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4화
제4편 종교 전투 (1)
생각보다 왕실 기사들의 연기가 좋았던 모양이었다.
도시를 휩쓴 죽어서 움직이는 마물과 이야기가 속에서나 들어봤던 괴물이 된 용병들에 관한 이야기는 순식간에 영지 전체로 퍼져나갔다.
마물과 괴물 용병들이 날뛴 것처럼 도시의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퍼지는 소문은 피해의 규모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평범한 마물이 도시로 뛰어든 것만 해도 큰일인데, 전설에나 나올 만한 존재들이 움직인 것이다.
더구나, 그 와중에 신전의 피해까지 알려지는 바람에 사람들의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그 소식은 수도원에 바로 전해졌다.
일이 벌어진 아침에 신전에 있던 신관이 말을 타고 수도원으로 달려온 것이다.
신관은 신관 기사들을 보냈던 본단의 신관들이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할까 봐 걱정했지만, 걱정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놀랍게도 대주교께서 직접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그의 말을 전부 믿어주었다.
마물 사체가 움직인 일과 죽은 것처럼 보이는 용병들이 벽을 부수고, 쇠를 자른 일.
거기다, 호위로 보냈던 호위 기사들이 손도 못 쓰고 사라져버린 것까지.
당연히, 대주교는 보고하는 신관 이상으로 상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거기다, 마지막으로 마물과 용병들이 수도원으로 향하지 않고, 서쪽으로 향했다는 신관의 말을 듣고 대주교는 혀를 찼다.
“이쪽으로 올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생각했는데, 틀린 모양이군.”
그의 말에 옆을 지키고 있던 추살대장이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대주교는 바로 결정을 내렸다.
“추격해야지. 세례 중인 3 황자는 괜찮겠지만, 같이 납치해 간 두 여사제는 이 수도원이 함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비밀을 지킬 것으로 믿긴 하지만, 만약을 생각해야지.”
함정이라는 것을 알면, 바로 들이닥치지 않을 것이었다.
더군다나, 마나를 쓰는 죽은 용병들과 사체가 된 마물들을 끌고 다닌다니.
죽은 용병을 데리고 다닌다는 것은 과거 대륙을 휩쓸었던 해골 기사단이 부활할지도 모른다는 소리였고.
죽은 마물을 데리고 다닌다는 소리는 옛날보다 훨씬 위험한 상대가 될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거기다, 교단은 함정을 만들어 놓고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당장, 제국의 새 황제와 틀어져 버렸는데, 악신의 추종자에게만 신경을 쓸 수 없었다.
“기사들을 보내게. 어디로 향했는지 알아야 해. 국경을 넘으면 막아야 하고. 나도 설치된 성물을 해체한 뒤에 따라가겠네.”
당장 수도원에 와 있는 2 황자도 상대를 해야 했지만, 교단으로서는 악신의 추종자가 더 중요했다.
정 안되면, 새 황제에게 고개를 숙이는 방법도 남아 있었다.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 같은 격변의 시기에는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했다.
“알겠습니다. 호위대 일부를 남기고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나도, 2 황자에게 가서 사과해야겠군.”
2 황자는 대주교가 이 수도원에 온 것을 알고, 바로 찾아온 것이었다.
교단이 새 황제와 적대하는 상황이었지만, 특별히 2 황자를 지지하고 있지도 않았다.
과거에도 제국의 황제 계승에는 관여하지 않았던 교단이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2 황자는 대주교를 만나 교단의 지지를 끌어낼 생각이었다.
대륙인 전체가 신도로 볼 수 있는 교단의 지지를 얻고, 새 황제를 이단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기울어진 전세를 역전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그렇게 되어도 역전은 어려워 보였지만, 당사자가 되면 객관적인 시야는 사라지는 법이었다.
얼마 뒤, 수도원을 찾아온 2 황자 일행은 갑자기 수도원 건물 안에서 튀어나온 수십 명의 신관 기사들을 보게 되었다.
신관 기사들은 2 황자 일행은 신경을 쓰지도 않고, 숨겨 놓았던 말을 꺼내 서쪽으로 달려갔다.
더구나, 수도원의 사제들과 신관들이 갑자기 바빠졌다.
그들은 마치 무슨 공사를 하는 양, 자제와 공구를 들고, 건물 안을 드나들었다.
2황자의 기사들이 황당해하는 동안, 2 황자는 대주교를 만나 사과를 받았다.
황자의 요청을 거절한다는 말과 함께 대주교는 다른 일이 있어서 곧 수도원을 떠나야 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2 황자는 대주교를 그렇게 떠나보낼 수 없었다. 2 황자는 자신의 명예는 걷어치우고, 대주교를 붙잡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가 길게 이어지는 동안, 2 황자와 같이 수도원으로 왔던 막스 왕자는 모든 일에 소외되어 버린 바람에, 홀로 산책이나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왕국도 엉망이고, 2 황자 진영도 엉망이고, 교단의 수도원도 엉망이군.”
수도원 밖으로 멀찌감치 걸어 나온 막스 왕자는 번잡한 수도원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저들은 알고 움직이는 걸까?”
그는 고개를 젓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건성으로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은 그를 못 본 척을 했고, 그도 놀고 있는 병사들을 외면했다.
대신, 그는 가슴속의 답답함을 말로 풀어냈다.
“2 황자는 왜 우리나라로 도망을 온 걸까?”
“제국의 새 황제는 왜 가만히 있는 걸까?”
“교단은 왜 새 황제와 싸우는 거지?”
“거기다, 왜 아버지와 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인지…….”
그렇게 속에 있는 말을 풀어내 보았지만, 대나무 숲이 아니라서 그런지, 답답한 속은 사라지지 않았다.
거기다, 그의 말을 엿들은 사람이 있었다.
“그 이유를 알려 줄까요?”
언제 나타났는지, 용병 옷을 입은 한 젊은 남자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알렉스 공?”
그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남자를 잘 알고 있었다.
볼 때마다 기억에 남는 남자이자 기사였고, 제국에서 본 뒤에는 뇌리 깊숙이 박혀서 계속 떠올랐던 남자.
카를로스 왕국의 기사인 알렉스 디 샤를 자작이었다.
“알렉……. 아니 샤를 자작이 어떻게 여기에…….”
막스 왕자의 말에 알렉스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이피로스 왕국 시찰, 아니 적진 시찰입니다.”
“네?”
놀란 막스 왕자에게 나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 * *
다른 일행을 서쪽, 우리가 왔던 방향으로 떠나보낸 뒤, 발레아와 나는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아직 수도원에서는 도시에서 벌어진 일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발레아와 함께 수도원 밖에서 소식이 전해지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검은 마나가 돌아왔다.
충분히 멀어진 뒤에 시체로 돌아갔을 테니, 마물들이 할 일은 다 한 상황이었다.
왕실 기사들에게 배낭을 건네주어, 국경을 넘은 뒤에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으니, 추격자가 있더라도,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으니, 도시에서 신관이 달려왔다.
신관이 수도원 안으로 들어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원이 시끄러워졌다.
도시의 일이 알려진 것이다.
자, 이제는 교단, 아니 대주교가 내 꼬임에 넘어갈지가 문제였다.
나름으로 열심히 준비했지만, 대주교가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함정을 만들고, 하나 남은 추살대를 배치한 것을 봐서는 무시하기는 어려워 보였지만, 결과는 알 수 없었다.
다행히,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대주교가 내 꼬임에 넘어가 준 것이다.
신관 기사 수십, 아니 교단의 추살대가 말을 타고 서쪽으로 떠나갔다.
그리고, 신관과 사제들이 번잡스럽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내 예상대로라면 교단의 성물 때문일 터였다.
그것도 확인할 방법이 있었다.
“정말 수도원 쪽으로 막혀 있던 영역이 점점 헐거워지고 있어요. 잘하면 뚫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지팡이를 들고 내 옆에 앉아 있던 발레아가 좋은 소식을 전해주었다.
역시, 영역이 막힌 것은 성물 때문이었다.
교단의 성물은 유물의 힘을 봉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지팡이를 이용해서 힘을 쓰는 발레아가 수도원 주변에 영역을 펼치기 어려운 게 당연했다.
더군다나, 상당한 영역에 성물의 효과를 뿌린 것으로 보아, 성물 그대로 쓴 것도 아닐 터.
전에 봤던 마법진 같은 것을 썼을 게 분명했다.
나는 발레아에게 더 영역을 펼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내 꾐에 넘어갔으니, 알아서 거둬들일 터였다.
전부 거둔 뒤에 천천히 나서는 게 훨씬 나았다.
이제는 등장할 시점만 정하면 되었다.
물론, 아직 안심하기는 일렀지만, 죽기 전과 달리, 함정은 이쪽에서 판 셈이 되었다.
그렇게 성물을 다 거둬들이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는 사람이 홀로 산책을 하는 게 보였다.
이피로스의 막스 왕자였다.
죽기 전과 달리, 누가 침입한 적도 없으니, 병사들의 경계도 형식적이었고, 산책하는 막스 왕자도 주위를 살필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아니, 그런데 왜 이쪽으로 오는 건데.’
내가 숨어 있는 곳으로 점점 다가오며, 홀로 중얼거리는 막스 왕자.
이대로 가다가는 내가 파놓은 작은 참호. 비트가 걸릴 것 같았다.
나는 귀에 마나를 불어넣어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어보았다.
그렇게 듣고 있다 보니, 결국, 나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몇 걸음만 더 걸으면 숨어 있던 곳이 들킬 판이었다.
처음에는 죽이거나, 잡아 가둘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가 중얼거리는 말을 들어보니,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나는 몸을 날려 막스 왕자 앞을 가로막았다.
* * *
적진 시찰이라는 말에 먹힌 듯했다.
내가 갑자기 나타난 것에 대한 의문은 저 멀리 사라진 듯했다.
“당장은 적진 시찰까지는 아니지만, 곧 그렇게 될 겁니다. 제국에서 저희 왕국에 사절을 보냈습니다. 같이 이피로스 왕국을 치자고.”
“그런…….”
“여왕께서 막고 계시지만, 버티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상황을 살피라고 저를 보내셨습니다.”
시작만 같을 뿐, 완전히 상황이 달라졌지만, 막스 왕자가 알 리가 없었다.
“그래서 제가 2 황자를 살피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나는 떠오르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그동안의 단련 덕분인지, 그럴듯한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그동안 제국과 2 황자, 교단을 살피다가 많은 정보를 얻었습니다. 새 황제의 비밀스러운 힘인 조직에 대해서도 알아냈고요.”
거짓말 가운데 진실을 가득 담으니, 별로 거짓말 같지 않았다.
“원래 바로 본국으로 돌아가 여왕께 이 소식을 알리려 했는데, 2 황자와 같이 있는 막스 왕자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내 말에 막스 왕자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역시 이 왕자는 리액션, 반응이 좋았다.
“그동안 여러 차례 만나서 도움을 받은 적이 있어서 그냥 떠날 수 없었습니다. 적어도 이피로스 왕국에서도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할 테니까요.”
아는 사람, 아는 왕자가 있어야, 새 황제가 세운 계획이 어그러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생길 터였다.
기대는 많지 않지만, 작은 씨앗을 뿌리는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그의 질문에 차근차근 답을 했다.
먼저, 2 황자가 이곳으로 피난을 온 이유, 그리고, 새 황제가 공격을 하지 않은 이유를 이야기해주었다.
“얼마 뒤에 마물과 마물 왕들이 봉인지에서 쏟아져 나올 겁니다. 제국의 새 황제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처음 꺼낸 말에는 왕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봉인지 마물이 쏟아져 나온다는 말에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봉인지의 마물 왕들을 풀어놓을 장소로 새 황제는 이 이피로스 왕국으로 정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말을 이을수록 그의 표정이 바뀌었다.
“2 황자가 이피로스 왕국으로 피난을 온 것도, 새 황제가 공격하지 않은 것도 모두 그 이유입니다.”
의아한 얼굴에서 의심 어린 표정, 그리고 뭔가가 떠올랐다는 얼굴과 함께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버렸다.
다행히 많은 말이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이피로스 왕국에도 동료가 한 명 나올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