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7화
제2편 죽음의 기사 (1)
공국 북쪽에 모여 있는 제국군의 수는 전에 몰려왔을 때보다 적어 보였다.
하지만, 그때보다 기사와 귀족은 더 많아 보였다.
언뜻 봐도 지방군 위주의 군대가 아니라, 제국의 정예부대였다.
늦은 오후, 나는 공국 북쪽 성벽 위에 올라, 그 제국군을 지켜보고 있었다.
예언가의 호위가 알리지 않으면 공국 북쪽에 모인 제국군이 어떻게 할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돌아갈지, 아니면 다른 행동을 할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이대로 돌아가 주면 좋을 텐데…….
물론, 저들이 돌아간다고 해도, 나에 대해 노출이 된 것은 맞기에 ‘사자 회귀’를 쓸지는 고민해봐야 할 일이었다.
제국군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는데, 옆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기해요. 어떻게 백작님은 매번 공국과 제가 위험할 때 이렇게 때맞춰서 등장하시는 거죠?”
대공녀, 프리다의 목소리였다.
공국에 와서 내 신분을 밝히면서 대공녀와 만나게 될 거로 생각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그녀가 성벽까지 나올 줄을 생각도 못 했었다.
그냥, 망가진 쇠뇌만 고쳐주면 고마웠을 텐데…….
더구나, 저렇게 고마워하고 있으니, 더 민망할 따름이었다.
내가 공국에 온 것은 공국을 돕기 위함이 아니었고, 더구나 일이 벌어진 것도 나 때문이었으니.
고마워하는 게 아니라, 화를 내는 게 맞았다.
그렇다고,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이유도 없었다.
대공녀의 말에 나는 입을 꾹 닫았다.
사실,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게 더 편했겠지만, 저 제국군이 언제 움직일지 모르는데, 마냥 숨어 지낼 수는 없었다.
발레아가 없으니, 땅속에 비트를 만들 수도 없었다.
더구나, 레스티의 정보도 받을 수 있어야 했다.
이번 삶에는 다른 것보다, 레스티의 정보가 제일 중요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제대로 내 신분을 이야기하고 공국에 들어선 것이지만, 이렇게 대공녀가 직접 찾아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나는 지금 상황이 꽤 어색했다.
전에 대공녀와 나에 대해서 왕세자와 대공이 한 말도 떠올랐고, 수도에서 흘러 다니던 소문도 기억났다.
내가 자작에 이어 백작까지 작위가 올라가자, 호사가들은 그동안 내가 가까이 지낸 여성분들과 나에 대해 떠들어댔다.
발레아는 기정사실이 되어 제외되고, 여왕은 함부로 말할 수 없으니, 결국 대공녀와 나에 대한 소문이 제일 많아졌다.
수도에 있던 공국의 왕세자도 그 소문에 적극적으로 부인하지 않으니, 소문은 점점 크기를 키워갈 수밖에 없었다.
그 소문은 내가 수도의 파티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전에는 그런 소문에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그건, 아마도, 지금은 발레아와 많이 가까워져서인 듯했다.
평범한 귀족들이라면, 상관없겠지만, 나는 아직 전생의 가치관이 많이 남아 있었다.
대공녀의 말에 이어 다른 음성도 들려왔다.
“사절을 보내서 이유를 물어봤지만, 대답이 계속 없었어. 요구하는 것도 없고, 뭔가 기다리는 기색만 역력할 뿐이라, 난감할 따름이야.”
반대편에는 공국의 왕세자가 제국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를로스 왕국이 여왕과 그레시아 공작의 손에 안정이 된 뒤에 공국의 왕세자는 공국으로 돌아왔다.
원래, 공왕은 여왕과 결혼을 시키려는 생각인 것처럼 보였었는데.
지금은 아예 공국부터 왕세자에게 물려주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공국의 실무는 왕세자가 담당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 이곳에 왕세자가 나와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정말, 자네가 이렇게 딱 맞춰 올 줄은 몰랐네.”
왕세자도 대공녀처럼 신기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도 전부 보지는 못했지만, 내 싸움을 보고, 들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대공녀가 열심히 이야기해준 덕분인지, 내 생각보다 훨씬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며칠 전에, 카를로스 왕국에 전령을 보내기는 했지만, 아마, 도움이 되기는 어렵겠지.”
그건, 제국군 진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제국군은 저곳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다.
그들이 준비한 식량과 각종 전쟁 물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물론, 급하게 와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저건 오래 머물 진형은 아니었다.
“그래도 백작이 와서 한시름을 놓았어. 일당백인 자네가 있으니, 다들 기운이 나는 모양이야.”
왕세자의 말은 예의상 한 말은 아니었다.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기사도 병사들도 표정이 밝아졌다.
그들은 전에 있었던 싸움을 기억하고 있었다.
“잘 부탁하네.”
왕세자는 내 어깨를 두드리고, 다른 병사들을 살피기 위해 떠났다.
그가 떠나자, 성벽 위에는 대공녀와 나만 남게 되었다.
원래는 이 주변에 다른 병사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알아서 자리를 피해 버린 뒤였다.
이렇게 둘만 남게 되자, 분위기는 더 어색해졌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제국군을 계속 쳐다보았고, 대공녀는 내 옆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대공녀가 내게 물었다.
“이번에는 제가 해 드릴 것은 없나요?”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쇠뇌도 또 망가졌고, 다른 유물도 있기는 했지만, 어차피, 이번에는 사라지게 될 삶이었다.
이번에는 대공녀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아! 아니었다.
이런 때야말로 확인해 볼 게 있었다.
나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 대공녀에게 유물들을 보여주었다.
가슴에서 꺼낸 유물들을 보고, 대공녀가 움찔 뒤로 물러섰다.
그럴 만했다.
보기 만에도 대단한 물건들이었으니.
내가 꺼낸 유물들은 교단의 성전이 있던 섬에서 구한 세 가지 유물 중, 레스티에게 건네준 유물을 제외한 두 유물이었다.
살아 있는 것 같은 나무 지팡이와 검은색 정육면체 유물.
둘 다, 신의 성물이었고, 그중에 검은 큐브는 시체를 일으키는 악신의 성물이었다.
이 두 유물은 다른 신의 성물에다가, 하나는 악신의 물건이라, 레스티에게도 보이지 못한 유물이었다.
결국, 내가 이 유물들에 대해 알아보려면, 부탁할 만한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다만, 위험한 물건이라, 함부로 맡길 수는 없었다.
유출되면 큰일이기도 했고.
이런 시간대에서나마, 가능한 일이었다.
“이건, 교단의 초청으로 성전에 갔을 때 구한 유물들입니다. 고대 종교들의 성물로 들었습니다.”
내 말에 뒤로 물러섰던 대공녀가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그녀는 내 양손에 들린 유물들을 보고는 한 유물에 손을 올렸다.
당연히 살아 있는 것 같은 지팡이 쪽이었다.
대공녀는 불길한 느낌을 풀풀 풍기는 큐브 쪽은 보지도 않았다.
대공녀는 지팡이에 손을 올리더니,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대단한데요. 뭔가 꽉 막혀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대단한 유물은 처음이에요.”
확실히 내 ‘신검’보다 대단한 물건인 듯했다.
하기야 유물의 모태가 되는 성물이었으니,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어느 종교의 어떤 성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뒤에 대공녀가 알려줄 수 있을 터였다.
“너무 꽉 막혀 있어서 뭔가 바로 확인하기도 어려운데요. 이건 망가진 것도 아니고……. 시간이 필요해요.”
시간은 많지는 않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지팡이를 대공녀에게 건네주었다.
운이 좋아, 일찍 뭔가 알아내면 좋고, 아니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렇게 대공녀에게 지팡이를 건네주니, 전에 레스티에게 건네준 ‘왕관’ 유물이 궁금해졌다.
그것도 신의 성물이라면, 뭔가 능력이 있을 텐데…….
이건 나중에라도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지팡이를 받은 뒤, 대공녀는 꺼림직한 얼굴로 검은 큐브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건…….”
“시체를 움직이는 악신의 성물입니다. 뭔가 거슬리면, 살피지 않아도 됩니다.”
강요하기는 어려웠지만, 솔직히 확인해 봐주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이 큐브는 확실히 도움이 되었지만, 무척이나 찜찜한 물건이었다.
이렇게 거슬리는 물건을 계속 가지고 다닐 수는 없었다.
제대로 확인해서, 제어할 수 없으면, 깊숙한 곳에 봉인해야 했다.
대공녀는 슬쩍 내 얼굴을 보더니, 큐브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럼…….”
그녀가 눈을 감고, 큐브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나는 긴장한 채로 그녀와 큐브를 지켜보았다.
손에 마나를 가득 집어넣고, 감각을 가득 세운 채로.
하지만, 마나가 움직이고, 시간이 지나도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시간이 지나자, 대공녀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나는 손을 떼려 했지만, 그전에 먼저, 대공녀가 손을 거뒀다.
“휴우. 정말, 무서운 물건이네요. 마나가 무척이나 흉측해요. 백작님 말대로 시체의 잔여 마나를 움직여서 생전의 능력을 발휘하는 유물 같은데……. 이 유물은 반만 깨어난 상황이라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는 못하고 있어요.”
“안 쓰는 게 좋을까요?”
“너무 짧게 살펴봐서……. 흠, 이 상태로는 당장은 괜찮을 것 같은데요. 그리고……. 뭔가 방법이 있을 것 같아요.”
대공녀는 말을 하다 말고, 손에 들린 지팡이를 바라보았다.
“그럼 저는 들어가서 이 지팡이를 살펴볼게요.”
대공녀는 내게 손을 흔들고는 뛰듯이 계단을 내려갔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고개를 젓고 말았다.
일거리가 생겨서인지, 대공녀에게 나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자리를 지키던 제국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제국군은 돌아가지 않았다.
그들은 공국을 향해 검을 세운 것이다.
그날, 아침 해를 받으며, 흰 깃발을 든 기사 하나가 말을 타고 성벽 앞에 달려왔다.
그는 성벽 앞에 서서 마나를 담아 고함을 질렀다.
“제국이 알린다. 제국군은 훌리안 공국에 아무 관심이 없다. 제국군이 지나가는 길에 공국이 있었을 뿐. 공국은 길을 비켜주기를 바란다. 만일, 제국의 앞을 막으면 파멸만이 있을 뿐이다!”
길을 비켜달라니.
전생에 뭔가 많이 들었던 말이었다.
역사상 싸움 핑계로 많이 썼던 말이었고, 진짜 이유기도 한 말이었다.
공국에는 미안하게도 제국의 말은 핑계가 아니라 진짜 이유였다.
하지만, 공국이 저 말을 들어줄 리가 없었다.
아무리 제국이 강하다 한들, 저렇게 고압적으로 말하면, 반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얼마 전에 된통 당한 뒤였으니, 믿을 리가 없었다.
성벽에 선 군인도, 기사도 제국 기사의 말에 이를 갈 뿐이었다.
이미 공국은 싸울 준비를 마친 상황이었다.
민간인들이 집에서 가져온 창과 천갑옷을 걸치고, 성벽 위에 올라와 있었고, 여자도 아이도, 안쪽에서 돌과 기름을 나르고 있었다.
공왕도 갑옷을 입고 성벽 위에 나와 있었다.
얼마 안 지났는데, 공왕은 많이 늙어 있었다.
하지만, 늙은 모습에도 카리스마는 그리 줄어들지 않았다.
그는 성벽 위에 우뚝 서서, 제국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사절을 향해 마나를 담아 크게 외쳤다.
“웃기는 소리! 공국의 모든 백성은 죽음으로 제국을 막아 낼 것이다!”
공왕의 말이 끝나자, 성벽과 도시 전체에 거대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죽음을 각오한, 함성.
나는 미안한 마음에 사람들을 쭉 둘러보았다.
병사와 기사, 공국인들과 공왕과 왕세자, 그리고 왕궁에 있을 대공녀까지.
사실 모두 나 때문에 고생을 하게 된 사람들이었다.
없어질 세상이지만, 이들을 고통스럽게 만들 이유는 없었다.
다행히, 레스티가 어제 다른 교인 편에 연락을 보내 주었다.
필요한 정보는 다 얻었고, 이제 제국의 대응도 확인했다.
그리고, 대공녀 덕에 한 가지 더 해볼 만한 게 떠오른 상황이었다.
나는 거대한 환호성을 뒤로 하고, 성벽을 뛰어내렸다.
놀란 음성들이 터져 나왔지만, 나는 검을 뽑아, 사절에게로 떨어져 내렸다.
서걱.
흰 깃발에 피가 튀고, 사절이 말과 함께 쓰러졌다.
한순간에 조용해진 성벽.
나는 시체를 보며 말했다.
“일어나.”
내 가슴에서 검은 마나가 뿜어져 나왔고.
방금 죽은 기사와 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