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2화
제22편 예언가의 방문 (3)
찾아온 사람이 예언가라는 것은 만나기 전에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녀는 단지 제국에서 찾아온 귀족으로 알려왔지만, 마나를 파악할 수 있는 나에게는 신분을 속일 수 없었다.
더구나, 이 저택과 주변은 발레아가 오랫동안 구축해 놓은 그녀의 영역 안.
집사보다 먼저 발레아가 그녀의 방문을 알려왔다.
우리가 제국에 사절로 방문했을 때, 여검호와 같이 제국 요새로 찾아왔던 여성이 영역 안에 들어왔다고.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냥 돌아가게 하실 건가요? 아니면 다른 방법이라도…….”
집무실에 찾아온 발레아가 슬쩍 지팡이를 들어 보였다.
내 허락이 있으면, 그냥 묻어버릴 심산인 듯했다.
예언가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나도 꽤 놀란 모양이었다.
발레아의 말에 혹하는 기분이 드는 것을 보면.
하지만, 솔직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정말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현실은 하나같이 쉬운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발레아의 말처럼 찾아온 손님을 그냥 묻어버릴 수는 없었다.
그 방법이 제일 편하긴 했지만, 예언가가 아무 대안도 없이 이곳을 찾아올 리가 없었다.
솔직히 그녀가 직접 찾아온 것도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나에 대해 알게 되었다면 전쟁을 각오하고 군대나 기사단을 보냈을 텐데…….
결국,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직접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혼자 온 것은 아닌 것 같고…….”
“네. 여성분 두 분이 같이 오셨습니다.”
발레아와 내 이야기를 못 들은 척하던 집사장은 내 질문에 바로 대답했다.
같이 왔다는 여성의 마나는 처음 보는 형태의 마나였다.
격렬한 형태가 아닌 것을 보니, 전투 쪽 능력자는 아닌 듯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지고 보면, 지금이 가장 위험하고 막막할 때일지도 몰랐다.
죽으면 과거로 돌아가는 내 능력이 없었다면, 지금 한껏 좌절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을 터였다.
의아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조금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발레아에게 몇 가지 부탁을 하고, 예언가가 기다리고 있는 홀로 향했다.
아무래도, 25살 용사를 꺾고 오늘까지 ‘시점 저장’ 메시지창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이 일 때문인 모양이었다.
그건, 아직 위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었고, 예언가가 찾아온 이 일도 쉽게 끝나지 않는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이번 위기도 쉽지 않을 터였지만, 나는 복도를 걸으며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용사를 겨우 이겼었는데……. 설마 또 싸워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솔직히, 나는 예언가와 만나는 일보다, 용사와 다시 싸워야 하는 일이 더 걱정되었다.
나는 홀에 먼저 들어간 집사장의 소개를 들으며 홀 안으로 들어갔다.
“샤를 영지의 주인이신 알렉스 디 샤를 백작님이십니다.”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두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 삶에서 몇 번이나 봤었던 예언가는 살이 빠져서 전보다 초췌해 보였지만, 이상하게도 표정은 상당히 편해 보였다.
뭔가 달관한 사람 같다고 할까.
이상한 느낌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는 그녀 옆에 있는 여성을 살펴보았다.
젊은 여성은 아니었다.
둘이 서 있으니 예언가가 훨씬 어려 보일 정도인, 인상이 날카로운 여성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더 마나가 강력했지만, 처음 예상대로 전투 쪽 마나는 아닌 것 같았다.
무슨 능력인지 궁금했지만, 당장은 예언가를 상대해야 했다.
나는 다시 시선을 예언가에게 향했다.
예언가는 나를 한껏 노려보고 있었다.
“목소리는 같지만, 그날, 내 앞에 섰던 사람은 당신이 아니었군요.”
처음 그녀가 꺼낸 말은 얼마 전에 죽은 여검호 알리나와 같은 말이었다.
“글쎄요…….”
하지만, 나는 알라나 때와 달리,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때 이미, 죽이기로 했었던 알리나와 달리, 아직 예언가는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상대에게서 거짓을 알아차리는 예언가의 능력 때문에 함부로 대답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말을 얼버무리는 것으로 예언가의 능력을 피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역시 저에 대해서 알고 있어서 다른 사람을 내세운 거였군요.”
내 말에 그녀는 오히려 확신하게 된 모양이었다.
나는 손을 흔들어, 집사장을 나가게 하고, 마나를 움직여 방음벽을 펼쳤다.
예언가와 나만을 감싼 방음벽을.
그녀의 동료를 빼놓았지만, 예언가도 같이 온 동료도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나는 슬쩍 허리에 찬 검에 손을 올렸다.
눈치챌까 봐 다른 검집에 넣기는 했지만, ‘기사의 검’에 손을 올리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이제, 제일 걱정인 ‘정신 능력’은 막을 수 있게 되었고.
이제 예언가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되었다.
죽게 되더라도, 먼저, 왜 직접 찾아왔고,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들어야 했다.
내가 물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내가 다른 사람을 내세운 것으로 하나하나 추리를 풀어나갔다.
“그날, 다른 사람을 내세웠다는 것은 마물을 부르는 지팡이를 백작님이 가지고 있었다는 말일 테고.”
“그렇다면, 그 뒤에 수도 차르마니아에서 벌어진 마물 사건들은 당신이 제국 수도에서 지팡이를 써서 생긴 사건이겠군요.”
이어지는 그녀의 추리는 무척이나 훌륭했다.
“그리고, 이번에 제국 땅으로 마물들이 몰려온 것도, 당신과 연관이 있을 테고…….”
“알리나를 죽인 것도 알리나가 당신의 일을 방해하려고 했기 때문인가요?”
그 추리는 결국, 어떻게 그녀가 나에 대해 알게 되었는지 내게 알려 주었다.
“당신은 알리나, 아니, 혈족의 생애를 보는 능력이 있는 건가?”
내 물음에 예언가 율리아의 눈이 처음으로 커졌다.
맞춘 모양이었다.
예언가의 능력.
미래를 보는 능력은 따지고 보면, 다른 능력에 비해 어처구니없이 강대한 능력이었다.
과거로 회귀하는 내 능력도 다른 능력에 비해 무척 대단한 능력이었지만, 이 능력은 내 개인의 시간을 움직이는 능력일 뿐이었다.
내가 여태껏 보아온 능력은 모두 개인을 기준으로 능력이 발동되었다.
나는 물론이고, 기사의 강대한 힘이나, 불과 물을 부르는 능력도 모두 능력자의 시야 내에서 능력이 움직였다.
훨씬 먼 거리에 영향을 미치는 발레아의 능력도 그녀가 선 위치를 기준으로 하고 있었고.
공간 이동마저, 시전하는 사람을 기준으로 이동이 될 정도였다.
당연히 그녀의 능력도 그녀 자신을 기준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의 미래만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마왕의 재등장까지 보았다는 그녀의 예지와는 맞지 않았다.
그녀의 위치에서 그런 힘든 시간에, 마지막까지 살아남기는 어려울 터였다.
그녀의 예언을 듣고, 그런 의문을 가지는 중에, 나는 알리나가 예언가를 할머니라고 부르는 것을 듣게 되었다.
예언가는 내 생각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고, 그것은 내게 흐릿한 가능성을 떠올리게 했다.
바로 전까지도 그 가설은 나조차 믿기 어려웠지만, 지금 그녀의 표정으로 사실이 되었다.
“당신은 슈바벤 가문의 선조였군요. 가문의 사람들은 전부 당신의 후손. 당신은 자손들의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는 것일 테고요.”
예언가는 내 생각보다 훨씬, 훨씬 더 나이가 많았다.
대전쟁 때의 용사는 아니었겠지만, 얼마 차이는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내 정체를 알게 된 것도 결국, 내가 알리나를 죽였기 때문이었다.
“대단하네요. 그걸 아는 사람은 이미 다 죽었는데……. 이렇게 작은 정보만으로 내 능력을 알아차리는 사람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그녀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걸 알아차린 것은 당신도 비슷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일까요? 안 그래요? ‘적대자’ 샤를 백작님?”
“글쎄요. 전 그런 능력은 없습니다만.”
“말을 돌려도 소용없어요. 당신이 내 앞에 다른 사람을 세운 것을 잊었나요? 당신의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 나는 보이지 않아요.”
거짓말이 아니었지만, 내 회귀 능력 때문에 소용이 없게 된 모양이었다.
이래서야, 말을 돌리거나, 얼버무리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젓고, 예언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도 담담했지만, 예언가의 표정도 대적인 나를 앞두고도 무척이나 담담해 보였다.
그 표정에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알리나 경을 내가 죽인 것을 알고 있을 텐데, 화를 내지 않는군요.”
내 말에 예언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화를 내는 대신, 슬프고, 지친 표정을 지었다.
“좋아하던 아이라, 죽었다는 것을 알고 아주 슬펐어요. 다만…….”
그녀는 허무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살아오는 동안, 너무 많은 죽음을 보았어요. 아들과 딸. 손자와 손녀. 그리고, 많은 자손의 죽음을……. 아무래도 내가 너무 오래 살았던 모양이에요.”
오랜 삶이 그녀의 감정을 둔탁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방향은 달랐지만, 감정이 무뎌진 그녀의 모습은 나와 조금은 비슷해 보였다.
이제, 그녀가 어떻게 찾아온 것인지,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전부 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들어야 할 게 있었다.
“내가 ‘적대자’라는 것을 알고도 왜 직접 찾아온 거죠?”
내 물음에 예언가는 미소를 지었다. 한없이 지친 미소였다.
“좀 전에 말했다시피, 오래 살아오면서 감정을 많이 잃게 되었어요. 남은 것은 목적의식뿐. 저는 한 가지 목적으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녀의 말을 들으니, 그 목적이란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마왕을 막는 겁니까?”
“네. 그게 제가 용사님에게 받은 부탁이었어요.”
세상에…….
내 상상이 짧았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수백 년 전, 대전쟁 시기의 사람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저는 제국과 조직, 교단의 힘을 빌려 봉인을 푼 마왕을 막으려 했어요. 잘못된 일도 많았고, 고통받는 사람과 나라도 많았지만, 그게 옳은 방향이라 믿었지요.”
그녀의 지친 얼굴에는 아직도 한줄기 신념이 비쳐 보이고 있었다.
“지금도 그 일들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결국, 제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저는 최선을 다해 준비했고,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대안도 나왔으니까요.”
“그럼, 이렇게 직접 찾아온 것은…….”
“제가 미래가 안 보이는 것처럼, 당신도 확실한 미래를 보지는 못할 거에요.”
그녀는 나도 비슷한 예지자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내 능력은 달랐다. 나는 한 톨의 미래도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수백 년 동안 제가 준비한 것과 새로운 대안 중에 어느 쪽이 더 마왕을 상대하는 데 쓸모 있을지 확인해 보기 위해 찾아온 것이에요.”
그녀의 말에 나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녀의 말이 이해되긴 했다.
하나의 목표를 위해 수백 년을 버틴 그녀의 삶에 박수를 칠 생각도 있었고.
하지만, 그녀의 이런 행동은 내가 볼 때는 어이가 없는 행동일 뿐이었다.
수백 년간 준비한 계획을 마구 부숴댄 상대를 찾아가 자신의 계획과 비교를 한다고?
내가 그녀라면, 황제에게 말해서 이 영지에 제국군을 쏟아부었을 터였다.
물론, 인류를 구하기 위해 세속적인 모든 감정을 내려놓은 그녀의 품성은 감탄할 만했지만, 그건 나와 내 목적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좀 전에 발레아가 말한 것처럼 그녀를 그냥 묻어버릴 수는 없었다.
예언가의 말을 들으니, 같이 온 여성이 무슨 능력인지 대충 유추가 되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살아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가졌군요.”
내 말에 예언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온 여성은 내가 예언가에게 손을 쓰려고 하는 순간, 자리를 빠져나가 제국에 알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귀족이었다.
머릿속은 꽃밭이었지만, 준비는 확실하게 해온 예언가였다.
‘이 여자 능력도 확인해 놓아야겠군.’
나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고, 다시 예언가에게 물었다.
“그 확인은 어떻게 하는 거죠?”
“제가 투레 백작을 모셔왔어요. 도시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언가의 말에 갑자기 의욕이 확 일었다.
투레 백작.
그는 전에 나를 죽였었던,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