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5화
제15편 봉인지 파견대 (3)
도시는 부산스러웠다.
병사들과 기사들. 그리고, 수많은 용병이 거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거리 양쪽에는 각종 가게와 용병 조합, 대장간까지 늘어서 있었다.
물론, 거리와 떨어진 곳에는 주택가도 있겠지만, 이 요새 도시는 어떻게 봐도 용병들의 개척도시처럼 보였다.
다만, 지금 거리에는 우리를 빼고도, 용병보다, 병사와 기사가 더 많아 보였다.
우리가 신기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는 것처럼, 지나가던 사람들도 놀란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깃발과 갑옷의 문양을 가리키며 떠드는 사람도 있었고, 심각한 얼굴로 우리를 노려보는 사람도 있었다.
저들도 우리가 카를로스 왕국에서 온 줄을 안 모양이었다.
우리는 거리를 지나, 미리 지정해준 숙소에 짐을 폈다.
요새 도시라서 그런지, 성벽 안에 수백 명이 지낼 숙소가 준비되어 있었다.
물론, 창고에 가까운 건물이었지만, 비와 아침 이슬을 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런 곳에 발레아를 머물게 할 수는 없었다.
발레아는 따로 여관을 잡아 쉬게 하고, 나는 다시 이 공국을 다스리는 이를 만나러 갔다.
이번에는 참모인 바도르 장군과 부대장인 왕실 기사단장을 데리고 갔다.
공국의 왕이 지내는 곳은 요새 도시답게 튼튼하게 지어진 작은 내성이었다.
멋도 없고 관리도 안 된 성안으로 들어가, 우리는 이 공국을 다스리는 공국 왕을 만날 수 있었다.
이 공국의 왕은 피곤한 얼굴의 늙은 서기관처럼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를 보고, 두 팔을 벌려 환영했다.
“카를로스의 대 기사단이 저희 공국을 방문하다니! 이건 대전쟁 이후로 처음입니다.”
솔직히 대전쟁 이후도 아니었다.
대전쟁 때에는 카를로스 왕국이 만들어지기 전이었다.
봉인지를 탐사하기 위해 가문별로 찾아온 기사단과 공간 이동으로 넘어온 학원 기사들을 빼고는,
공식적으로 카를로스의 왕국 군과 기사단이 이 공국을 찾아온 적이 없었다.
“알렉스 디 샤를 백작입니다.”
“오, 젊은 백작이시군.”
작은 공국의 왕이어서 그런지, 그는 왕의 권위를 강요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현실을 너무도 잘 아는 것 같았다.
공국이라 말하지만, 요새 도시 하나뿐인 허허벌판의 크지 않은 영지를 가진 영주일 뿐이었다.
봉인지 옆에 있기에 어느 나라에도 속할 수 없어 공국이라 부를 뿐.
따지고 보면 작은 영지의 영주일 뿐이었다.
“그런데 뒤에 계신 분들은 아는 분들인 것 같은데……. 설마…….”
나를 반갑게 맞아주던 그는 내 뒤에 서 있는 참모와 부대장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역시 데려오기를 잘한 것 같았다.
이피로스라면, 괜히 데려갔다가 시달리기만 했을 테지만, 여기는 상황이 달랐다.
“하하, 바도르 백작님과 카를로스 왕실 기사단장님이라니. 공국의 영광이군요.”
이제 왕국 내에서나 이름이 알려진 나와 달리 두 사람은 이 공국의 왕도 알 정도로 유명했다.
“이피로스 기사단도 두 배 이상 보강되고, 다른 곳에서도 기사단들을 보내주었는데, 거기다 두 분과 함께 카를로스 왕국 기사단까지 와 주었으니.”
이상하게도 그의 반가운 웃음에는 공허한 피로감이 가득 묻어나왔다.
“하하, 몇백 년 만의 대성황인지……. 이게 공국의 마지막 불꽃일까요?”
두 사람을 보았기 때문일까.
공국 왕의 공허한 피로감은 말이 변해 우리의 귀에 들려왔다.
“이 공국에 사는 이들은 대전쟁 때 봉인지를 감시하라고 떠밀리고 남겨진 이들입니다.”
공국 왕의 말이 이어질수록 접견실의 공기가 점점 가라앉았다.
“모두를 위해 스스로 남았다고 전해오지만, 그거야 힘이 있는 자들이 남긴 이야기였을 뿐…….”
어깨를 으쓱인 공국 왕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뭐, 이건 상관없는 이야기이고, 그보다, 대대로 봉인지를 감시하고, 마물과 싸우다 보면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게 있습니다.”
공국 왕은 동쪽으로 난 창을 쳐다보았다.
여기서는 성벽에 가려 보이지도 않았지만, 공국 왕은 이곳에서도 봉인지의 밀림이 보이는 듯했다.
“우리의 일이 언제 끝날지. 언제 이 요새 도시가 사라지게 될지를. 여러분이 온 것이 그 증거겠죠.”
그는 우리를 보며 퍽퍽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존경하는 분들을 보았기에, 작은 조언을 드린 것입니다. 곧 있을 마물들의 웨이브는 막기 어려울 것입니다. 여러분도 목숨을 소중하게 생각하신다면 제 조언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을 끝으로 공국 왕과의 접견이 끝났다.
뜻밖의 말을 들어서인지, 두 사람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나도 공국왕의 말을 듣고 보니, 도시의 소란이 달라 보였다.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물건을 사고, 짐을 나르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다들 짐을 싸고 있었던 건가.”
요새 도시 전체가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 말에 기사단장이 바도르 백작에게 물었다.
“도시가 비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바도르 백작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괜찮을 걸세. 다른 기사단들은 모르겠지만, 우리는 유물 가방들 덕에 보급도 문제가 없으니.”
백작의 말에 나도 한마디 덧붙였다.
“저 공국 왕을 보니, 보급도 남기지 않고 도망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도시가 비면 여러 가지 작전을 더 펼칠 수 있을 겁니다.”
“빈 성을 이용한다라……. 그렇군요. 쉽지 않겠지만, 쓸모가 없지 않겠군요.”
백작도 내 말에 동의했다.
다만, 내가 생각했던 작전과 그가 생각한 작전은 조금 다를 터였다.
그렇게 결정을 내리니, 기사단장이 다른 것을 걱정했다.
“흠, 근데 이걸 다른 기사단에 알리지 않아도 되려나…….”
기사단장의 말에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알리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소란과 내분만 일어날걸세.”
역시 두 사람이 있으니 편했다.
따로 이유나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 나는 앞으로의 일만 고민하면 되었다.
잠시 뒤 내성 밖으로 나오게 되자, 바도르 백작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런데, 도시 안에 이피로스 기사들이 보이지 않는군.”
그의 말대로였다.
용병도, 다른 기사들은 여럿 보였지만, 우리를 부른 이피로스의 기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 그건, 마물 때문에 얼마 전에 성을 나섰다고 들었습니다.”
언제 또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지…….
우리의 거인 기사단장께서는 내 예상을 매번 깨주었다.
그리고, 바도르 백작이 찾던 이피로스의 기사들은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볼 수 있었다.
백 명이 넘는 이피로스 기사들이 피범벅이 되어 거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대부분 마물의 피였지만, 다친 기사도 죽은 기사들도 여럿 보였다.
기사들은 하나같이 피곤한 모습이었다.
저렇게 수가 많은 기사단도 싸움이 쉽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그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어두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피투성이 기사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은 듯했다.
다만, 기사단의 피해가 심한 게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지금 말을 걸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우리는 그들을 지켜보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봉인지 경계를 지키는 일은 다른 나라를 대치하는 것과는 다른 일이었다.
우선 저 긴 봉인지 경계에 성벽을 쌓을 수도 없었다.
사람만 보면 달려드는 마물들이 성벽을 쌓도록 놔둘 리도 없었고, 봉인지 주변은 성벽을 쌓을 만한 자재도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고 병사와 기사들로 전선을 만들 수도 없었다.
마물과의 싸움에서는 병사들은 미끼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성벽이라는 지형을 이용한다면 병사들도 소수의 마물을 막아낼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정말 예외적인 일일 뿐이었다.
이 넓은 봉인지 경계에서는 마물과 싸우는데 병사들은 말 그대로 아무 소용이 없었다.
기사들과, 싸울 수 있는 귀족들만이 마물을 상대할 수 있었다.
사실, 능력을 사용하는 귀족이 기사들보다 훨씬 마물을 상대하는 데 유리했지만, 수백 년이 지난 지금, 마물과 싸우려는 귀족은 많지 않았다.
이 공국에 기사들이 더 많은 것은 그런 이유였다.
어쨌거나, 소수의 기사와 귀족들이 봉인지에서 튀어나오는 마물들을 상대하려면 다른 방법을 써야 했다.
그것은 정찰대와 봉화를 쓰는 것이었다.
봉인지 경계에 병사와 용병들을 펼쳐놓은 뒤, 그들이 봉인지를 빠져나오는 마물이나 마물 떼를 발견하면 봉화를 피워 올리는 것이다.
당연히 정찰하는 이들의 목숨은 보장받을 수 없었다.
아니, 봉화를 피우고 살아 돌아올 확률은 반이 채 되지 못했다.
말 그대로 사람 목숨을 갈아,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렇게 봉화를 올리면, 요새 도시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사들이 봉화가 올라간 곳으로 달려갔다.
공국 전체에 불을 질러 허허벌판을 만든 것도 그런 이유였고, 이 영지가 화염의 영지로 불린 것도 같은 이유였다.
“붉은색 봉화가 올랐습니다. 저희 차례입니다!”
공국에 도착하고 이틀 뒤, 우리 차례인 봉화가 올라왔다.
물론, 봉화는 그전에도 여러 번 피어올랐었다.
노란색, 파란색 봉화 등등.
특수한 약품을 첨가해서 다양한 색을 만들어낸 봉화는 색으로 마물의 등급을 알려주었다.
빨주노초파남보. 그리고 검은색.
그중에 검은색을 제외하고 가장 위험한 등급이 저 붉은 색 봉화였다.
이틀 전 보았던 이피로스 기사단이 주황색 봉화를 보고 성을 달려갔는데, 이번에는 더 위험한 마물들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봉화를 보니, 공국 왕의 말이 이해되었다.
원래 주황색 봉화도 몇 년에 한 번 나올 정도였던 모양이었다.
수백 년간 마물을 막아선 덕에 대부분의 마물은 북부 산맥을 넘게 되었으니.
힘들지만, 공국의 힘으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주황색 봉화에 이어, 붉은색 봉화까지 나오고 있었다.
붉은색 봉화라면 우리 기사단이 아니라면 요새 도시까지 위험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기사들을 전생의 5분 대기조처럼 숙소에서 대기시킨 덕에 우리 기사들은 바로 출발할 수 있었다.
도시를 빠져나가 우리는 동쪽의 황무지를 내달았다.
봉화는 계속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아무도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었다.
이미 정찰대는 죽거나, 도망친 모양이었다.
“총지휘는 바로드 백작님이, 선봉은 기사단장님이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내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내가 이들의 실력을 확인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사실 그리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물론, 그 이유는 조금 달랐지만.
나는 발레아에게도 이번에는 손을 쓰지 말라고 부탁했다.
도시를 나서고, 몇 시간 뒤, 우리는 봉화와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마물들과 조우할 수 있었다.
봉화 때문인지, 아니면 봉화를 피운 정찰대 때문인지, 마물들은 그리 멀리 가지 못했다.
마물들은 사마귀를 닮은 수십 마리의 기괴한 봉인지의 괴물들이었다.
그래도, 다행스럽게도 강대한 마물은 아니었다.
숫자는 많았지만, 숫자는 이쪽이 훨씬 많았다.
“쓸어버려! 왕국 기사들의 힘을 보여주는 거다!”
강대한 마물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자, 거인이 신이 나서 고함을 질렀다.
싸움은 일방적으로 진행되었다.
기사단장과 기사들은 마물들을 부숴댔고, 귀족 장교들은 훌륭하게 뒤를 받쳤다.
바도르 백작의 지휘도 훌륭했다.
이 정도면 내가 없어도, 충분히 싸울 수 있어 보였다.
그렇게 자잘한 상처만으로 마물들을 쓰러뜨리고, 며칠이 또 지났다.
봉화는 더욱 자주 피어오르고, 우리도 한 번 더 출동하게 되었다.
나는 그 싸움도 참여하지 않았다.
다행히 이번에도 두 사람과 파견대는 훌륭하게 마물을 막아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레스티에게서 연락이 왔다.
[제국군 집결 완료.]
드디어, 시간이 되었다.
마물 왕이 움직일 시간이.
그리고, 내가 나설 시간이.
나는 발레아와 함께 짐을 챙겼다.
북부 산맥을 넘으려면 서둘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