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0화
제25편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1)
이곳에 교단의 주교가 왔을 줄이야.
거기다, 주교가 되면 계약을 광역으로 거는 게 가능할 줄 생각도 못 했다.
그 와중에 눈에 보이는 표식까지 뜨다니.
이렇게 되면 살아있지 않은 인간은 전부 들킬 수밖에 없었다.
과연, ‘악신의 종자’라는 교주의 말에 신관 기사들은 반사적으로 표식이 뜨지 않은 기사들을 공격했다.
동료도 있었지만, 신관 기사들은 개의치 않았다.
갑작스러운 일에 2 황자의 기사들은 손을 쓰지 못했고, 표식이 생기지 않은 기사들은 공격을 받아 모두 몸이 잘리고 말았다.
그들의 몸이 분해되자, 검은 마나가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나는 몰려오는 검은 마나를 보고 깜짝 놀랐지만, 다행히 마나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표식은 수도원의 외벽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머리 위에 떠 있었다.
거기다, 주교가 말한 계약 내용도 계속 머릿속을 울리고 있었다.
‘자정까지 2 황자와 교단의 명령을 따르는 계약에 동의하시겠습니까?’
사람의 말처럼 들리지는 않았지만, 무슨 내용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미, 사제와 신관 기사들의 머리 위에 표식은 바뀌어 있었다.
아마, 질문에 승낙하면 변하는 표식일 듯했다.
‘생각보다 무서운 곳이네.’
이렇게 계약이 모두의 눈으로 보이면 거짓으로 계약하기도 불가능할 텐데.
사제로 들어간 조아나가 신기할 지경이었다.
다만, 교주의 계약도 한계가 있는 듯했다.
이 밤에 땀을 흘리는 것을 보니, 마구 쓸 수 없는 능력인 것 같았다.
하루로 잡은 것을 보니 날짜도 길게 하지 못하는 것 같았고, 성전 유적처럼 강제 계약을 걸 수도 없었다.
하지만, 내 계획을 막기에는 충분했다.
표식이 없는 기사들은 모두 사지가 분해되었고, 교단 쪽 사람들은 모두 표식이 바뀌었지만, 2 황자 쪽 기사와 병사들은 아직 원래의 표식이 떠 있었다.
방금 전까지 교단과 치고받았는데 바로 승낙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표식이 바뀌지 않은 사람이 또 있었다.
바로 나였다.
근처에 있던 신관 하나가 내 머리 위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제님은 왜…….”
그러고 보니, 지금 나는 신관 기사 갑옷을 입고 있었다.
교단 쪽 사람들은 모두 동의했는데, 나만 안 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 표식을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이 여럿 보였다.
“아, 죄송합니다. 다른 곳을 신경 쓰느라 그랬습니다.”
나는 신관에게 사과하고, 머릿속에 울리는 소리에 동의했다.
‘네’라고 하자, 머리를 울리는 소리가 사라졌다.
대신, 작은 마나가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마나는 뇌를 헤집고 돌아다니며, 내 생각을 바꾸고 고정하려 했다.
확실히 다른 신관의 계약보다 강했다.
정신에 바로 영향을 주는 계약이었다.
내 힘으로는 벗어나기 어려운 강력한 계약. 하지만, 나는 피할 방법이 있었다.
나는 손을 가슴에 넣어, 유물 주머니 속에 든 검을 쥐었다.
‘기사의 검’을 잡자, 머릿속을 헤집던 마나가 바로 소멸하였다.
다행히 승낙한 순간 바뀐 표식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승낙 자체만 체크하는 표식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표식이 다른 두 단체가 대립하고 있으니, 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던 2 황자가 앞으로 나서는 게 보였다.
“주교님께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혼란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계약 내용은 조금 바꿔주셨으면 합니다. 교단과 제가 서로 다른 명령을 하게 되면 계약 자체가 유지가 안 될 테니까요.”
2 황자의 말이 그럴듯했는지, 주교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서로 공격하지 않는 것으로 바꾸면 될 것 같습니다.”
2 황자의 말에 주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 동안 교단의 일원과 2 황자의 수하는 서로를 공격하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계약을 바꾸겠습니다.”
그가 다시 팔을 펼쳤고, 계약하지 않은 2 황자 쪽 기사와 병사들의 표식이 변하기 시작했다.
주교의 말대로 계약이 변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되니, 병사들 사이에 숨어 있는 왕실 기사들이 문제가 되었다.
이런 상황을 상정한 대응법을 알려 준 적이 없으니,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우우우우웅.
내 발밑의 땅이 진동하는 게 느껴졌다. 진동은 신기하게도 발목뼈를 타고, 위로 올라왔다.
머리까지 올라온 진동은 내 귀로 전달되었다.
‘방해가 심해서 겨우 영역을 만들었어요. 건물 안에는 접근도 못 하고, 대단한 일은 하지 못하겠지만, 필요한 사람에게 말을 전하는 정도는 가능해요.’
발레아였다. 그녀가 땅을 매개로 말을 전한 것이다.
역시 발레아. 꼭 필요할 때 도착한 연락이었다.
나는 마나를 뿌려 내 주위에 방음벽을 펼치고, 작게 속삭였다.
“계획이 틀어졌으니, 오늘은 물러섭니다. 모두 계약을 승낙하고 들키지 않게 빠져나가라고 전해주세요.”
‘알겠어요.’
대답 뒤에 병사 중에 남아 있던 표식이 금방 바뀌었다.
내 말이 바로 전해진 것 같았다.
계약을 한 왕실 기사들이 조금씩 몸을 빼는 것을 보고, 나는 다시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저는 조금 더 살펴보고 숙영지로 돌아갈게요.”
‘괜찮겠어요?’
“걱정하지 마요. 신관 기사로 인정받았으니, 싸우지만 않는다면 문제없을 겁니다.”
이런 기회가 다시 오기는 어려웠다.
주교가 내린 계약을 통과했으니, 의심할 사람은 없을 터였다.
‘정말 조심하셔야 해요. 제 영역이 제대로 펼쳐지지 않는 것을 보니, 건물 안에 뭔가 있어요.’
발레아가 그녀답지 않게 걱정스러운 어조로 다시 말했다.
일이 틀어진 것도 그렇고, 발레아의 영역이 접근하지 못하는 것도 그렇고, 확실히 건물 안에 뭔가 다른 게 있는 게 분명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여기서 물러서야겠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죽기 전에 최대한 정보를 얻어야 했다.
물론, 죽지 않고 일을 끝내면 좋겠지만, 이번에는 쉽지 않아 보였다.
잠시 뒤, 모두의 머리 위에 나타나 있던 표식이 사라졌다.
모두가 계약하면 표식이 사라지는 모양이었다.
“저는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가 안 됩니다. 조금 전 말씀을 들으니 뭔가 아시는 것 같은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요.”
표식이 사라지고, 소란이 가라앉아 2 황자가 주교에게 말했다.
방음벽도 치지 않고, 모두가 들리게 말한 것을 보니, 모두가 알게 말한 듯했다.
“오래전에 사라졌던 자들인데……. 들어갑시다. 제가 말씀드리지요.”
“……알겠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자는 말에 2 황자는 잠시 멈칫했지만,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환하게 밝혀진 등불 아래 보이는 2 황자의 잘생긴 얼굴은 그의 멋진 음성과 함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용사처럼 보일 정도였다.
기사와 병사들이 따르는 것을 봐도, 지금 교주를 상대하는 것을 봐도, 평범한 수준은 훨씬 넘어서는 사람이었다.
아쉽게도 상대가 조직을 등에 업은 황태자, 아니 제국의 새 황제였을 뿐이었다.
아니, 생각해 보면 대단한 사람을 많이 만났었다.
왕족치고는 잘생기고 훌륭했을 뿐, 더 대단한 사람도 많았다.
주교와 2 황자가 안으로 들어간 뒤에 각 진영의 책임자들이 부하들을 정리했다.
이런 상황에서 술자리가 이어질 리는 없었다.
환하게 밝혀졌던 등들이 꺼지고, 경계용 등불이 붉을 밝혔다.
병사들과 기사들이 경계를 서기 위해 흩어지고, 책임자들이 죽은 이들과 없어진 이들을 확인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곧 있으면 병사들이 없어진 것도 들킬 것 같았다.
왕실 기사들은 멀리 떨어진 집합 장소로 잘 피했을 테니, 병사들이 없어진 것을 들키기 전에 건물 안을 수색해야 했다.
나는 위로 올려진 바이저를 반쯤 내렸다.
전부 내릴 때처럼 얼굴을 완전히 감추기는 어렵지만, 반만 내려도 얼굴을 알아보기는 어려웠다.
바이저를 완전히 내려 얼굴을 감추면 의심을 받겠지만, 반만 내리면 실수나 고장으로 여길 수 있을 터였다.
예상대로 움직이는 사제들에 끼어 수도원 건물 안으로 들어가도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제와 신관들은 두렵고 짜증 나는 얼굴로 마당에 자리를 잡은 2 황자의 기사와 병사를 쳐다볼 뿐 반쯤 바이저가 내려간 신관 기사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곳 수도원은 성전으로 가기 전에 들렸던 수도원과 구조가 비슷했다.
디귿으로 세워진 2층 건물과 건물에 붙어 있는 기도 탑.
그리고, 깊숙한 지하실까지.
비슷한 건물을 뒤지고 다녔던 내게는 무척이나 친숙한 건물이었다.
조심스럽게 복도를 걷다 보니, 의심스러운 게 한둘이 아니었다.
교단의 주교가 이곳에 나타나다니.
주교라면 교단의 대표이자 기둥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신을 제외하면 교단의 가장 큰 권세자.
그런 그가 여기 있다는 말은 이곳을 제2의 본단으로 삼았든가, 아니면 그만큼 중요한 것이 있다는 말이었다.
더구나, 2 황자가 이런 때에 기사와 병사들을 데리고 온 것을 보니, 확실히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3 황자는 보지도 못했다.
분명, 이곳에 있다고 했는데, 저 소란 중에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 있기에 얼굴도 안 내비치는 것인지…….
더구나, 내가 아는 두 여사제. 조아나와 누이도 보이지 않았다.
1층을 돌아보고, 2층을 돌아봐도 3 황자는 보이지 않았다.
회의실은 한참 2 황자와 주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결국, 남은 것은 지하실이었다.
사람들 몰래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니, 닫혀 있는 철문 앞을 두 신관 기사가 지키고 있었다.
뭔가 중요한 것을 지키고 있는 듯한 모습.
다만, 내가 볼 때는 어딘가 허술하게 보이는 모습이었다.
‘함정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건물 내에 경계도 생각보다 허술했다.
‘악신의 종자’가 죽은 이를 움직이는 것을 봤는데, 교단이 이렇게 일을 마무리하는 것은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계단 한쪽에 몸을 숨긴 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함정일 가능성이 이렇게나 큰데 물러설 수 없다니…….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섰다가는 죽도 밥도 안되었다.
함정에 빠져서라도 정보를 얻어야 했다.
닥쳐올 고통에 인상을 쓰면서도 나는 두 기사에게 몸을 날렸다.
완전한 기습.
푹. 푹.
두 번의 칼질에 기사들은 영문도 모르고 쓰러졌다.
기사들이 죽자, 검은 마나가 가슴 밖으로 흘러나와 주위를 맴돌았다.
몇 번 주의를 주었더니, 사람을 되살릴 때도 이제는 내 눈치를 보게 되었다.
나는 검은 마나가 두 기사를 움직이는 것을 허락했다.
스르르르.
마나가 죽은 두 기사의 몸에 빨려 들어갔고, 기사들이 몸을 일으켰다.
가슴에 난 구멍으로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기사들은 멀쩡한 사람들처럼 움직였다.
처음 백작과 여자를 움직였을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이런 식으로 계속 변하면 얼마 뒤에는 살아 있을 때와 비슷한 실력의 언데드 기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시금 걱정되었지만, 그 걱정은 이번 일이 끝난 뒤에 해야 할 것 같았다.
쿠쿠쿠궁.
내 지시에 두 기사가 철문을 열었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
어두운 지하실은 내 감각으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크고 깊었다.
나는 두 기사를 대동하고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쿠웅.
기사들이 열었던 철문이 닫혀버렸다.
끼이이익.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두 기사가 허물어졌다.
허공으로 흩어지는 검은 마나.
그와 함께 지하광장이 환하게 불을 밝혔다.
광장 안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살기가 가득한 신관 기사들. 교단이 자랑하는 추살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함정이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악신의 후예.”
주교가 기사들 중앙에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이 함정은 다른 이를 위해 준비했던 함정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