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6화
제16편 마물 왕 웨이브 (1)
봉인지에 가까운 북부 산맥은 산맥의 출발점이라 다른 곳처럼 높고 험하지 않았다.
그래도 산맥이라 불릴 만한 산들이 이어져 있기는 했지만, 발레아와 내가 넘어가기는 어렵지 않았다.
산맥을 넘어가면서 본 마물들은 전과 달리 뭔가에 홀려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마물들끼리 싸우지도 않고, 내달리는 모습은 마물들의 웨이브 때나 볼 수 있었던 모습이었다.
그래도 나와 발레아가 힘을 합치니 광기에 빠져 있는 마물들에게 들키지 않고 산맥을 넘을 수 있었다.
북부 산맥 너머, 제국이 지키는 봉인지 경계는 남쪽 공국과 달랐다.
군사력이 월등한 제국은 봉인지 경계에 요새들을 세우고, 기사들을 상주시켜서 봉인지에서 마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감시하고 있었다.
요새 간의 거리가 가까워서 제국은 마물들을 감시하는 데 정찰대를 보내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거기다, 근래 많은 수의 정예 기사들이 요새로 오는 바람에 지금은 거꾸로 기사들을 요새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유명한 귀족들과 검호로 불리는 이들까지 왔으니, 원래 요새에 있던 이들은 직급이 높은 상전들이 가득 생긴 기분이었다.
나도 그런 요새들의 상황을 북부 산맥을 넘기 전, 레스티에게서 전해 들었었다.
다만, 어차피 요새에 접근할 생각은 없었기에, 그 소식은 머리 한쪽으로 미뤄두었을 뿐이었다.
나는 발레아와 함께 요새의 후방, 제국이 봉인지와 중간지대로 만들어놓은 벌판으로 향했다.
남쪽 공국과 같은 이유로 황무지만 가득한 허허벌판.
그곳에 도착한 내 눈에 오랜만에 메시지창이 보였다.
<마물 왕들이 움직일 때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저장 시점’을 설정하시겠습니까?>
메시지창의 내용을 보니, 내가 이곳에 도착해서 나타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메시지창이 나타난 것은 마물 왕이 움직일 때가 되어서였다.
다행히 알맞은 때에 도착한 듯했다.
그리고, 여태껏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착실하게 준비해 놓은 상황.
나는 ‘예’라고 대답했다.
메시지창이 사라진 뒤.
나는 요새로부터 수십 킬로 넘게 떨어져 있는 이곳에서 나는 내가 가진 능력 중 하나를 사용했다.
“소환.”
빛과 함께 앞으로 뻗은 내 손에 지팡이가 나타났다.
흙냄새가 가득 나는 지팡이, 마물을 끌어당기는, 발레아가 제국 수도 지하에 묻어놓았던 그 지팡이였다.
“정말, 그 지팡이네요. 이렇게 멀리까지 부를 수 있는 거였군요.”
발레아가 눈을 반짝이며 지팡이를 쳐다보았다.
이미, ‘기사의 검’으로 장비 소환은 거리 제한이 거의 없다는 것을 확인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지팡이는 내 손에 들어왔다.
지팡이가 내 손에 들어왔으니, 이제부터는 제국 수도, 차르마니아를 위협하던 마물들이 보이지 않을 터였다.
수도의 제국인들은 안심이 되겠지만, 그게 제국에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내가 괜히 여태까지 제국 수도에 지팡이를 묻어놓은 것이 아니었다.
이 지팡이가 얼마나 멀리까지 마물을 유인할 수 있을지, 얼마나 오래가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곳에 놓아두었던 것이었다.
물론, 제국에게 엿을 먹이겠다는 생각도 작지 않았지만.
아무튼 셀린 교인들이 알려준 정보로 이 지팡이의 효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몇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 있던 마물도 이 지팡이가 뿜어 내는 마나를 느끼고, 찾아오게 된다는 것.
물론, 지금 내가 서 있는 곳과 봉인지까지의 거리는 훨씬 더 멀었지만, 그건 내가 충분히 커버할 수 있었다.
나는 손에 쥔 지팡이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지팡이는 걸신들린 것처럼 내가 흘려 넣은 마나를 빨아들였고, 곧, 마물을 끌어들이는 마나를 사방에 퍼트렸다.
묘한 기류가 사방으로 퍼져나가자, 발레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뭔가 느낌이 이상해요.”
얼마나 강렬한 마나인지, 마나를 보지 못하는 발레아도 이상한 것을 느끼는 것 같았다.
마나가 퍼져나가는 속도는 엄청 빨랐다.
내 눈에는 마나가 순식간에 세상으로 퍼져나가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자, 이제는 기다릴 시간이었다.
나는 지팡이에 마나를 밀어 넣으며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 * *
봉인지 경계에 늘어서 있는 제국의 열 개의 요새.
모두가 중요한 요새들이었지만, 그중에도 중요한 요새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요새는 봉인지 경계 5 요새.
속칭, 빌헬름 요새였다.
대전쟁 때 마물들을 봉인지에 밀어 넣은 대격전이 있던 곳이었고, 신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빌헬름 용사가 제국을 다시 세우기로 결심했던 곳으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요새도 다른 요새보다 두 배 이상 크고 튼튼하게 지어져 있었고, 봉인지 경계를 맡은 요새들의 총지휘관도 이 요새에 상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빌헬름 요새에 있다고 자부하고 있던 기사들도, 이 요새에 있는 경계 총지휘관도 고개를 숙이고 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근래 지원을 온 높은 사람들이 전부 이 요새로 오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수도의 이름 높은 귀족도, 날고 기는 기사단도, 거기다, 말도 붙이기 어렵다는 검호들까지.
평상시에는 보기도 어렵다는 백작 이상의 귀족들이 옆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 요새에 상주하던 이들은 한껏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지금, 요새 성벽 위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기사 타르칸도 마찬가지였다.
젊은 나이에 제국의 중앙 기사단에 발탁이 된 것도, 제국이 자랑하는 빌헬름 요새에 머무르게 되었다는 것도.
지금 옆에 서 있는 이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옆에 서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 이외에는 사람으로도 안 본다는 수도 귀족들은 아니었지만, 그보다도 더 대하기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그 옆에 서서 멀리 봉인지의 밀림을 보고 있는 이들은 그도 진심으로 존경하는 검호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근래에는 보이지 않았던 사람이지만, 상대가 어디로 공격할지를 미리 알고 싸운다는 여검호 알리나.
최강의 대마물 기사라는 검호 메레트.
그리고, 기사라면 누구나 존경할 수밖에 없는 검호라기 보다 검의 주인. 검주라 불리는 투레 백작까지.
알렉스라면 모두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겠지만, 타르칸은 이번에 처음 보게 된 검호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기사 타르칸은커녕, 자작인 요새 지휘관도 함부로 말을 걸기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아니, 같이 다니던 노친네는 어디 두고 혼자 온 거야?”
“그 말을 율리아님 앞에서도 해보지?”
“앞에서는 할 리가 없잖아. 괜한 예언을 듣기라도 하면 인생이 꼬인다고.”
“그럼, 여기서도 하지 마.”
“쩝, 왜 이리 까칠해진 건지.”
물론, 그들은 대검호치고는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말장난들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장난 사이에서 슬쩍 풍겨 나오는 기세들도 평범한 기사인 그가 감당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였다.
말없이 검호들을 지켜보고 있는 투레 백작이 마나를 움직여 보호해주고 있지 않았다면, 민감한 이들은 예전에 토하고 있었을 터였다.
덕분에, 기사 타르칸은 검호들이 올라왔을 때부터 신임 기사처럼 부동자세로 봉인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 그래서일 터였다.
그가 검호들보다 먼저 이상을 발견한 것은.
“숲이 이상한데…….”
그의 눈에 수평선 가까이 보이는 숲이 조금씩 흔들거리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타르칸은 손가락으로 눈을 비비고, 눈에 마나를 가득 밀어넣어보았다.
그래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수평선 끝 쪽, 봉인지의 밀림, 열대 우림이 마치 바람에 출렁이는 곡식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이 요새에 오래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로서는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근래, 봉인지 밀림에서 빠져나오는 마물들이 엄청나게 늘어나기는 했지만, 저렇게 먼 숲이 출렁거리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평범한 일은 아닌 듯했다.
다만,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던 그때에는 이미 주위가 조용해져 있었다.
검호들의 대화도 들리지 않았고, 그들 모두가 봉인지를 바라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웨이브……. 맞죠?”
“웨이브가 맞긴 한 것 같은데……. 젠장, 숲이 흔들릴 정도의 웨이브라니. 이건 나도 처음 보는 광경인데…….”
검호 알리나의 물음에 마물검호 메레트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검주가 타르칸 기사에게 말했다.
“어서 가서 알리게. 마물들의 대규모 웨이브일세.”
“알겠습니다.”
정신을 번쩍 차린 타르칸 기사는 바로 요새 성벽을 뛰어내렸다.
그가 기울어진 성벽을 타고 미끄러지는 모습은 무척이나 훌륭했지만, 검호들은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저 정도 숫자라면, 마물들이 다 이쪽으로 온다는 소리잖아. 조직 놈들은 뭘 한 거야!”
옆에 있던 기사가 사라지자, 메레트가 버럭 소리쳤다.
조직은 예언가가 말한 유물 대신, 새로 개발한 마물을 유인하는 약물을 써서 남쪽 왕국으로 유인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 꼴을 보니, 조직의 계획은 실패한 듯했다.
평상시 같으면 알리나도 그의 투덜거림에 동참했겠지만, 조직의 실패에는 예언가 율리아의 몫이 작지 않았기에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안 좋은 얼굴로 봉인지를 보는 중에도, 전과 다르지 않은 얼굴로 검을 꺼내 드는 사람이 있었다.
조직과 상관없는, 그래서 조직의 실패에 개의치 않는 검호. 투레 백작이었다.
“조직이 성공했던 실패했던, 우리가 할 일은 한가지 뿐일세. 마물들에서 제국을 지키는 것이지.”
“그야 그렇긴 하죠. 하지만, 이건 꽤 빡셀 것 같네요.”
메레트의 말에 다른 두 검호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마물 왕이 없더라도, 밀림이 출렁일 만한 마물의 웨이브는 경계에 세워진 요새들이 감당하기에는 만만치 않았다.
검호나 다른 지원이 없었으면 바로 뚫렸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검호들은 자신이 있었다. 저 많은 마물도 그들의 힘이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하지만, 검호 중의 한 명. 알리나는 조금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그녀는 봉인지가 아닌 뒤쪽을 보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뭐가 문제가 있나?”
“이런 적이 없었는데…….”
투레 백작의 물음에 알리나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그 모습에 메레트가 다시 물었다.
“왜? 네 전투 예지에 뭔가 걸려?”
“뭔가 존재하면 안 되는 게 내 앞을 막는 것처럼 느껴져서…….”
알리나는 입술을 꽉 깨물더니, 투레 백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 되겠습니다. 죄송합니다만, 확인을 해봐야겠습니다.”
“어쩔 수 없군. 예언가의 후손이 그렇게 말하는데 가지 말라고 할 수는 없지. 얼른 다녀오게. 여기는 우리가 맡지.”
투레 백작은 그녀의 청을 들어주었다.
메레트도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얼른 다녀와. 마물 사냥은 내가 전문이잖아. 네가 돌아오기 전에 다 끝내 놓을게.”
마물 사냥을 계속해와서인지 귀족의 예의와는 담을 쌓고 있는 메레트의 말이었지만, 지금은 꽤나 마음에 드는 말이었다.
알리나는 메레트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서쪽으로 몸을 날렸다.
성벽을 단숨에 뛰어내린 뒤, 빠르게 작아지는 알리나의 모습에 메레트가 휘파람을 불었다.
“확실히 실력 하나는 장난 아니라니까.”
알리나가 안 보이게 되자, 두 사람은 다시 봉인지를 바라보았다.
숲의 흔들리던 부분이 점점 넓어지고 가까워지고 있었다.
땡, 땡, 땡,
기사가 소식을 전한 모양이었다.
비상종이 울리고, 요새에서 봉화가 피어올랐다.
봉화는 빠르게 이어져 나갔다.
옆 요새와 먼 요새, 그리고 마지막 요새까지 봉화는 계속 이어졌다.
쉬고 있던 기사들이 뛰어나오고, 첫인사 후 얼굴도 안 비치던 지휘관도 성벽 위로 바로 올라왔다.
그리고, 모두 긴장된 얼굴로 흔들리는 봉인지의 숲을 바라보았다.
다들 긴장된 가운데, 메레트는 편한 얼굴로 창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마물 왕은 안 보이니, 다행이네요.”
마물이라면 어떤 마물이라도 쓰러뜨릴 수 있다는 마물 전문가다운 말이었다.
하지만, 말이 씨가 된 모양이었다.
크아아아아앙!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밀림에서 거대한 울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한곳이 아닌 여러 곳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