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천재는 무한리셋 중-412화 (412/563)

제412화

제12편 풍요의 계절 (2)

“시에라 영지의 주인이신 시에라 남작이십니다.”

집사장의 소개에 나는 나를 기다리던 중년 귀족을 바라보았다.

그가 주춤거리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역시, 작위가 올라가니 사람을 상대하기가 편해졌다.

이래서 다들 꾸역꾸역 위로 올라가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나도 고개를 살짝 끄덕여주고, 그에게 물었다.

물론 무슨 일인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남작이 처음 찾아온 귀족도 아니었고, 앞으로도 같은 일로 찾아오는 귀족이 계속 있을 터였다.

“……샤, 샤를 백작이, 아니 백작님께 항의하러 왔, 왔습니다.”

항의하면서, 억지로 말을 높이려니, 말이 버벅거렸다.

“귀족이 된 지 얼마 안 돼서 모르셨겠지만, 귀족 사이에는 규칙과 관례라는 게 있습니다. 백작님처럼 규칙을 깨버리면 저는 물론, 귀족들 모두의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다행히 말이 이어지자, 떠듬거리던 말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말은 예상대로였다.

그래도, 영지를 가진 귀족이라서 그런지, 열심히 포장이 된 말이었다.

신입이 나댄다는 소리와 혼자 나대다가는 귀족 모두의 공격을 받게 될 거라는 협박까지.

잘 포장되어 있었지만, 다르지 않은 말이었다.

그리고, 이 말은 포장 없이 다른 사람에게서 들었던 말이기도 했다.

내 영지 안에 장원을 가지고 있던 남작의 아들이 저택에 쳐들어와 적나라하게 한 말이었다.

그는 각성했기에 귀족으로 불리고 있었지만, 쓸모없는 능력에 작위도 가지지 않고 있었던 무늬만 귀족이었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었더라…….

“아, 돌아가는 길에 말에서 떨어져 큰 상처를 입었었지.”

“네?”

“아, 죄송합니다. 남작님께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비슷한 말을 했던 다른 귀족이 생각나서요.”

내게 욕을 퍼붓던 그 젊은 귀족을 발레아가 노려보던 것이 생각났지만, 나는 그 기억을 묻어놓았었다.

“좋지도 않은 일을 떠올렸군요. 그래도 그 귀족은 다리에 장애가 생겼을 뿐 죽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장원을 내놓고 다른 영지로 갔다고 들었는데…….”

계속 사과했지만, 내가 사과할수록 남작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사과할수록 점점 창백해지더니, 이제는 핏기가 사라져 죽은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런 협박을…….”

이런, 오해를 산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다른 식의 사과를 해야 할 듯했다.

“죄송합니다. 다시 사과드리겠습니다. 대신 남작님 영지도 마물들로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라고 들었는데,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갈아입지 못해서 갑옷에 덕지덕지 묻어 있는 피를 쓱쓱 손으로 닦았다.

아쉽게도 너무 굴렀는지, 손에 피가 묻어날 뿐 갑옷의 피는 잘 닦이지 않았다.

설마, 검이 이상해진 것은 아니겠지?

나는 슬쩍 등에 메고 있던 검을 뽑아 보았다.

다행히 괜찮았다.

만족한 얼굴로 다시 검을 넣자, 남작의 대답이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남작은 나를 향해 90도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뇨. 좋은 조언이었습니다. 오히려 사과할 사람은 저인데요.”

“아닙니다. 옳으신 일을 하셨습니다. 감히 저희 영지에 방문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희 영지, 아니 저희 가문은 샤를 백작님을 받들겠습니다.”

“아. 네. 남작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야……. 저희는 기쁘게 맞아들이겠습니다.”

내 대답에 남작은 반색하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는 몸이 안 좋아서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내가 보기에도 그는 무척이나 힘들어 보였다.

진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을 보고 나는 그를 물러서게 했다.

“그럼 쉬십시오.”

그는 도망치듯 접견실을 빠져나갔다.

“조금 과하신 게 아닌지…….”

남작이 나가자, 집사장이 옆에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그를 위해서야. 잘못했으면 그도 크게 다칠 수도 있었어.”

운이 안 좋았을 뿐이지만, 내게 심하게 대한 이들은 사고를 많이 당했었다.

남작의 안전을 위한 내 진심이 전해졌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매번 설명하기도 지쳤고.”

경제 활성화에 따른 세수 확대와 민심의 안정에 대해 찾아오는 사람마다 설명하기는 힘들었다.

완전한 계급사회인 이 세상의 기득권인 귀족들을 이해시키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솔직히, 그들의 불만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내가 잘될수록 주변의 영지는 피해를 볼 수밖에 없고.

일반 시민들이 잘살게 되는 것을 길게 보면 계급에 대한 불만이 늘어날 수밖에 없으니…….

하지만, 시민 의식의 성장은 미래의 귀족들이 고민할 문제고, 나야 조금 더 풍족한 영지가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주변 영지의 피해는 그 영지들이 내 동료가 되면 될 일이었다.

이리저리 장난도 치고, 마나를 흘려 압박도 주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잘 되었으니, 집사장도 이 정도로 그치는 것이었다.

물론, 무리한 방법이었으니, 나중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그 문제는 바로 앞에 닥친 더 큰 문제에 묻힐 테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 문제 때문이라도, 나는 이런 일에 시간을 낭비할 수가 없었다.

“준비는?”

“오헨 기사는 오늘 안에 도착하실 겁니다. 우고 기사와 기사단은 준비를 마쳤습니다.”

드디어 여왕의 명령이 내려졌다.

이피로스 왕국의 요청대로, 봉인지의 경계에 기사단을 파견한다는 명령이었다.

우리 왕국도 마물의 난동으로 고통을 받았기에 여왕의 명령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얼마 전부터 우리 왕국, 아니 이 대륙 전체에 한 가지 소문이 흘러 다니고 있었다.

수백 년 전에 벌어졌던 마왕과의 대전쟁이 다시 벌어질 거라는 소문이.

지금 벌어지는 마물의 난동들은 그 전초전이고, 얼마 뒤에는 봉인지의 마물이 쏟아져 나올 거라는 소문.

물론, 그 소문은 내가 레스티를 통해 퍼트린 소문이었다.

셀린 교단의 정보망은 정보를 수집하는 능력만큼이나 소문을 퍼트리는 능력도 좋았다.

그 덕분에 여왕이 기사단과 귀족 장교들을 모으는 데 어려움이 없었고, 이번 일도 반대가 적었다.

집사장의 준비는 만족스러웠다. 역시 사람을 잘 뽑은 것 같았다.

투덜거리지만, 내가 없을 때도 영지를 잘 다스려주는 오헨도 고마웠고, 교대로 영지와 내 옆을 지키는 우고와 미겔도 고마웠다.

병사들을 관리하는 백부장 후안도 마찬가지였고.

물론, 조용히 나를 응원해주는 어머니가 제일 고마웠다.

다들 알아서 잘하고 있으니, 나도 서둘러야 했다.

어머니를 뵙고, 오헨 영주 대리에게도 영지를 부탁해야 했고, 영지에 남게 된 미겔 기사에게도 여러 가지 지시를 내려두어야 했다.

다행히 발레아는 따로 만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나와 함께 가기 때문이었다.

급하게 일들을 처리하고, 오후에 저택 앞에 나가니, 다른 기사들과 함께 발레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발레아를 데려갈 수밖에 없었다.

발레아가 따라오려고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번 일은 발레아가 꼭 필요했다.

내가 나가자 기다리던 기사들이 검을 뽑았다.

척.

일사불란한 멋진 예도였다.

내가 가진 기사단의 반인 십여 명의 기사에 불과했지만, 미겔과 우고, 그리고 내가 몇 개월간 열심히 굴린 기사들이었다.

백작이 되기 전에도 한두 명씩 뽑았던 기사들이었지만, 백작이 된 뒤에는 지원자가 넘쳐났다.

다들 눈에 차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백작이 되었는데 기사단을 안 갖출 수는 없었다.

최대한 고르고 골라, 가을이 된 지금 삼십 명 정도의 기사단을 만들 수 있었다.

그래도 왕실 기사는 물론, 그레시아 공작가의 기사단보다는 떨어지겠지만, 다른 기사단들보다는 강할 거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몇 개월 동안 열심히 마물 사냥에 데리고 다니며 굴렸는데 약할 리가 없었다.

지금도 깃발 수에 가까웠던 디오구 기사가 선임 기사가 되어 눈을 부라리고 있는 것을 보면 다들 내 말에 동의할 게 분명했다.

기사단의 예도를 받은 뒤, 나는 말에 올라탔다.

배웅을 나온 어머니와 오헨 영주 대리, 미겔 기사의 부러워하는 눈과 백인장 우고와 다른 이들을 차례로 쳐다보고, 일행을 출발시켰다.

저택을 떠나, 도시의 대로를 가로지르니, 거리를 걷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나와 기사단에게 고개를 숙였다.

어렸을 때, 처음 형수와 함께 공작의 도시를 나섰을 때 보았던 광경과 무척이나 비슷했다.

다만, 그때 영지민들이 고개를 숙였던 것은 그레시아 공작 때문이었다.

그때와 달리, 이들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인 것이었다.

나는 슬쩍 감각을 퍼트려보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고개를 숙인 사람 중에 표정이 나쁜 사람은 없었다. 하기 싫은 인사를 억지로 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거리도 활기차고, 새로 짓는 건물들도 많았다.

확실히 영지는 잘 돌아가고 있었다.

물론, 영지를 키우는 데만 신경을 쓰고, 다른 일에는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몇 개월 동안 영지를 키우는 와중에도 교단과 셀린 교단을 통해 정보를 모으고, 여러 가지 일을 해 놓았었다.

마물에 대한 소문을 퍼트린 것도 그중에 한 가지였다.

다른 일들도 도움이 될지는 이번 일이 끝나면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 레스티는 지금 영지에 있지 않았다.

경매장도 바빴지만, 그는 지금 내가 맡긴 일을 처리하느라 다른 나라에 가 있었다.

도시를 빠져나온 일행은 수도를 향해 바람처럼 달렸다.

길을 가다가 만나게 된 영지민들이 우리를 보고 고개를 숙였지만, 아쉽게도 화답해 줄 시간은 없었다.

그렇게 영지를 벗어난 뒤에 우리는 오래 지나지 않아, 수도에 도착했다.

수도 앞, 벌판에는 천막들이 펼쳐져 있었다.

각 가문의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보니, 귀족들이 보내온 기사들이 머무는 천막인듯했다.

천막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자, 서기관 한 명이 달려 나와 내게 고개를 숙였다.

“샤를 백작님의 기사들이 머물 곳도 마련해 두었습니다.”

서기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 처리가 만족스러웠다.

역시, 여왕님이 왕위에 오른 뒤에 관리들이 제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우고 기사와 발레아를 제외한 다른 기사들에게 서기관을 따르게 했다.

그리고, 우리 세 사람은 성문으로 향했다.

“샤를 백작님이 입성하십니다!”

문을 지키는 병사의 고함에 성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옆으로 물러섰다.

우리는 말을 타고 성문을 지났다.

내 생각보다 훨씬 자주 드나들게 된 왕국의 수도는, 전과 달리 얼핏 살기까지 느껴질 정도로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어찌 되었건 전쟁을 위해 기사들이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일은 내 생각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왕실에서 병력을 모으지 못해 영주들의 기사를 차출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왕궁에 도착해, 안내를 받아 메인 홀에 들어서자, 내가 아는 수많은 기사가 나를 반겼다.

그중에는 예상치 못한 사람도 있었다.

“이런 일에 빠질 수는 없지.”

왕실 기사단장.

아직도 거인으로 보이는 그가 거대한 검을 등에 지고 씩 웃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