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9화
제4편 다시 제국으로 (1)
성벽 전체를 덮을 정도로 큰 반투명한 구가 달려오는 시체를 막는 동안, 나는 내게 달려드는 언데드들에게 신검을 휘둘렀다.
전에 해골들을 쓰러뜨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움직이던 시체들은 신검에 잘려 나간 뒤에는 쓰러진 채로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막 죽은 건장한(?) 시체들이라서 그런지 해골들보다는 잘 움직이고, 실력도 좋았지만, 그때보다 숫자가 많지 않아, 상대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다만, 싸울수록 내 상처가 심해져서 현기증이 날 뿐.
유물 주머니에 안에 들어있는 악신의 성물은 처음에 난리를 친 뒤로 조용했다.
언데드들을 열심히 움직이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힘이 다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조용하다고 그냥 놔둘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없어질 세상이지만, 마무리는 확실히 할 생각이었다.
잠시 뒤, 나는 덤벼오는 마지막 언데드 기사를 쓰러뜨렸다.
멀리, 몇몇 살아남은 제국 기사들이 보이긴 했지만, 그들은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올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언데드 한 무리는 아직, 성벽 앞에서 반투명한 벽을 두드리고 있었고,
그 안, 성벽 위에는 꺼림칙한 눈으로 나를 보는 병사와 기사들 사이에, 홀로 걱정하는 대공녀가 보였다.
나는 검을 들지 않은 손으로, 유물 주머니에서 악신의 성물, 검은 육면체 유물을 꺼냈다.
유물은 조용했다.
진동도, 소리도 없었고, 평범한 유물로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내 눈에는 성물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연기, 아니 마나가 보였다.
큐브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마나의 한줄기 끝은 성벽을 두드리는 언데드와 이어져 있었고, 다른 줄기는 내 몸을 차지하기 위해 내 주위에서 슬금슬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유물, 아니 성물이 살아 있는 것처럼 내 몸을 차지하려고 하는 것을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따지고 보면, 다른 유물 중에도 에고를 가진 유물들이 있었다.
그동안 그 유물들은 나에게 충성을 해와서 특별하게 여기지 않고 있었지만, 그 유물들도 충성하는 대상이 내가 아니었으면, 이 악신의 성물과 다르지 않을지도 몰랐다.
“따지고 보면, 인공지능의 반란, 뭐 그런 건가.”
원래 따랐던 것도 아니었으니, 반란이 아닐지도.
어찌 되었건 생각보다 위험한 물건이었다.
내가 함부로 처리해도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여기서는 결론을 내려야 했다.
슬슬 눈앞이 침침해지고 있었다.
이 유물을 방치한 채로 내가 죽을 수는 없었다.
언제나처럼 마지막은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런 생각으로 신검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우우우우웅.
환하게 빛나는 검.
검에 마나가 모이자, 반대편 손에 들린 큐브가 떨리기 시작했다.
“알아차린 건가? 하지만 너무 늦었어.”
내 말에 큐브 대신 반투명한 벽을 내리치던 언데드들이 반응했다.
몸을 돌려,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역시, 너무 늦었다.
나는 큐브를 떨구고, 검을 거꾸로 들었다.
크아아아아앙!
언데드들의 속도가 더 빨라지고, 큐브가 떨리는 게 눈에 보였다.
큐브에서 피어오르던 검은 마나가 사방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솔직히 나도 ‘성검’으로 이 악신의 유물을 깰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 이 ‘성검’이 악신의 유물에 상극인 것은 확실하지만, 솔직히 악신의 유물 쪽이 성능 면이나 대표성으로는 더 좋기도 했다.
그렇지만, 악신의 성물이 반응하는 것을 보니,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물론, 이런 대단한 성물들로 이런 짓을 하면 어떻게 될지는 예상이 안 갔지만, 곧 죽게 될 나에게는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달려오는 언데드 너머로 손을 흔들고는, 바닥에 놓인 큐브를 향해 힘껏 검을 내려쳤다.
콰직.
다행히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빛살같이 떨어지는 검이 큐브를 우그러뜨린 것이었다.
그 순간.
우그러진 큐브에서 검은 마나가 뿜어졌다.
검은 마나는 신검의 마나와 만났고, 그 순간 엄청난 폭발로 변했다.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세상이 어두워졌다.
죽은 것이다.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두웠던 세상에 다시 빛이 들어왔다.
조금씩 밝아지는 세상.
사라졌던 감각도 하나둘 돌아오기 시작했다.
<사망하셨습니다. 저장 시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환해진 세상과 함께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다시 과거로 돌아온 것이었다.
왕국 수도로 막 돌아온 그 시점.
눈앞에 성벽이 보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주변을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몰려오는 환상통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크윽, 젠장…….”
나는 말 위에서 가슴을 붙잡고, 벌벌 떨어야 했다.
당연히 주위에서는 난리가 났다.
“멈춰! 샤를 백작님이 이상하시다! 포션, 포션을 가져와!”
“알렉스!”
눈치챈 기사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포션들을 꺼냈고, 뒤에 있는 발레아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나는 손을 내저어 괜찮다고 알렸지만, 사람들의 놀란 눈은 변하지 않았다.
달려온 발레아가 나를 말에서 내리게 하고, 길가의 나무 그늘에 앉혔다.
나는 발레아의 도움을 거절할 수 없었다.
이번 환상통은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
온몸이 찢겨나가고, 동시에 타들어 가며, 녹아내리는 고통.
죽을 때는 너무도 짧은 한순간의 고통일 뿐이었지만, 나는 지금 환상통으로 그 고통을 계속 느끼고 있었다.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지만, 여태 이 정도로 심한 고통은 느낀 적이 없었다.
그래도, 시간이 약이었는지, 조금 쉬자, 정신을 차릴 정도로 고통이 약해졌다.
겨우 정신을 차리자, 발레아가 옆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이제, 괜찮아요.”
내 말에 발레아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너무 심했어요. 언젠가 말해 줄 거라고 믿고 있지만, 이렇게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 그냥 물어보고 싶어질 수밖에 없어요.”
내 말에 발레아는 저번과 다른 말을 했다.
그녀가 보기에도 무척이나 고통스러워 보였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의 말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저 다시 한번 사과할 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말에 올라탔다.
이제, 고통은 가라앉았다.
나는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말을 몰았다.
나는 말 고삐를 잡는 내 팔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고통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힘줄이 가득 솟아 있었다.
아직도, 여파가 남아 있다니. 정말 대단한 환상통이었다.
이 고통은 신의 성물을 망가뜨려서 생긴 것이 아니었다.
단지, 폭발이 너무 강했던 것이었다.
전에도 폭발에 휘말려 죽어본 적이 있었지만, 이번 폭발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옆에서 봐서 그 폭발이 어느 정도인지 제일 잘 알 수 있었다.
사람이 한순간에 발화되어 버릴 정도의 위력.
이런 위력은 전생에도 말로만 들었었을 뿐이었다.
‘핵폭발이 이런 식이었었지?’
실제 핵폭발을 경험해 보지는 못해서 직접적인 비교는 할 수 없었지만, 이번 폭발은 아마도, 전생에 ‘전술핵’이라고 불리는 폭발력에 비할 만했다.
수백 미터의 구덩이가 생기고, 몇 킬로미터가 타오르며, 엄청난 후폭풍이 생기는 폭발.
‘정말 다행이야. 대공녀가 지팡이로 그 거대한 방어막을 만들지 않았다면, 성벽 너머까지 다 박살 났겠어.’
잘못했으면, 내가 공국 수도를 반파시켰을지도 몰랐다.
물론, 대공녀가 만든 반구를 믿고, 악신의 성물을 부순 것이긴 했지만, 정말 그 정도로 대단한 폭발이 일어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 정도면, 악신의 성물이 난리를 칠만했다.
“문제는 앞으로 그런 방법으로 부수면 안 된다는 말인데…….”
“네?”
발레아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걱정되었는지, 발레아는 뒤로 물러서지 않고, 계속 내 옆에 머물러 있었다.
관례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파견대 기사들도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쨌거나, 실험 덕분에 악신의 성물의 위험성은 충분히 알게 되었다.
악신의 성물은 자아, 에고가 있었다.
그것도, 악신에 충성하는 에고였다.
물론, 내가 제어를 풀어놓아서이긴 했지만, 성물은 제어가 풀리자마자, 나를 먹으려 했다.
이 유물은 함부로 쓰기도, 가지고 다니기도 어려운 물건이었다.
그렇다고, 방금 확인한 바로는 함부로 부술 수도 없는 물건이었다.
‘결국 봉인인가…….’
방금 보니, 한 가지 쓸모가 있기는 한 것 같지만…….
어쨌거나 이번 일이 끝나면, 악신의 성물은 봉인하기로 결심했다.
악신의 성물에 대해 결론을 내렸으니, 이제 이번 일을 처리할 차례였다.
우리는 성문을 지나, 왕궁으로 향했다.
앞의 두 번의 삶에서는 이 뒤에 여왕을 만나 봉인지 경계를 지킨 일을 보고하고, 사람들을 만난 뒤, 영지로 돌아갔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두 번의 삶에서 예언가가 말한 바에 따르면, 조금 전, ‘시점을 저장한 순간’에 그녀가 나를 알아차렸다고 했다.
아마도, 내가 세상을 반복하던 세상을 고정해서, 알리나의 죽음이 확정되었기 때문일 터였다.
예언가는 이제부터 움직일 터였다.
그녀는 먼저, 교단의 새로운 대주교를 만나 조언을 들을 테고, 그 뒤에 호위를 만나겠지.
그럼 그 호위가 조직에 나에 대해 떠들어댈 것이었다.
조직이 알게 되면 너무 늦었다.
그 전에 막아야 했다.
다만, 제국의 수도와 내가 있는 곳까지는 너무 멀었다.
지금부터 달려가더라도, 제국에 도착하기 전에 전부 일이 끝났을 게 분명했다.
아마, 수도에 도착하게 되면, 출발하는 제국군을 보게 될 테지.
그렇게 되면, 공국 앞에서 제국군을 상대하는 것과 그리 다를 바가 없었다.
솔직히, 한 가지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다면, 나도 반복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터였다.
나는 왕궁에 도착하기 전에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왕실 기사단장과 바도르 장군을 불렀다.
“저는 신전에 먼저 들러야 할 일이 있습니다. 보고는 두 분이 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내 말에 기사단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장군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안 좋게 볼 텐데요.”
바도르 장군의 말대로였다.
귀환 보고도 없이 옆으로 새는 책임자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 보고할 시간도 부족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뭔가 또 일이 생겼구먼. 내가 책임지고 보고하지.”
내 부탁에 기사단장이 가슴을 치며 대답했다.
그동안의 경험이 있어서인지, 그는 나를 이해해 주었다.
물론, 바도르 장군의 말도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다.
나는 두 사람에게 감사를 표했고,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 왕국으로 향했다.
먼지를 뿌리며 달려가는 사람들 뒤로, 발레아와 나만 남게 되었다.
발레아가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는 남아도 되겠죠?”
“네. 같이 가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다시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내 죽음을 발레아가 볼 이유도 없고, 나도 그녀의 도움이 필요했다.
나는 몸을 돌려, 발레아와 함께 교단의 신전으로 들어갔다.
신전 자체에 볼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알란 신관.
우리를 교단의 성전으로 공간 이동시켜주었던 신관이 이 신전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