 달리 고분고분하십니다.”
“다행이군.”
기사의 대답에 그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돌아갈까. 요새 황제 폐하의 심기가 영 아니시라서, 황궁을 오래 비울 수가 없어.”
“소문이 안 좋던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마물 왕들이 제국을 침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황제가 난리를 피웠다는 소문은 지금 수도 안에 널리 퍼지고 있었다.
그만큼 이성을 잃었다는 소리였고, 많은 사람이 보았다는 말이었다.
기사의 말에 황궁 집사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옆에서 본 만큼 그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뭐,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는 황제의 집사장이지만, 또한 조직의 수장 중 한 명이었다.
제국의 황제도, 조직에게는 하나의 꼭두각시이자, 체스판의 말일 뿐이었다.
최악의 경우, 대안을 쓰면 되었다.
다만, 지금은 조직의 계획과 너무 달라져서 걱정이 될 뿐이었다.
도대체 누가 일을 계속 망치는 것인지.
찾기만 하면, 조직의 힘을 다해서 박살 낼 생각이었다.
똑.똑.
그런 생각을 하며, 옷을 걸치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잔드라입니다.”
예언가의 호위가 찾아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