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7화
제7편 대주교 (1)
교단의 대주교. 신관 로트.
초대 대주교의 뜻에 따라, 교단의 이름도 신의 이름도 없는 것처럼 그도 대주교가 된 뒤로 이름을 버렸다.
교단의 수뇌가 되기 전에는 왜 그래야 하는지 의문을 가졌던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만들어진 신, 존재하지 않은 신을 섬기게 한 초대 대주교의 양심 때문이었다.
물론, 조직도 다른 이름 없이 조직으로 불리는 것을 보면, 아마 초대 대주교와 교단을 만들었던 용사들 사이에 뭔가 약속이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약속이 있었다고 한들, 지금은 서로 싸우는 사이일 뿐이었다.
원래는 조직도, 교단도 미래의 일을 대비하기 위해 만든 곳들이었다.
다만, 그 가운데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달랐을 뿐.
더구나, 교단은 수백 년 전 초대 대주교가 세운 규칙을 지금껏 바꾸지 못했다.
‘초대 주교가 너무 지독하게 준비한 탓이지.’
대대로 대주교와 핵심자들에게 계약으로 내려오는 족쇄와 약속들.
초대 대주교에게서 이어져 내려오는 계약들은 교단이 시대에 맞춰 변화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 덕분에 가짜 신을 들키지 않고 지금껏 교단을 이어오고 있긴 했지만, 덕분에 대주교들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동안 믿어왔던 신앙이 부서지고, 단지 용사가 남겨놓은 의무감만 남게 되는 대주교라는 자리.
그 자리는 역대 대주교들에게는 물론, 현재 대주교인 그에게까지 짐밖에는 되지 않았다.
진실을 알게 된 대주교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좌절하거나, 그냥 수긍하거나, 의무를 감내하던가, 아니면 벗어나려 하던가.
그리고, 현 대주교는 마지막 방법을 선택했다.
오랜 시간 방법을 찾고, 성공할 가능성까지 확인한 지금, 그는 악신의 추종자에게 삶을 구걸해야 했다.
“계약을 벗어나면 네가 원하는 것들을 해줄 수 있다. 교단의 비, 비밀도, 성물의 사용법도 가, 가르쳐 주겠다.”
대주교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계속 말을 늘어놓았다.
머리 위로 튀어 오르는 스파크와 벌게진 얼굴을 보면, 그가 말을 이어가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그런 노력은 내게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다.
단지, 알고 싶었던 내용을 들을 수 있다는 것과 대주교가 알려줄 생각이라는 것이 중요할 뿐이었다.
“계약을 벗어나려면, 어떻게 하면 되지?”
내 물음에 대주교는 밝아진 얼굴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 대답은 무척이나 황당했다.
“네, 네가 신관이 되어 내 계, 계약을 이어받으면 된다.”
신관이 되어 계약을 이어받으라고?
나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 나보고 다음 대 대주교가 되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원, 원래는 규칙이 많은 대주교 전승 방법이긴 하지만, 목, 목숨이 위험한 긴급상황에서는 가능한 허점이 있다.”
나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노인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분명, ‘악신의 후계자’로 알 텐데. 그런 이에게 교단을 이으라고 말하다니.
아무래도 대주교가 미친 것 같았다.
내가 황당해하자, 대주교는 필사적으로 나를 설득했다.
악신의 후계자라 계약을 이어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테고, 내게 도움이 되는 여러 비밀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그는 어이없게도 악신 추종자의 복수심을 자극하기까지 했다.
“대주교라는 지위로 교단에 복수하는 게 더 좋지 않은가. 선대 추종자를 죽인 것도 우리 교단의 초대 대주교이니, 충분한 복수가 될 거다.”
“계약을 넘겨주면 비밀을 말할 수 있다니, 계약이 그렇게 허술할 리가 없을 텐데?”
“그건, 내가 준비를 해놓았다. 평생을 준비했지. 지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다.”
땀을 뻘뻘 흘리는 말이어서 그런지, 무척이나 그럴듯한 말이었다.
물론, 조금 전까지 싸웠던 적을 믿기도 힘들었고, 이리저리 함정을 깔아놓았을 가능성도 컸지만,
그의 말에 혹하는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의 함정을 막아낼 준비가 되어 있기도 했고, 최악의 경우, 실수를 다시 되돌릴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어떻게 될지 궁금하기도 했다.
내가 진짜 악신의 추종자였더라도 복수심에 눈이 뒤집혔으려나.
결국, 나는 결정을 내렸다.
“좋아, 하지.”
“정말인가?”
오히려, 대주교가 놀란 눈치였다. 생각보다 기대가 크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조, 좋네. 잘 생각했네. 거기 서서 내가 내린 계약을 받아들이게.”
내가 생각을 바꿀까 봐 걱정이 드는지, 그는 바로 신관 계약을 진행했다.
“교단의 뜻을 따라, 신의 이름으로 신관이 되기를 원하는가?”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머릿속으로 계약 내용이 스쳐 지나갔다.
대주교의 말과 달리, 신관이 되면 지켜야 할 행동들과 규범들이 꽤 많았다.
신관들과 사제들이 고지식해 보이던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조아나가 교단에서 스파이로 지낼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사제 계약도 신관 계약과 다르지 않다면, 그녀가 충분히 스파이로 지낼 수 있을 터였다.
왜냐하면, 신관 계약을 어겼을 때는 어긴 계약의 내용을 다른 신관에게 ‘자신의 입’으로 말해야 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
말을 하지 못하는, 아니 다른 방법으로 이야기를 전하는 조아나에게는 소용이 없는 방법이었다.
나는 머릿속을 채우는 계약 내용을 확인하고 바로 ‘예’라고 대답했다.
머릿속으로 마나가 밀려들어 왔다.
정신을 개조하려는 마나였다.
하지만, 전에도 이 정도 계약은 다른 도움 없이 이겨냈던 나였다.
화아아악.
마나를 끌어올려, 머리를 감싸 안았다.
밀려오던 마나는 내 마나에 밀려 사라졌고, 잠시 멍해지던 정신은 바로 또렷해졌다.
“역시, 이겨낼 거로 생각했네. 신의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막을 줄은 몰랐긴 했지만…….”
정신을 차리자, 대주교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게 보였다.
교단의 대주교 정도 되면 내가 어떤 방식으로 이겨냈는지 알게 되는 모양이었다.
그럼, 이 뒤에도 알게 되려나?
하지만, 상관없었다.
내가 악신의 추종자가 아니라는 것은 이번 일에 상관이 없는 것이니.
나는 가슴에 한쪽 손을 집어넣은 뒤, 대주교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 계약을 받으면 되는 건가?”
“어, 어, 그렇지. 잠, 잠시만 기다리게.”
담담한 내 말에 대주교는 화들짝 놀라, 열린 관 앞으로 달려갔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한 손을 열린 관 안에 누워있는 미이라 위에 올렸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다른 손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의 손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오더니, 노인의 입에서 근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용사 비오의 후예인 로트가 새로운 이를 계승자로 삼으려 합니다.”
역시, 교단은 내가 환상으로 보았던 용사 비오가 만든 게 맞았다.
“후예 로트가 생명이 경각에 처해 다른 형식을 생략하고 새로운 계승자에게 책임을 내리려 합니다.”
절실하고, 근엄한 목소리 때문이지, 뭔가 장엄한 분위기가 나는 것 같았지만, 알고 보면, 생명을 경각에 처하게 만든 상대를 계승자로 만들려는 상황이었다.
무척이나 아이러니한 일이었지만, 나는 입을 꾹 닫고 그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용사 비오께서는 이 상황을 감읍하시고, 제 책임을 그에게 넘겨주십시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가 펼친 손에서 솟구친 빛이 나를 뒤덮었다.
빛과 함께 목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앞에 있는 노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환상 속에서 들었던, 용사 비오의 목소리, 나이가 든 그의 목소리였다.
[이것은 용사 비오의 계약이다.
그대는 마왕을 불러낸 제국의 죄악을 땅속에 묻고, 다시 이런 실수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유물을 숨기고, 기록을 지워라.
유물과 능력자들을 만들어낼 수 있게 한 성물과 종교를 없애고, 따르는 이들에게 힘을 나누어주어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라…….]
그가 들려준 계약의 서두만으로도 무척이나 충격적이었다.
어느 정도 의심했던 내용이었기는 했지만, 이렇게 직접 듣게 되다니,
계약의 서두만으로도 내가 궁금했던 내용 대부분이 해결되었다.
그 뒤에도 비오 용사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여러 가지 제약 내용이 가득한 계약이었다.
계약대로라면, 이 계약을 한 사람은 비오 용사의 말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되어야 할 판이었다.
오죽했으면, 앞에 서 있는 대주교가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다.
지금도 그는 내가 거절할까 봐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솔직히 계약 내용을 들은 뒤에는 거절해도 상관없을 정도가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더 가보기로 했다.
나는 대답하기 전에 대주교를 다시 쳐다보았다.
대주교는 아직도 미이라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저 미이라가 있어야 대주교를 세울 수 있는 걸까?
그건 아닐 터였다.
저 미이라를 계속 가지고 다닐 수도 없을 테고, 여태껏 성전의 보물 창고에 두어 다른 성물들의 힘을 봉인해왔을 테니.
그럼, 왜 미이라에 손을 올리고 있을까?
뭔가 이유가 있겠지만, 지금은 우선 머릿속을 가득 채운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
“네. 계약에 따르겠습니다.”
대답하는 순간, 대주교가 왜 미이라에 손을 올렸는지 알게 되었다.
“크으으윽.”
내가 승낙을 하는 순간, 대주교의 머릿속에 있던 마나가 대주교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저게 무슨 현상인지 나도 알고 있었다.
계약 내용에 있었다.
계약을 다른 이에게 넘긴 사람은 기존에 걸린 계약에게 죽게 되어 있었다.
비밀을 지키고, 은퇴한 대주교가 교단에 피해를 주지 않게 하기 위한 극단적인 방법.
이것이 모든 일을 마치고, 신의 부름을 받게 된 미담이 가득한 ‘전대 대주교의 승천’에 대한 진실이었다.
하지만, 이번 대주교는 죽지 않았다.
그는 미이라의 힘을 끌어들여 자신을 죽이려는 계약의 힘을 막아내고 있었다.
* * *
격렬한 싸움은 대주교의 승리로 끝났다.
“크아아아악!”
대주교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모든 사슬을 풀어낸 자의 외침이었다.
“하하하, 드디어, 드디어 풀었다.”
대주교, 아니 전 대주교였던 로트는 후련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수많은 난관과 쏟아지는 악재를 뚫고 생의 목표를 드디어 해낸 것이다.
“역시 성물이 정답이었어. 계약도 어차피 용사의 능력. 성물의 힘을 개조해서 능력자의 힘을 막아내면 되는 거였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었지만, 확신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살다 죽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마왕이 다시 세상에 나올 시간이 코앞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용사의 꼭두각시로 마왕과 싸우다 죽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물론, 너 같은 놈에게 교단을 넘겨줄 생각도 없었지.”
노인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추종자를 보며 씩 웃었다.
“용사의 계약이다. 다른 신의 힘으로 벗어날 수 있다면 내가 쓰지 않았을까.”
다른 악신이나 다른 신의 성물로 이겨낼 수 있다면 이렇게 복잡하게 일을 치를 리가 없었다.
그는 젊은, 아니 어려 보이는 남자를 보며 혀를 찼다.
“악신의 힘을 얻었다고 너무 설쳤어. 모든 정신 공격을 막아내는 검을 가지고 있으면 모를까. 악신의 힘으로는 현상 유지밖에 안 될 테지. 두 힘이 네 머릿속에서 영원히 싸울 거다.”
그는 가만히 서 있는 추종자를 죽이기 위해 그가 들고 있는 대검을 뺏으려 했다.
하지만, 그는 검을 뺏지 못했다.
그 대신, 상대가 다른 검을 뽑는 것을 보게 되었다.
가슴에서 빠져나오는 손에 검이 들려있었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검. 검에는 청량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모든 정신 공격을 막아내는 검이란 게 이 검을 말하는 건가?”
악신의 추종자, 아니, ‘기사의 검’의 주인이 그를 보고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