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3화
제23편 두 번, 아니, 세 번째 대결
결국, 나는 그녀를 따라가, 투레 백작을 만나기로 했다.
이미 한 방 크게 맞은 이상, 그녀가 준비한 것들을 다 확인해야 했다.
내가 따라간다고 하자, 예언가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다만, 같이 온 여성은 전과 표정이 달라지지 않았다.
엄청나게 무표정한 여성. 어떤 능력인지 더 궁금해졌다.
나는 먼저 복도로 나가, 문밖에서 기다리던 집사장에게 말을 남겼다.
“두 사람과 볼일이 있어서 도시 밖을 나갔다 올 테니, 그렇게 알고 있도록.”
내 말에 집사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제가 따로 준비해놓아야 할 게 있습니까?”
역시, 눈치가 빠른 집사장이었다.
방 안에서 나눈 대화는 한마디도 듣지 못했지만, 분위기가 묘하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린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훌륭한 집사장이었지만, 그가 도울 일은 없었다.
“나머지는 발레아에게 말했으니, 필요한 일이 있으면 그녀에게 물어보면 돼.”
“아, 알겠습니다.”
내 말에 집사장은 바로 수긍했다.
확실히, 이 영지에서 발레아에 대한 신뢰는 나 이상이었다.
사실, 집사장에게 말한 것과 달리 발레아에게 아직 따로 말해놓은 것은 없었지만, 그건 지금 말해놓으면 될 터였다.
나는 복도를 걸으며, 규칙적으로 발을 몇 번 굴렀다.
퉁. 퉁. 퉁.
지켜보고 있을 발레아와 약속한 신호였다.
몰래 따라오라는 신호.
신호를 보내자 발을 통해 발레아의 음성이 전해졌다.
‘따라갈게요. 몸조심하세요.’
현재 내게 최강의 패는 ‘사자 회귀’ 능력과 발레아였다.
더구나, 이 영지, 이 도시 근처에서는 발레아의 능력이 극대화되었다.
오랜 시간 그녀가 펼쳐놓은 영역 덕분이었다.
그렇기에, 지금도 그녀가 따라와 준다는 말에 뒤가 든든해졌다.
앞장서서 저택 내를 걷자, 고용인과 하녀들이 복도 양쪽에 서서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저택을 나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정문을 지키던 병사들도, 창을 들어서 내게 예를 표했고, 말을 타고 거리를 나서니, 영지민들이 거리 양쪽으로 물러서서 내게 고개를 숙였다.
전과 달리,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인사였다.
시간이 지나서인지, 바닥에 엎드리는 사람도 없었고, 새로운 인사법에 쭈뼛거리는 사람도 없었다.
말을 타고 내 뒤를 따라오던 예언자는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영지민들을 많이 풀어주는 영주신가 보네요.”
우리 왕국 내에서도 너무 풀어준다고 뭐라 하는 사람이 많으니만큼, 제국 출신인 예언가가 보기에는 신기해 보일 만했다.
“대전쟁이 끝나고 처음 나라를 만들 때는 용사의 후예도, 기사도, 평범한 사람들도 모두 힘을 합쳤었는데…….”
하지만, 그녀는 내 예상과는 조금 다른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는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대전쟁 전의 제국과 다를 바 없는 나라들이 되어버렸군요.”
젊은 얼굴에 회한이 가득했다.
나에게 비밀을 말해서인지, 그녀는 전과 달리 내 앞에서 자신을 마냥 드러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그녀가 왜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마왕을 막기에 더 좋은 길을 찾기 위한 자리라는 것은 핑계일 뿐이었다.
저 육체만 젊은 노인은 세월에 지쳐버린 것이었다.
수백 년간 책임감에 눌려서 살아오던 삶에서 대안이 나타나자, 얼씨구나 하고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그건 내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풀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예언가의 감탄을 들으며, 우리는 도시를 빠져나갔다.
투레 백작은 도시의 서쪽, 말을 타고 10분 정도 달려가야 하는 작은 숲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중앙에 공터가 있는 작은 숲.
노인이 되어가는 남자가, 공터 한쪽에 자리를 펴고 앉아 홀로 차를 들이켜고 있었다.
“좋은 숲이군. 쉬기에 좋아.”
우리가 도착하자, 그가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그의 말대로 이 작은 숲은 무척이나 평화롭게 아름다웠다.
나도 잘 알고 있는 숲이었다.
나도 마음에 들어, 별장으로 쓸 생각으로 개발을 막아놓은 숲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오늘 이후, 이 숲은 그 아름다움을 잃게 될 테니.
내가 말에서 내리니,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소개했다.
“투레 폰 슈폰하임이네. 다른 사람들이 검주라고 부르고 있지.”
처음 보는 나에게 하는 인사일 테지만, 나는 그를 처음 본 게 아니었다.
나는 지금은 사라진 삶에서 그를 보았었고, 그에게 죽임을 당했었다.
그때는 실력 차이가 커서 목걸이로 마나를 증폭했는데도 허무하게 지고 말았었다.
“알렉스 디 샤를입니다. 이 영지의 영주입니다.”
그의 인사에 나도 처음 본 것처럼 내 소개를 했다.
내 소개에 투레 백작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전에 나를 본 적이 있었나? 얼굴은 분명 처음 보는데, 어째서인지 본적이 있는 느낌이 드는군.”
나와 달리, 마나를 보지 못하지만, 역시 실력이 좋은 능력자들은 예리했다.
사실, 없어진 삶 뒤에도 그를 한 번 더 만났었다.
대공국 북쪽 성벽에서 제국군과 대치했을 때, 나는 갑옷으로 모습을 숨기고, 그의 앞에 섰었다.
물론, 그때도 이길 수 없어서, 최대한 말로 시간을 끌었었다.
그래도, 그는 예언가와 달리 확신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그건 내가 아직, 마나를 풀어놓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내가 앞에 서자, 투레 백작은 뒤이어 말에서 내린 예언가를 바라보았다.
“확인은 했습니까? 이 청년이 그 ‘적대자’ 입니까?”
백작의 말에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예언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내 모습 때문에 믿기 어려워서였을까?
백작은 다시 나를 쳐다보았고, 심각한 얼굴로 마나를 뿜어냈다.
투레 백작의 강대한 마나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 마나는 그의 주변을 장악해 나갔고, 결국, 내 앞까지 다가왔다.
싸우기도 전에 그의 마나가 주변을 장악하게 둘 수는 없었다.
나도 마나를 끌어올렸다.
수많은 싸움을 이어온 덕에, 가라앉힌 마나를 끌어올리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파파파팍.
다음 순간, 내 주변에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투레 백작의 마나와 내 마나가 충돌한 것이다.
투레 백작은 내 주변에서 나타난 스파크를 보고 눈이 커졌다.
생각과 다른 내 마나에 놀란 모양이었다.
“설마, 그 말이 사실이었나?”
그는 마나를 막아 낸, 내 실력을 보고 예언가의 말을 조금은 믿어준 것 같았지만, 아직 놀라기에는 일렀다.
나는 마나를 더욱 끌어올렸다.
파파파파팍.
내 주변에서 튀어 오르던 스파크가 점점 앞으로 밀려 나갔다.
그렇게 점점 밀려 나가던 스파크는 그와 나 딱 중간에 멈춰 섰다.
투레 백작은 점점 놀라는 표정이 되더니, 어느 순간, 뭔가 생각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기억이 난 모양이었다.
“설마?”
“기억나셨습니까? 공국의 성벽 앞에서 뵈었었지요.”
“설마, 그놈이었나? 제국 기사들을 죽이고 내 속을 박박 긁었던 재수 없던 기사 놈이 바로 너였던가!”
백작은 버럭 화를 냈다.
내가 ‘적대자’라는 것을 알고도 침착하던 백작이, 공국 때의 기사가 나라는 것을 알게 되자,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그동안, 만나기를 고대했었다! 기사가 내 결투를 거절하다니. 나는 그동안, 네 입에 검을 꽂기를 계속 기다려왔다!”
백작의 격렬한 반응에 나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뭔가 환상이 깨진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처음에 봤을 때부터 기사의 화신처럼 보이던 사람이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생각보다 더 기사라는 것에 자긍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예언가와 다르면서도 비슷한 사람.
‘둘 다 답답하고 고리타분한 노인들인가…….’
아무래도 나와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어찌 되었건, 결국, 싸워야 할 사람. 나는 ‘신검’을 들어 올렸다.
“제국에 피해를 준 ‘적대자’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싸울 상대였는데, 거기다, 성벽 앞에서 만났던 놈이라니. 오늘은 운이 좋군.”
백작도 검을 뽑았다.
평범해 보이는 검이었지만, 은은하게 어린 빛이 ‘유물 검’이라는 것을 잘 알려주었다.
“물러서십시오! 내 생각보다 훨씬 강한 상대입니다!”
싸우기 전, 백작이 예언가에게 소리쳤다.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저를 지켜줄 사람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예언가는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예언가와 같이 온 여자는 자신만이 아니라, 같이 있는 사람까지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건가?
역시, 이번에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았다.
백작은 검에 마나를 밀어넣으며 내게 말했다.
“왜 혼자 왔는지 모르겠지만, 그걸 후회하게 해주겠다.”
전과 달리 거친 백작의 말.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도 그에게 똑같이 돌려주었다.
아무리 회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더라도 혼자 올 리가 없었다.
백작도 예언가도 알지 못했지만, 이 주변은 발레아의 마나가 가득했다.
더구나, 나는 백작 이상으로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어제 수련 검 안이긴 했지만, 전성기의 용사 카를로스를 이겼었다.
투레 백작이 강하다 한들, 대전쟁 때의 용사보다 강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걸 증명할 생각이었다.
나는 먼저 투레 백작을 향해 몸을 날렸다.
몸을 날리며 내지른 ‘신검’이 백작의 머리를 뚫기 위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카아앙!
당연히 ‘신검’은 백작의 검에 막혔다.
“큭. 이게 무슨.”
하지만, ‘신검’은 막았다고 끝나는 검이 아니었다.
신검 안에서 변형된 마나가 백작의 검을 통해 백작의 몸에 충격을 주었다.
“이런, 잔꾀를!”
백작은 인상을 쓰며 화를 냈지만, 나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이 정도 실력이 되니, 마나를 증폭하는 목걸이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마나가 강해진 만큼 제어하기도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무기들은 아직도 도움이 되었다.
특히, ‘신검’은 동급의 다른 기사와의 공방에는 특히 도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검을 맞대도, 방패나, 갑옷으로 막아도, 신검에서 변형된 마나가 상대의 내부를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 용사와의 싸움에는 쓰지 않았지만, 투레 백작과의 싸움에는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대검을 써도 이길 수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좀 더 확실히 이겨야 했다.
예언가의 준비가 투레 백작이 끝이 아닐 터였다.
발레아가 뒤를 받히고 있었지만, 나도 뒷일을 대비해야 했다.
거기다, 예언가와 같이 온 저 여자도 믿을 수 없었다.
예언가가 죽음으로 비밀을 지킨다고 해도 저 여자도 같이 죽어줄 리는 없었다.
예언가의 말도 백 퍼센트 신용할 수도 없고.
그래서 나는 이번에 투레 백작을 완전히 박살 낼 생각이었다.
쾅! 쾅!
“크윽. 크윽!”
생각보다 투레 백작의 실력은 더 훌륭했지만, 내 예상대로 카를로스 용사보다 강하지는 않았다.
검술도 훌륭하고, 오랜 실전으로 경험도 출중했지만, 어차피 그도 용사의 후손.
용사 능력의 한 파편일 뿐이었다.
카를로스 용사의 능력을 온전히 이어받고, 그를 이긴 나의 상대는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끝으로, 그는 검과 함께 목이 잘려 나갔다.
제국에서 손꼽히는 기사이자, 귀족의 허무한 최후였다.
그만큼 내가 강해진 것일 터.
하지만, 나는 승리의 기쁨에 취해 있는 대신, 고개를 돌려 예언가가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싸움의 여파로 엉망이 된 숲에는 나만 남아 있었다.
내 예상대로 예언가와 동료는 그 자리에 없었다.
승부가 나자 도망친 것이었다.
중간에 흘려듣기로는 동료가 납치하듯이 예언가를 데려간 것 같지만, 어쨌든 결론은 다르지 않았다.
싸우고 있긴 했지만, 내 눈을 피해 도망친 것을 보니, 확실히 도망치는 실력은 대단했다.
하지만, 그들은 발레아의 눈은 피하지 못했다.
엉망이 된 숲 바닥에 한 줄기 선이 그려져 있었다.
발레아가 두 사람을 쫓으며 표식을 남긴 것이었다.
나도 그 선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