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5화
제25편 예언가와의 대담 (1)
제국군 군단과 기사 한 명의 싸움이었지만, 싸움은 금방 끝나지 않았다.
“괴물이다!”
“평범한 기사로는 막을 수 없어! 병사들을 쏟아부어!”
“귀족들은 뭐 하고 있어! 뭐가 되었든 능력으로 움직임을 막아!”
사방에서 들려오는 고함은 듣기 좋은 음악 같았고, 느껴지는 고통은 짜릿한 각성제 같았다.
아마, 나도 전쟁의 광기에 취해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쏟아지는 살기를 버티기 어려웠을 터였다.
아무리 강하다고, 제국군 전부와 싸워 이길 수는 없었다.
그럴 생각도 없었고.
신검으로 회복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고, 결국 나도 쓰러지고 말았다.
흐려지는 눈으로 나는 나를 둘러싼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자신들이 쓰러뜨린 적을 보는 것치고는 다들 눈에 공포가 담겨 있었다.
곧이어 사람들이 자리를 비키고, 어디서 본 듯한 중년 귀족과 내가 쫓았던 여자가 내 앞에 나타났다.
“저자가 맞나?”
“네.”
“이렇게 어릴 줄은……. 하지만, 이런 괴물이 또 있을 리가 없겠지.”
귀족은 나를 보고 혀를 찼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 정신이 흐려지고 있어서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옆에서 누군가가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대로 계속 작전을 진행할까요?”
“아니, 우선 돌아간다. 지금도 억지로 병력을 뺀 것이라……. 목표를 잡았는데 전쟁을 하기는 어렵지. 그건 제국을 안정화한 뒤에 고민하도록 하지.”
그 말을 듣고, 나는 겨우 안심을 할 수 있었다.
여태껏 버틴 보람이 있었다.
나는 마음을 놓고,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마나를 놓아 버렸다.
점점 흐려지는 의식 속에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자가 웃고 있는데요?”
그 말을 끝으로 어둠이 덮쳐 왔다.
* * *
<사망하셨습니다. 자동 저장 시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다시 세상이 밝아졌을 때, 보게 된 것은 카를로스 왕국 수도의 성벽이었다.
용사 카를로스를 쓰러뜨린 뒤, 시점을 저장하지 않았으니, 그전에 저장한 시점으로 돌아오는 게 당연했다.
“윽.”
나는 성벽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고통이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신검으로 계속 상처를 회복했기 때문인지, 계속 마나로 숨을 이어 갔기 때문인지.
아니면 두 가지 이유가 다 원인이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번 고통은 만만치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오죽했으면, 옆에 있던 다른 기사가 물을 정도였다.
내 이상을 알아차렸는지, 바로 발레아가 달려와 주었다.
그녀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이런 광경을 여러 번 보아 온 그녀는 어떤 질문도 없이 말없이 내 옆을 지켜 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고통이 가라앉았다.
“휴우…….”
나는 큰 숨을 몰아쉬고, 발레아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요.”
“언젠가 무슨 일인지 알려 줘야 해요.”
내 감사에 그녀는 한마디 말을 남기고 뒤로 물러섰다.
나는 물러서는 그녀를 보며, 속으로 사과했다.
발레아에게는 미안하지만, 언제가 되었건 그녀에게는 진실을 말하기 어려울 듯했다.
수도에 도착한 뒤에, 나는 저번 삶과 다르지 않게 움직였다.
제국의 상황이 알려진 덕에 큰 행사 없이 각자 자리로 돌아가고, 나도 여왕과 여러 사람을 만난 뒤에 천천히 영지로 향했다.
전에도 이렇게 움직인 뒤에 문제가 터졌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아직, 정보가 부족했다.
예언가와 같이 온 여자의 직책은 물론,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거기다 제국군은 어떻게 공국 앞까지 와 있는지도, 내 이야기가 어떻게 전해져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대로 제국군이 다가오고 있을 공국 너머로 달려가 봤자,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예언가와 그 일행이 제국군과 같이 온 것도 아니었고.
이건 당사자에게 물어봐야 했다.
물론, 이런 식으로는 이번 삶에서 예언가 문제를 해결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 삶을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영지에 돌아온 뒤, 나는 다시 어머니를 뵙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과거 여러 번 들었던 이야기였지만, 저번 삶에서는 용사 카를로스와 싸우기 바빠서 건너뛰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머니와 다른 이들과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번 삶은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작은 즐거움까지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사람들과 대화하며 하루를 보낸 뒤, 나는 그날 밤늦게. 수련검을 꺼내는 대신, 로브를 입고 방을 나섰다.
방을 나서자, 조용히 내 옆에 나타나는 발레아.
“아직, 도시에는 그 여귀족이 들어오지 않았어요.”
발레아에게는 미리 영역을 통해 예언가와 일행이 도시로 들어왔는지 감시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영역을 펼쳤다고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감시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그녀의 기억에 있는 특정한 사람을 확인하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어떻게 예언가가 오는 것을 알았는지 궁금해할까 봐, 레스티를 통해 정보를 얻었다고 말해 놓았지만, 아쉽게도 발레아는 출처에 관해 관심이 없었다.
나를 믿어서인지, 아니면 아예 믿지 않아서인지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건 그녀는 충실히 내 지시를 따라 주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저택을 나섰다.
밤에 경비를 서던 병사들도, 당직인 기사도, 발레아와 내가 저택을 나서는 것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어두운 밤에 도시를 거닐었다.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고, 적막한 도시를 가로질러, 우리는 닫힌 서쪽 성문 앞에 도착했다.
발레아가 성문과 조금 떨어진 성벽에 손을 올렸고, 이어 성벽의 돌들이 움직였다.
성벽에 작은 통로가 만들어졌다.
발레아와 나는 그 통로를 지나 밖으로 나갔다.
우리가 지나가자, 통로는 다시 원래의 성벽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흔적 없이 성벽을 지나, 우리는 계속 서쪽으로 나아갔다.
투레 백작과 싸웠던 그 숲까지.
투레 백작과 싸웠던 크지 않은 아름다운 숲은 낮과 달리, 무척이나 어둡고 음침해 보였다.
내일 예언가가 어느 쪽으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투레 백작과 싸웠던 숲은 들렀을 게 분명했다.
내일 아침 일찍 나를 만나러 왔고, 아직 도시에 들어오지도 않았으니, 예언가는 적어도 오늘은 이 숲에 있거나,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터였다.
나는 작은 숲 앞에서 멈춰 선 뒤, 발레아에게 부탁했다.
“영역을 펼쳐서 숲 안에 사람이 있는지 알아봐 줘요.”
내 감각과 마나 감응력에는 사람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발레아가 지팡이를 땅에 꽂고, 눈을 감았다.
그녀의 마나가 앞으로 퍼져 나갔고, 잠시 뒤 그녀가 눈을 떴다.
“사람은 없어요.”
“다행이네요. 아직, 안 왔군요.”
나는 발레아와 함께 숲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숲을 걷고 있었지만, 발레아도 나도 불편하게 느끼지 않았다.
마치, 한밤의 산책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산책의 목적이 좀 황당했지만.
잠시 숲을 걷자, 곧 투레 백작과 싸웠던 공터가 나타났다.
확실히 이 공터에서 보니, 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들 덕분에 밤에도 숲은 꽤나 볼만했다.
“여기에 영역을 펼쳐 주세요. 그리고 사람들이 오면, 전에 말한 대로 부탁해요.”
내 말에 발레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지팡이를 땅에 세웠다.
이번에는 지팡이에서 강대한 마나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좀 전처럼 사람을 확인하기 위한 영역이 아니라, 그녀의 권세가 담긴 영역을 만들기 위한 마나가 퍼져 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발레아가 영역을 만드는 중에, 나는 오랜만에 유물 주머니에서 다른 무기를 꺼냈다.
이번에는 예언가에게 여러 질문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방해자들을 미리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무기를 꺼낸 뒤, 나는 발레아 옆에서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별들이 흐르고, 어렴풋이 아침노을이 퍼져 갈 무렵.
영역을 만들던 발레아가 눈을 떴다.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어요. 세 사람이에요. 그중에 한 명은 전에 봤던 여귀족이에요.”
나도 강대한 마나가 다가오는 것을 막 느끼는 중이었다.
방향은 북서쪽. 나는 무기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숲에 들어서기 전에 미리 마중을 나갈 생각이었다.
나는 바로 몸을 날렸다.
* * *
같은 시간.
예언가와 투레 백작, 그리고 또 한 여성으로 이루어진 일행은 이제 막 숲이 보이는 곳에 도착해 있었다.
투레 백작은 언덕을 넘자 보게 된 숲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면 저기 보이는 숲에서 기다리면 될 것 같군요.”
“네. 그렇게 하죠. 그런데 혼자 기다리셔도 괜찮겠어요?”
예언가의 말에 투레 백작은 너털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허허, 이래 봬도 전장에서 몇십 년을 구른 사람입니다. 저런 숲에서 조금 기다리는 정도야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더구나, 조금만 기다리면 좋은 싸움을 할 수 있었다.
투레 백작은 이런 기다림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어서 백작은 말없이 걷고 있는 다른 동료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같이 온 잔드라 경은 정말 말이 없군요.”
백작의 말에 예언가가 쓴웃음을 지으며 이번에도 대신 말했다.
“원래 저를 보호하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제가 알리나와 돌아다니느라 그동안 외면을 했거든요. 저도 오랜만에 만났는데, 전보다 더 심해진 것 같아요.”
“그게 언제부터…….”
백작의 물음에 조용히 걷고 있던 여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예언가가 대신 화를 내 주었다.
“그런 걸 묻는 건 실례예요.”
“허허.”
백작은 다시 웃음으로 넘기려 했고, 예언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원래, 대대로 저를 호위해 준 일가거든요. 따지고 보면, 잔드라 대에 제가 외도를 한 셈이에요. 지금도 정말 미안해하고 있어요.”
예언가가 두 손을 모아 사과를 하자, 여자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사과는 필…….”
아쉽게도 그녀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푹.
검은 화살 하나가 날아와 그녀의 목을 꿰뚫었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놀란 눈을 한 채로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여자가 허물어지기도 전에 검을 뽑아 든 백작은 예언가 앞을 막아섰다.
“누구냐!”
화살은 숲 쪽에서 날아왔었다.
아직 숲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예언가는 물론이고, 백작도 채 반응하지 못했다.
본인에게 날아왔다면 어떻게든 반응할 수 있었을 테지만, 예언가도 아니고 동료에게 날아가리라고는 생각도 못 한 것이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 화살은 평범한 화살이 아니었다.
그가 감지하기도 쉽지 않을 화살이라면, 유물, 그것도 보통 유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숲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쇠뇌를 다시 가슴 안에 넣고 있는 젊은 남자였다.
어려 보이는 남자였지만, 백작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파파팍.
허공에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숲에서 나온 젊은 남자는 마나량만 해도 백작 아래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