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1화
제21편 예언가의 방문 (2)
영지에 돌아와서 어머니를 만나고, 사람들에게 최대한 간단히 보고를 받은 뒤, 나는 침실로 돌아와 수련 검을 꺼냈다.
영지에 돌아와 다른 업무를 미룬 것도, 수도에 돌아왔을 때 저장 시점을 새로 잡은 것도, 다 이것 때문이었다.
이제, 확인해 볼 때가 되었다.
과연 지금의 나는 전성기 때의 용사를 이길 수 있는지를.
수련 검을 잡자, 전처럼 임시 사용자라는 메시지가 눈앞을 지나갔다.
설정도 그대로 놔두고, 나는 환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다시 보게 된 텅 빈 콜로세움.
지금 보니, 고대 제국의 유적과도 닮지 않은 경기장이었다.
이 콜로세움은 어떤 시대의 어떤 건물을 보고 만든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하기야, 에너지는 마나로 다 해결했다고 쳐도, 다른 유물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해하기가 불가능한 판이니.
그 유물이 만든 환상을 이해하는 것도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일 뿐이었다.
그렇게 주변을 구경하고 있으니, 다시 15살 용사, 어린 카를로스 초대 왕이 등장했다.
처음에는 어린 나이에도 높은 절벽 같은 상대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
나는 달려오는 소년 용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별다른 능력이나, 힘으로 밀어붙이지도 않았다.
그냥, 수련 기사에게 지도 검술을 펼치는 것처럼 검을 휘두르다 보니, 15살 용사는 바닥에 쓰러졌다.
검의 에고는 승부가 났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죽이지도 않았지만, 어린 용사는 쓰러진 채로 사라져갔다.
다시금 콜로세움에 나만 남게 되었다.
잠시 뒤, 두 번째 상대가 등장했다.
성인이 된 용사.
지금의 나보다 더 크고 나이가 많은, 20살의 카를로스였다.
그래도 전에 쓰러뜨려 본 적이 있다고, 전 같은 압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편안하게 서서 대검을 들고, 전과 달리 그가 달려들기를 기다렸다.
전에 그를 쓰러뜨렸을 때는 서로 실력이 비슷해서 아슬아슬하게 쓰러뜨렸지만, 지금은 그의 실력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얼마나 완성이 되었는지, 나와의 실력 차가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달려드는 용사를 상대하면서 내 느낌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0살 용사는 대단한 기사이고, 자신의 능력도 제대로 쓸 수 있는 완성된 능력자였다.
다만, 그도 실전이 부족했다.
그의 다양한 능력과 검술은 내가 보기에는 너무 정형화되어 있었다.
더구나, 이제는 내 마나와 육체의 힘이 20살 용사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고.
싸움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가슴에 검을 박아넣자, 20살 용사도 사라져갔다.
마지막으로 그와 싸울 때, 고생했던 것을 생각하니 격세지감이 들었다.
아직 1년이 채 되지 않았는데, 마치 수년, 수십 년이 지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능력 때문에 나로서는 1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그것보다 훨씬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그렇게 잠시 회한에 잠겨 있으니, 먼저 음성이 들려왔다.
[마지막 상대입니다. 마왕을 봉인한 25살 카를로스입니다.]
전에도 본 적이 있는 전성기의 초대 왕이 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수많은 상처가 몸을 뒤덮고 있는, 실제 나이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 보이는 우리 왕국의 용사.
‘수련 검’의 능력이 대단한 것인지, 초대 왕의 얼굴에서 그동안의 피로가 보일 정도였다.
그 혼자 마왕을 봉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를 이긴다면, 나도 마왕을 상대할 위치에 서게 된 것일 터였다.
내 앞에 선 용사는 전처럼 입을 열었다.
[내 후손을 위해 남기는 마지막 시험이다. 나를 뛰어넘어 위험에 대비해라.]
전에는 말하는 자체로 놀랐지만, 한 번 들었던 말이니, 이번에는 내용에 집중할 수 있었다.
확실히, 용사 카를로스는 봉인된 마왕이 다시 봉인을 풀고 나타날 것으로 생각한 것일까.
따지고 보면 조직도, 교단도, 제국도 모두 준비해오고 있었다.
다른 환상에서 본 용사들도 같은 준비를 하려 했고.
다만, 그 준비가 과거와 다른 종교를 지우고 또는, 제국만 살아남기 위한 준비가 되었을 뿐이었다.
뭐, 나도 나와 내 주위, 그리고 내 나라만을 위해 살고 있으니, 그들을 욕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내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뿐.
“도전하겠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나는 최전성기의 용사와 싸우기 시작했다.
* * *
샤를 백작이 돌아온 다음 날 아침.
집사장은 영주의 침실 앞에 서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는 다른 때보다, 훨씬 긴장해 있었다.
전에는 이렇게 긴장하지 않았었다.
새로운 젊은 영주는 다른 영주들과 달리, 무척이나 실무적인 영주였다.
일을 제대로 처리하기만 하면 예의나 예절은 크게 구애받지 않는 귀족답지 않은 영주라고 할까.
기사로 작위를 받아서 그런 것일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렇다면 이 영지가 이렇게 빠르게 성장할 리가 없었다.
혹시 ‘서자’라서 그런 게 아니냐고 잠깐 떠올려보기도 했지만, 그가 서자로 있던 곳은 그 ‘그레시아’ 공작가였다.
서자라고 예절을 배우지 않을 리가 없었다.
더구나, 그는 예절에 신경을 안 쓸 뿐 예절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집사로서는 아쉬운 점이 없지 않았지만, 고용인들도, 서기관들도 새로운 영주에 대해 칭찬이 자자했다.
물론, 영지가 성장하고, 여왕의 총애를 받아 계속 작위가 높아지고 있으니, 그런 면에서도 칭찬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영주의 이번 복귀는 전과 달랐다.
여왕의 부름으로 수도로 가서, 기사와 귀족들을 이끌고 봉인지까지 갔다가 왔다고 들었는데, 돌아온 영주님의 표정이 영 아니었다.
일도 잘 끝내고, 수도에는 영주님의 칭찬이 자자하다는 말을 발레아 님이나 같이 갔던 이들에게 들었는데, 영주님의 표정을 봐서는 뭔가 문제가 있어 보였었다.
외유를 끝내고 영지로 돌아오면, 언제나 마님을 먼저 뵙고 영지의 일을 처리했던 영주님이었지만.
이번에는 모든 일을 다음 날로 미루고, 바로 침실로 들어가셨다.
영지의 일 처리는 그렇다 쳐도 마님께 인사를 드리지 않은 것 때문에 지금도 다들 말은 안 했지만,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것은 집사장인 그도 마찬가지였다.
이 도시 안에, 그것도 영주의 저택을 관리하는 일만 맡고 있었지만, 돌아가는 사정은 얼추 알고 있었다.
지금 세상이 얼마나 위험해지는지, 돌아가는 소문과 난폭한 마물들이 사람들을 얼마나 죽이고 있는지도.
그런 상황에서 영지를 이렇게 지키고 발전시키고 있는 영주님이 안 좋으시다면 정말 큰 일이었다.
더구나, 영주는 그가 문안을 오기 전에 스스로 일어나 일정을 수행해왔었다.
그런 영주가 늦잠이라니…….
집사장은 정신을 바짝 차린 채로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아침입니다. 일어나셨는지요.”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그렇게 집사장의 걱정이 더 커지는 순간.
“……아, 그렇군. 내가 이겼었지.”
안에서 예상 밖의 말이 들려왔다.
영주의 목소리였지만, 그의 물음과 전혀 관계없는 대답이었다.
집사장의 머릿속에 안심과 걱정이 마구 교차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씻길 사람을 준비할까요?”
젊은 영주는 모든 일을 최대한 스스로 하려 했었다.
그는 그동안 아침 세수도 스스로 해왔었다.
하지만, 오늘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아뇨. 준비할 필요 없습니다. 금방 나가죠. 대신 식사를 제대로 부탁해요.”
이어진 말에 집사장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평소의 목소리였다.
거기다, 평소보다 조금 더 활기찬 목소리였고.
식사를 제대로 준비하라는 것을 보니, 확실히 기분이 좋으신 듯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시키겠습니다.”
대답이 들려온 뒤, 집사장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나는 침대에 앉은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는 영지의 내 침실이 맞았다.
그리고 집사장의 말을 들으니, 오늘은 영지에 돌아온 다음 날이었다.
용사를 이긴 게 꿈이 아니었다.
나는 침대 위에 굴러다니고 있는 수련 검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몇 번을 반복한 것인지…….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반복하게 될 줄을 생각도 못 했다.
차라리 실력 차가 많이 났으면, 그냥 포기했을 텐데…….
아슬아슬한 차이로 매번 지는 바람에 계속 도전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25살 용사에게 지고, 충격에 죽어버려, 과거로 돌아가 왕국 수도에서 다시 깨어나는 삶은 계속 반복하게 되었다.
“이런, 그러고 보니, 이번 삶에서는 문안 인사도 하지 않고, 보고도 받지 않았군.”
첫 번째 삶 때에는 영지에 돌아와서 어머니에게도 문안 인사를 하고, 짧게나마 사람들에게 보고도 받았지만, 삶이 반복될수록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이번 삶에서는 수도에 있을 때도 혼자서 훈련만 하고 있었고, 돌아올 때도 한껏 인상을 쓰고 있었다.
“다들 걱정하고 있겠어.”
자리에서 일어나 후딱 씻고서 옷을 걸쳤다.
그리고, 침대에 걸쳐있는 수련 검을 들었다.
전에 들렸던 임시 사용자라는 말은 이제 들려오지 않았다.
25살 용사, 마지막 상대를 이긴 뒤, 나는 이 검의 정식 사용자가 된 것이었다.
이제 나는 이 검의 기능을 마음껏 바꿀 수 있었다.
감도를 조정하는 것은 물론, 싸울 상대를 카를로스 용사 대신 나로 설정할 수도 있었다.
물론, 카를로스 용사 말고도 등록된 기사가 있었지만, 그 기사는 평범한 기사였다.
나는 검을 유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나는 이 검을 봉인할 생각이었다. 내게 많은 도움이 된 검이었지만, 이제는 쓸모가 없어진 검이었다.
나중에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이번 위험이 지나간 뒤, 훗날에 생각할 문제였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지만, 꼴 보기가 싫어서 봉인하기로 한 것이었다.
게임 다 깨고 최종 보스에서 매번 져 버리는 그런 경험을 현실에서 해버리니, 열이 안 받을 수가 없었다.
물론, 용사를 너무 쉽게 본 내 탓도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열받는 게 줄어들지는 않았다.
검을 집어넣고, 침실을 둘러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쨌거나, 결국, 목표였던 카를로스 용사를 이긴 것이다.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고, 고생도 많이 했지만, 드디어 기본적인 준비는 마쳤다.
아직, 봉인지에 남아 있는 마물 왕도 더 있었고, 마왕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지만, 마음만은 든든해졌다.
기본적인 준비를 마쳤으니, 이제 영지에 신경을 쓸 때였다.
인사를 드리지 못한 어머니께 먼저 안부를 드려야 할 테고.
신경을 쓰지 못한 발레아와 다른 이들도 만나야 하고.
할 일이 많았다.
하지만, 목표 한 가지를 끝낸 덕에 기쁜 마음으로 복도를 나설 수 있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영지에 신경을 쓸 시간은 많지 않았다.
며칠 뒤, 예상치 못한 사람이 저택에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예언가가 직접 나를 만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