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4화
제14편 봉인지 파견대 (2)
열심히 말을 달렸으나 왕국을 가로질러 이피로스 왕국에 도착하는 데는 일주일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물론, 일반 병사들과 함께 왔다면 두 배 넘게 걸렸을 터였다.
예상대로 참모와 부대장은 부대를 잘 관리했다.
내가 억지로 끌고 온 벤자민 선배는 투덜거리면서도 확실한 지원을 해주었고.
내 유물 배낭과 왕실에서 내준 유물 가방 덕분에 보급 때문에 지체될 일은 없었다.
말을 타고 달리는 수백의 기사단과 귀족들의 모습은 누가 봐도 장엄한 광경일 터였다.
하지만, 일주일 동안 말을 타고 달렸던 당사자들은 이제는 소음과 먼지 때문에 짜증만 날 뿐이었다.
내가 선두에 나선 것도 그런 이유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었다.
선두를 달리며 살펴본 이피로스 왕국의 분위기는 그리 좋지 않았다.
마물들이 설쳐서인지, 아니면 왕이 바뀌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지나치는 사람들의 표정도, 얼굴 안색들도 보기에 좋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을 지나, 우리는 이피로스 왕국 수도에 도착했다.
우리 왕국의 수도보다는 작았지만, 일국의 수도라서 그런지 상당히 큰 도시였다.
하기야, 몇십 년 전 마물 왕에게 왕국이 쑥밭이 되기 전에는 우리 왕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왕국이었으니, 도시가 큰 게 이해가 되었다.
어차피 우리의 목적지는 이곳이 아니었다.
이피로스 왕국의 요청으로 오게 되었으니, 얼굴을 비추는 것일 뿐이었다.
원래는 성 밖에 머물면서 며칠 동안 행사와 파티를 해야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나도 바로드 장군과 기사단장도 그런 취미는 없었고, 실무를 처리할 사람도 데려왔으니, 그에게 맡기면 될 터였다.
나는 부대를 성밖에 머무르게 한 뒤, 실무를 맡을 벤자민 선배와 함께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성문에서 대기하고 있던 서기관 덕에 우리는 아무 제지 없이 왕궁으로 향할 수 있었다.
처음 보는 이피로스의 왕궁은 무척이나 화려했다.
제국의 황궁처럼 웅장하지는 않았지만, ‘기사의 궁’인 투박한 카를로스 왕궁에 비하면 차이가 크게 났다.
왕궁 앞에서 나는 벤자민과 헤어졌다.
그는 이곳에 남아 이피로스와 실무를 처리해야 했다.
원래 이런 일은 협상과 서류작업이 더 힘들고 지치는 일이었으니, 나는 떠나는 벤자민에게 한마디 위로를 보냈다.
“일이 끝나면 바로 쫓아오도록.”
“……알겠습니다.”
내 말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벤자민이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으니, 그는 투덜거리기도 불가능했다.
머리를 흔드는 것으로 작은 반항을 보인 그는 마중 나온 이피로스의 서기관을 따라 왕궁과 붙어 있는 딱딱한 건물로 향했다.
아마도, 저 건물이 이피로스의 행정부인듯했다.
그리고 나는 젊은 집사의 안내를 따라 왕궁 안으로 들어갔다.
왕이 바뀌어서인지 왕궁 곳곳에 기사들과 병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으로 사람들을 살피며 은연중 살기를 내비치는 자들.
아무리 봐도 원래 왕궁에 있었던 자들은 아닌 것 같았다.
그들 때문인지, 왕궁 안은 긴장이 가득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경직되었고, 서로 인사를 하거나, 얼굴을 마주치려는 사람도 없었다.
생각 이상으로 이 나라도 상황이 안 좋은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슬쩍 마음이 안 좋아졌다.
나도 이 상황에 책임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
하지만, 이렇게 되지 않았으면, 마물들이 나라를 쑥밭으로 만들었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위안하며 복도를 걸으니, 어느새 왕의 접견실 앞에 도착해 있었다.
“카를로스의 샤를 백작입니다.”
“들어오게 해라.”
안에서 허락이 떨어진 뒤, 문이 열렸다.
화려한 접견실 안쪽에 이피로스 왕국의 새로운 젊은 왕이 앉아 있었다.
나는 등에 메고 있던 대검을 기사에게 건네주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왕 앞으로 걸어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알레스 디 샤를 백작입니다.”
“오랜만이군.”
고개를 드니, 몇 개월 전에 만났던 얼굴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는 막스 왕자, 아니 이피로스의 새 왕이었다.
알고 있었지만, 기분이 묘해졌다.
“벌써 백작이라니, 내가 왕이 되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내가 눈치를 봐야 했을지도 모르겠군.”
백작이 되었다고 다른 나라의 왕자가 눈치를 볼 일은 없겠지만, 나는 반박하지 않았다.
“역시 그대는 약속을 지키는 이였어. 이것 봐라. 다들 내가 말한 대로 된 것 봤지?”
왕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옆에 서 있는 기사와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왕의 말에 바로 고개를 숙였다.
“저희는 다만, 왕께 도움이 되고자 했을 뿐입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내 위치에서는 그들의 얼굴을 어느 정도 볼 수 있었다.
사과하거나, 미안한 얼굴을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왕 옆에 서 있는 귀족과 기사들은 왕과 함께 정권을 뒤집은 자들이 분명했다.
대충 분위기를 보니, 새 왕은 카를로스의 여왕과 제국의 새 황제와 달리, 정권을 장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바지사장 정도는 아니겠지만, 이래서야 나라를 제대로 끌고 갈 수 있을는지.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건 그들 일이었다.
더구나, 젊은 왕의 처세술도 보통이 아니었으니, 그냥 밀려나지는 않을 터였다.
“시간이 있으면, 환영회도 하고, 여러 가지 이야기도 나누어보련만. 사정이 급하니 어쩔 수 없지.”
새 왕은 정말 아쉬워 보였다.
만날 때마다 생각 이상으로 나를 반기는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질 지경이었다.
거기다, 그가 말하는 뉘앙스는 단순히 나를 반기는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네, 저희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봉인지로 달려가 왕의 기사들과 함께 마물들을 막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미적거리다가는 다른 나라의 일에 끼어들게 될지도 몰랐다.
마물만 상대하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여기다 다른 일까지 신경 쓰기는 무리였다.
“그렇다면, 일을 마친 뒤에 궁에 돌아오면 큰 상을 내리겠네. 그때는 바로 떠날 수 없을 것일세.”
“알겠습니다.”
나는 그에게 약속했다.
뭐, 이런 약속이야 상관없었다.
지킬 리가 없는 약속이었다.
마물 왕 하나만 튀어나와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궁에서 축하연이라니.
그때, 내 말을 믿은 것인지 의아해질 지경이었다.
그렇게 막스 왕자, 아니 새 왕의 접견을 끝내고, 방을 나왔다.
여기까지 안내했던 집사가 기다리고 있다가 나를 다시 안내했다.
그는 나를 안내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내게 속삭였다.
“레스티아도 신관님의 전언이 있으셨습니다.”
레스티? 이 젊은 집사도 셀린의 교인인 모양이었다.
나는 바로 마나를 움직여 주변에 방음벽을 펼쳤다.
“제국 병력이 봉인지 경계에 집결 중이랍니다. 검호로 불리는 이들도 속속 참가 중인 듯합니다. 전부 모이려면 지금 시간으로 이주일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하셨습니다.”
나는 미리 레스티를 제국에 보내 제국군과 기사단의 움직임을 파악하게 했다.
나 때문에 예언이 어그러졌기는 했지만, 봉인지 마물에 대한 예언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터였다.
제국군의 움직임만 파악해 두면 마물과 마물 왕이 움직일 시간을 미리 알 수 있었다.
다행히 레스티는 늦지 않게 정보를 보내왔다.
이피로스 왕실 집사 편으로 연락을 보낸 것은 예상 밖이었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는 말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
늦지 않았지만, 여유롭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피로스에 대한 정보입니다.”
날짜를 계산하는 중에 집사의 말이 들려왔다.
“조금 전에 빨리 빠져나오신 것은 잘하신 것입니다. 지금 왕국 사정이 좋지 않습니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집사는 빠른 목소리로 사정을 이야기했다.
막스 왕자는 제국에 반감이 있는 반 제국 세력과 젊은 장교와 기사들과 힘을 합쳐서 정권을 뒤집었던 모양이었다.
대비가 전혀 안 돼 있었던 왕과 왕세자는 갑작스러운 기습에 뒤통수를 맞아버렸고 막스 왕자가 새 왕이 되어버렸다는 이야기였다.
문제는 왕이 된 뒤였다.
제국이 이피로스 왕국을 이용하고 있다는 말로 새 왕이 되었지만, 새로 정권을 잡은 이들 중에는 그 말을 진짜로 믿는 자들은 많지 않았다.
솔직히 마물 왕이 봉인지에서 쏟아져 나온다는 말을 진심으로 믿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세상이 망할 거라는 말이었으니, 진심으로 믿기는 어려울 터였다.
다만, 새 왕을 조금 더 믿는 쪽이었고, 마물이 더 성화를 부리니 억지로나마 지원을 부탁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지금도 다른 귀족과 기사들은 카를로스의 지원을 받아 왕권을 강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 왕이 한 말이 떠올랐다.
‘지원을 받을지도 모르는 게 아니라, 왕은 아예 작심했던 것 같은데?’
그렇지 않으면 그런 식으로 말할 리가 없었다.
옆에서 빤히 보고 있는데 그렇게 말하다니.
생각보다 상황이 더 안 좋은가.
나는 왕이 잘 버텨내기를 기도했다. 적어도 일이 벌어지는 동안 뒤통수를 안 맞기를…….
나는 집사를 통해 레스티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린 뒤, 왕궁 앞에서 집사, 이름 모를 셀린의 교인과 헤어졌다.
나는 왕궁을 빠져나간 뒤에 기다리고 있던 부대에 달려가 바로 출발을 시켰다.
내가 서두르는 모습에 다들 의아해했지만, 다행히 잘 따라주어, 우리는 바로 출발할 수 있었다.
왕의 허락도 받았고, 소식도 전해져서인지, 우리 부대가 이피로스 왕국을 가로질러도 방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왕국을 가로질러, 동쪽으로 계속 달려, 우리는 봉인지와 맞닿아 있는 봉인지 공국, 벨루하에 도착했다.
공국 벨루하.
공국이라고 하지만, 우리 왕국과 맞닿아 있는 훌리안 공국과 비교할 만한 곳은 아니었다.
이 공국은 봉인지 경계를 위한 요새 도시의 경계 구역을 말하는 것일 뿐이었다.
공국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은 거대한 성벽으로 감싼 요새 도시 하나뿐.
나머지는 봉인지와 이어진 허허벌판일 뿐이었다.
이 허허벌판도 봉인지의 밀림을 모두 불태워 만들어내었을 뿐이었다.
일 년 내내 벌판의 불길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붙여진 또 하나의 이름, 화염의 나라.
북부 산맥 아래에 있는 세 개의 봉인지 공국 중에 제일 많은 마물의 공격을 받는 곳이기도 했고, 몇 차례 봉인지에서 빠져나온 마물 왕이 매번 넘어온 곳이기도 했다.
다른 봉인지 공국들은 남쪽의 험한 자연 지물, 즉 거대한 늪과 바다가 마물들의 공격을 막아주었으니, 마물들이 공격해올 만한 곳은 이 공국밖에 없을 터였다.
물론, 북부 산맥 너머에는 제국이 봉인지와 맞닿아 있기는 했지만, 제국은 북부 산맥 이외에는 한 번도 봉인지의 마물이 넘어오도록 놔둔 적이 없었다.
우리는 공국의 하나밖에 없는 도시, 화염의 도시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