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1화
제11편 풍요의 계절 (1)
대륙의 초강대국 차르 제국.
제국의 수도인 차르마니아는 근래 무척 소란스러웠다.
시시때때로 튀어나오는 마물 때문이었다.
도시 전체에 이어져 있는 구 제국의 하수관을 통해 출몰하는 땅속 마물들은 봄부터 계속 수도의 치안대와 황궁의 골머리를 앓게 했다.
아버지를 밀어내고 정권을 차지한 새 황제에게는 골머리를 앓는 것 이상이었다.
황위 찬탈로 황권을 얻은 그의 정통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수도에는 튀어나오는 마물과 함께 유언비어가 돌고 있었다.
새 황제가 불러들이는 마물이라느니, 폐위된 전 황제가 저주를 내려서 그렇다는 등.
온갖 소문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동안 새 황제도 머리가 아플 정도로 계속 신경을 썼지만,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앞에 서서 그를 노려보는 자 때문이었다.
그를 노려보는 사람은 그의 동생이자, 얼마 전까지 2 황자였던 남자였다.
“결국, 동생들을 다 잡아들이는 데 성공했군요. 어차피 그냥 기다렸어도 황제가 되었을 텐데, 무엇이 급해서 이렇게 가족을 다 죽이려고 했던 것인지…….”
동생의 비웃음에 황제는 결국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너를 잡으려고 했으면, 아버지를 내칠 때 같이 잡을 수 있었다. 네 동생이야 진짜로 잡으려 했지만, 너는 내가 고의로 놓아준 거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너는 왜 남쪽 귀족들만 너에게 호응을 했는지, 이피로스 왕이 왜 너에게 붙었는지 몰랐겠지.”
“그건, 전부 형님의 과격한 행동에 반대해서…….”
“그래서 내가 너에게 사실을 다 말하지 못한 거야. 이렇게 뜬금없는 놈에게 얻어터지고 묶여온 것을 보니 말했으면 더 엉망이 되었겠지.”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황제는 입맛이 쓸 수밖에 없었다.
황제에 오른 것을 빼고는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는 손을 내저어 기사들이 동생을 끌어내게 했다.
저 동생은 셋째와 아버지처럼 조용히 사라지게 될 것이었다.
영원히.
동생이 끌려 나가자 황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셋째도 어이가 없었는데, 둘째도 저렇게 어이없게 끝나다니. 도대체 뭐가 문제였던 거지?”
이번에도 그렇지만, 막내 황자가 돌아왔을 때는 너무 황당해서, 넋이 나간 막내를 한참 동안 쳐다봤을 정도였다.
그의 옆에는 황태자 때부터 옆을 지켜온 집사장과 충실한 수하들이 있었지만, 다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럴 때면 성질을 긁는 소리라도 한마디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질베스터 백작은 몇 개월 전에 3 황자를 잡으러 갔다가 사라져버렸다.
사라진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같이 보낸 다른 검호도, 그보다 먼저 수도를 떠났던 마녀 하이케도 실종되었다.
검호 셋이 실종된 것이었다.
그래서 교단에 대해 한껏 긴장하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카를로스 왕국으로 보냈던 사절을 통해 3 황자가 돌아오다니.
뭔가 실험을 하다가 실패해 바보로 만드는 바람에 버려버렸다고 생각이 될 지경이었다.
그렇게 황제가 어이없어하자, 집사장이 교단에서 들려온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것보다 교단 내부에 문제가 생긴 모양입니다. 대주교가 바뀌었다는 소문도 있고. 이단과 싸우다 큰 손실을 보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교단을 상대할 준비를 한 것도 쓸데없는 짓이었다는 거군.”
결국, 실패가 하나 더 늘어난 것이었다.
“근래, 조직의 실수가 너무 잦아. 예언가가 칩거했다고 해도, 이건 성공보다 실패가 더 많으니…….”
예언가는 제대로 된 예언을 듣기 위해 그녀 가문의 비밀 장소에 가 있었다.
가문이 가지고 있는 유적의 힘과 가문 식솔의 능력을 모아 막힌 예언을 다시 들을 생각이었다.
황제도 그 생각에 찬성했지만, 그녀가 칩거한 뒤에 조직이 하는 일들이 계속 실패한 것이다.
물론, 계획을 세우고 진행한 사람 중의 한 명이 새 황제였지만, 황제는 그런 사실은 무시했다.
황제는 결점이 없어야 했다.
이런 힘든 시기에 황제의 권위가 실추될 수는 없었다.
지금도 수도에는 유언비어가 돌고 있었다. 더불어 황제의 실패가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소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이 환란을 구할 사람은 황제인 그밖에 없었다.
바보가 되고, 바보짓을 한, 두 형제를 보니, 그것을 여실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계책이 실패했으면 남은 것은 한 가지뿐이겠지. 검을 쓴다.”
“검호들을 봉인지 경계로 보낸다. 경계를 틀어막고, 밖으로 나오는 마물 왕들을 남쪽으로 밀어낸다.”
원래, 검호들은 마왕이 풀려날 때를 대비해야 했지만, 국경이 무너져, 제국이 엉망이 된다면 마왕에 대한 대비는 의미 없는 일이 될 뿐이었다.
“마물 왕이 둘 이상이 되기라도 한다면 검호들을 모아놓아도 힘들 겁니다.”
봉인지 경계에서 마물 왕과 싸우고 있으면, 다른 마물과 마물 왕이 몰려들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죽이는 대신 남쪽으로 내려보내는 것이었고.
다만, 봉인지 남쪽을 맡은 다른 왕국의 기사들이 제국이 내려보낸 마물 왕들을 최대한 빨리 통과시켜줘야 했다.
“그들이 막지 못하게 해야겠지. 마물 왕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들의 뒤를 친다.”
그곳을 지키는 병력은 전부 제국의 위성국과 속국들의 병력이었지만, 황제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 국가들은 제국의 방파제일 뿐이었다.
지금 같은 태풍에 써먹기 위해 남겨놓은 방파제들이니, 알맞게 쓸 뿐이었다.
그냥 말로 물러나게 할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제국의 위성국이라도 마물들을 자신들 나라로 곱게 들여보내라는 말을 들어줄 리가 없었다.
괜히 적대하는 나라가 늘어나면 골치 아플 뿐이었다.
제국군에 전멸하던, 마물 왕과 마물들에게 죽던, 모두 죽어버리면 황제가, 제국이 한 일은 덮일 터였다.
그렇지만, 황제는 한발 더 나아갔다.
“아니, 들켜도 상관없다. 어차피 마물들에게 쓸려나가면 그전의 일들은 의미가 없어질 테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북부 산맥 남쪽을 전장으로 만들어라!”
그의 말에 홀에 있던 심복들은 모두 황제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조직에서 파견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조직이 황제의 것도 아니고, 동업에 가까운 사이였지만, 황제의 뜻과 조직의 뜻이 다르지 않으니, 따르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황제의 명령이 떨어지고, 얼마 뒤.
기사단과 검호들이 봉인지가 있는 동쪽으로 달려갔다.
그런 제국의 움직임은 다른 왕국들에게도 알려졌다.
다른 왕국들은 제국의 행동에 의아해했지만, 카를로스 왕국과 이피로스 왕국은 제국의 움직임에 한껏 긴장했다.
이피로스 왕국은 기사단을 모으면서, 카를로스 왕국에 사절을 보냈다.
병력 지원을 부탁하는 사절이었다.
* * *
세상이 바쁘게 돌아가는 동안, 샤를 백작의 영지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식량이 풍부하게 생산되는 모레나 영지와 유통과 다양한 분야의 생산이 가능한 물아센 영지가 하나로 묶였더니, 생각보다 훨씬 더 효과가 좋았다.
물아센 영주가 모레나 영지를 공격한 것도 주된 이유는 식량 때문이었으니.
식량이 해결된 물아센 영지의 발전은 당연했다.
지금이야 하나로 묶여서 샤를 영지로 불리기 시작했지만, 두 영지가 정말 하나로 묶이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거기다, 하루아침에 백작까지 오른 새로운 영주는 관대하다 못해 호구로 불릴 정도로 영지민에게 베풀고 있었다.
영지전의 패배로 엉망이 된 영지에 자신의 돈을 마구 풀어버리더니, 그는 그 돈을 돌려받을 때도 이자는 받지 않았다.
거기다, 그는 세금 징수원들을 마구 때려잡더니, 2할이라는 말도 안 되게 적은 세금을 내라고 했다.
세금 징수원이 1할을 가져가는 모양이니, 영주가 가져가는 양은 1할에 불과했다.
죽은 전 영주에 비하면 반의반도 안 되는 양이었다.
반 이상을 떼이는 게 보통이었으니, 영지민들에게는 새로운 영주가 신이 내려준 성자로 보일 정도였다.
물론, 그 영주는 천사라서 세금을 줄인 게 아니었다.
단지 그에게는 전생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세금을 내린 이유는 시장 경제 활성화 때문이었다.
그는 함부로 내어놓을 수는 없었지만, 돈은 이미 나라를 살만큼 많았다.
지금도, 하나씩 꺼내 경매장에 내어놓은 유물 때문에 왕국의 다른 영지와 다른 나라에서 귀족들이 찾아올 정도였다.
그런 귀족들이 도시와 영지에 쏟아내는 돈은 일반 영지민이 내는 세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더구나, 다른 영지들은 갈수록 난폭해지는 마물 때문에 귀족과 부유층들이 안심하고 지내기가 갈수록 어려워졌다.
수도에서 지내기가 어려운 이들은 아예 이 도시에 집을 구매해서 머무르는 사람까지 생겨날 지경이었다.
물론, 세금을 줄여준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맨날 밖으로 싸돌아다녔기에, 반란이라도 일어나면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열심히 기사와 병사를 충원했지만,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
결국, 영주는 돈으로 영지민의 환심을 산 것이었다.
“미친 거지. 망하려고 작정한 거야. 근데 자기만 망하면 되지, 왜 우리까지 욕을 먹어야 해.”
마차 밖에 펼쳐진 활기찬 거리를 보며 중년의 귀족이 한껏 투덜거렸다.
그는 물아센 영지 서쪽에 있는 영지, 시에라 영지의 주인인 시에라 남작이었다.
그는 이 영지에 들어오면서부터 계속 투덜거리고 있었다.
벌판에 펼쳐진 황금빛을 뿌리는 곡식들을 보고, 자신의 것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영주라고 욕을 했고.
길을 지나고, 성을 지키는 정광이 번쩍이는 기사와 병사들을 보고, 헛돈을 쓴다고 혀를 찼고.
이제 도시 안에 들어와서는 활기찬 도시를 보고, 결국 속에 있는 말을 꺼낸 것이었다.
그는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바로 옆 영지가 세금이 없다시피 하면서 이렇게 발전하고 있으니, 그의 영지에 피해가 없을 수가 없었다.
딱 봐도, 이 영지와 자신의 영지의 수준 차이가 느껴졌다.
아직 일 년이 채 되지 않았는데 이런 차이라니.
분명, 이 영지에 내전이 있기 전에는 자신의 영지와 다를 바가 없던 영지였다.
그런 영지가 이렇게 발전했으니, 자신의 영지민들이 동요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일거리도 여기가 더 많고, 살기도 더 좋아 보이고, 거기다, 세금 차이가 엄청났다.
이미, 중심지에 있는 자유민들은 이쪽으로 상당수가 넘어갔다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였다.
영지민들에게 이주권이 있다면 다 넘어갔을 수도 있다는 말이 허황하게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마물을 막기도 벅차 죽겠는데, 세금을 줄이라니. 말도 안 되지.”
수도에서 기사들을 싹쓸이해가서 기사 수급도 어려워 죽겠고, 마물은 갈수록 강해져서 피해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지금도 들어오는 세금이 계속 줄어들고 있는데, 여기다 세금을 줄이라니.
누구 죽으라고 하는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왕에게 알랑거려서 영지에다가 백작위까지 받아놓고. 이렇게 분탕을 저지르다니. 이번에는 제대로 주의를 주고 말 테다.”
그의 말에 같이 마차에 타고 있던 서기관과 집사장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을 하게 되면 바른 소리를 하게 될 텐데, 그렇게 되면 주인의 심기만 불편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렇게 마차는 투덜거리는 영주를 태운 채로 저택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집사장에게 그는 크게 소리쳤다.
“이번에도 영주가 없다는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니겠지?”
집사장은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전 영주 때부터 보아왔던 옆 영지의 영주였기에 집사장은 그를 대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아닙니다. 다행히 영주님께서 도시에 들어오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는 건지…….”
이번에도 못 만날 뻔했다는 소리에 남작은 혀를 찼다.
그의 말에 집사장은 사정을 말하고 양해를 부탁했다.
“지금까지 기사들과 함께 북쪽 산맥에서 마물들을 정리하셨습니다. 바로 오신 터라, 예복으로 맞이하지 못하실 수도 있는 것을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흠. 흠. 그럼 어쩔 수 없지.”
집사장의 말에 남작은 말을 돌렸다.
여태 뒷담화를 늘어놓고, 어리다고 욕을 했지만, 그도 백작의 활약상은 계속 들어왔었다.
그 말의 반만 사실이라 해도, 이 어린 영주는 쉽게 상대하기 어려운 검귀일 게 분명했다.
그리고, 잠시 뒤, 그는 젊은 백작을 만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