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9화
제24편 제국의 황자들 (2)
2 황자가 수도원에 있는 3 황자를 찾아온 걸까?
아니면, 이 수도원에 새로운 교단의 본부가 되어서 2 황자가 찾아온 것일까?
어느 쪽이든 결국, 2 황자와 3 황자가 같은 곳에 모이게 된 것이었다.
기사들과 병력은 더 늘어나게 되었고, 방비도 더 단단해지겠지만, 상황이 나빠진 것은 아니었다.
2 황자와 교단이 같은 상대와 싸우게 되었다지만, 원래부터 같은 편은 아니었다.
기사들과 신관 기사들 사이도 좋은 편은 아니었고.
조금만 손을 쓰면 둘 사이를 틀어놓을 수 있을 듯했다.
마침 내게 그런 수단도 들어온 상황이었다.
다만, 그 계획은 조금 뒤로 미루게 되었다.
<교단의 임시 본단에 도착했습니다. 새로운 ‘저장 시점’을 설정하시겠습니까?>
눈앞에 뜬금없이 메시지창이 떴기 때문이었다.
교단의 성전에 도착했었을 때 본 이후로 오랜만에 보는 메시지창이었다.
그 섬에서 마물 왕들을 죽이지 못해서인지 그 뒤에 추가 보상이나, 능력 상승 같은 메시지도 뜨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나타나다니.
“생각보다 일이 쉽지 않다는 걸까?”
“네?”
레스티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기야, 처음 계획과 달리, 병력도 기사들도 많이 모여 있었다.
쉽게 끝내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런 의미로 이번 메시지창은 반가운 쪽이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으로 ‘예’라고 대답했다.
이제 만약을 위한 대비도 된 것 같으니, 일을 진행할 차례였다.
다만, 확인은 해봐야 했다.
메시지창이 나타난 것을 보니, 저 수도원 안에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 있을지도 몰랐다.
“영역으로 저 안을 확인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내 말에 발레아가 손으로 땅을 짚고 한참 동안 마나를 퍼트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수도원 쪽으로는 영역을 펼치기가 어려워요. 뭔가 막고 있는 것 같은데요. 더구나, 수도원 아래가 다 암반이라 땅속으로 다가가기도 어렵고…….”
확실히 수도원에 뭔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거기다, 암반 위에 건물을 짓는 바람에 몰래 안으로 들어가기도 어려웠다.
결국, 조금 전 머릿속에 떠올랐던 계획대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최선을 다하고, 실패하면 다시 도전할 뿐이었다.
그날 밤.
2 황자까지 합류하게 된 수도원은 수도원답지 않게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낮에 경계를 섰던 신관 기사들 대신, 2 황자가 데려온 병사들과 기사들이 외곽에 경계를 섰다.
병사들은 특히 이곳까지 걸어오느라 피곤해 보였지만, 2 황자는 병사들까지 신경 쓰지는 않는 듯했다.
수도원 안은 파티라도 벌어지고 있는지 무척이나 시끌벅적했다.
외곽에서 경계를 서는 병사들을 살피며 순찰을 하는 2 황자 기사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수도원을 바라보았다.
“뽑기에서 지지만 않았어도 저 자리에 낄 수 있었을 텐데…….”
옆 기사의 투덜거림에 같이 순찰하던 기사가 핀잔을 주었다.
“신관 기사 나부랭이들하고 한자리에 있겠다고? 난 여기가 차라리 나아.”
“그놈들하고 같이 있는 것은 나도 싫지만, 그래도 다 죽어가는 얼굴의 병사들을 보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기사는 말을 하며 경계를 서는 병사를 쳐다보았다.
창에 기대어서 겨우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안쓰러울 만도 했다.
하지만, 같이 걷고 있던 기사는 그의 말에 혀를 찼다.
“자네는 너무 마음이 여려.”
“자비심이 많다고 해.”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수도원의 소란이 더 커졌다.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처음 말을 꺼낸 기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보이지 않던 3 황자님도 저기에 같이 있다고 하던데.”
그의 말에도 옆에서 걷고 있던 기사는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다른 쪽으로 도망치다가 여기서 합류한 거겠지 뭐. 어차피 교단이 피신시켜주었다고 했으니.”
어차피 이들 기사에게는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차리리, 창에 기대어 졸고 있는 병사에 신경을 쓰는 편이 좋을 듯했다.
“그것보다, 병사 꼴을 보니 내가 다 지치네.”
이번에는 옆의 기사도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몸이 힘든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지치는 느낌이야. 차라리 한바탕 싸웠으면 좋을 것 같아.”
“계속 압박에 밀려나기만 했으니……. 도대체 황태자님은 무슨 생각인 건지.”
“…….”
갑자기 대화가 끊어졌다.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옆에서 들려오던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왜 그래?”
기사는 의아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동료는 한 걸음 뒤에 멈춰 서 있었다.
수도원 쪽의 밝은 빛 덕분에 동료의 경악한 얼굴이 잘 보였다.
그리고, 가슴을 뚫고 튀어나온 검날까지.
기사는 반사적으로 검을 빼 들었다.
그리고, 입을 크게 벌렸다.
“젠장, 습……!”
하지만, 외치기 전에 입에 무언가 가득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흙덩어리였다.
그는 놀라 입을 닫으려 했지만, 다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야 했기 때문이었다.
가슴에 검이 박힌 동료가 검을 빼 들고 자신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흙덩이들이 팔다리를 감싸고 있어서 동료의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시간을 들여 마나를 불어넣는다면 풀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부족했다.
푹.
기사가 흙덩어리에서 몸을 빼내기 전, 그의 가슴에 동료의 검이 깊게 박혀 들었다.
끝까지 박힌 검과 함께 기사의 심장이 멈추었다.
기사의 입과 팔다리를 감쌌던 흙덩어리들이 다시 땅으로 돌아갔다.
동료도 그의 가슴에서 검을 빼내고 뒤로 물러섰다.
숨도 멈추고, 몸을 받치는 것도 없었지만, 그는 허물어지지 않았다.
잠시 멈춰 서 있던 기사는 다시 움직였다.
죽은 게 분명한 기사는 먼저 죽은 동료 옆으로 걸어가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검게 칠한 가죽 갑옷을 입은 젊은 남자.
내가 서 있었다.
이미, 백작과 같이 있던 여성에게 써먹었던 성물의 능력이었다.
다시 써먹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물론, 악신의 해골 기사처럼 살아 있을 때 이상의 실력을 발휘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혼란을 일으키기는 충분했다.
“이번에 새로 얻은 능력인가 봐요?”
옆에서 발레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처럼 검은 옷으로 갈아입은 발레아가 앞으로 걸어가, 멍청히 서 있는 두 기사를 살펴보았다.
“흠. 이런 식이네.”
다른 사람이었으면, 놀라고 꺼림직하게 여길 만한 일이자, 능력이었다.
하지만, 발레아는 달랐다.
그녀는 내 능력이 늘어난 것에 기뻐할 뿐, 무서워하지도 꺼림직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보여 준 것이었다.
그녀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했고,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몇 명까지 가능하다고 했죠?”
“여섯 명.”
여러 번 사용해서인지, 움직일 수 있는 시체가 하나가 더 늘었다.
쉽게, 쉽게 늘어나는 능력에 조금 걱정이 들긴 했지만, 이번에는 걱정을 무시하기로 했다.
“그럼, 순찰조 둘을 더 처리해야겠네요.”
발레아의 말처럼 우리는 순찰조 둘을 더 처리했다.
그렇게 되어, 순찰조 셋은 움직이는 시체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순찰하던 지역을 지키던 병사들은 모두 잠들게 되었다. 영원히.
그 뒤에 기사들을 불러, 병사들의 옷으로 갈아입게 했다.
이왕 일으키는 분란. 제대로 해볼 생각이었다.
죽은 기사들은 미리 치워놓아서, 우리 기사들은 내 능력을 알지 못했다.
기사들이 병사들 대신 그들의 자리에 서서 경계하기 시작했고, 나는 허물어진 외곽 경계를 지나, 유유히 수도원으로 향했다.
환하게 밝혀진 수도원.
그 주위에는 기사와 병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문에도 담벼락 위와 벽 앞에도.
외각 경계처럼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서 몰래 암습을 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정정당당하게 걸어가게 했다.
수도원의 정문으로 죽은 2 황자의 기사 시체들을.
정문은 신관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고, 그들은 문으로 다가오는 2 황자의 기사들을 보고 의아해했다.
“무슨 일이지?”
두 신관 기사가 손을 들어 다가오는 기사들을 막아섰지만, 이미 죽은 기사들이 두 사람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크아아악.”
“캬아악.”
언데드가 된 기사들은 괴성을 지르며 신관 기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이게 무슨!”
“우선 막아!”
놀란 기사들이 검을 빼 들어 달려드는 언데드들을 막으려 했지만, 아쉽게도 언데드들은 미끼일 뿐이었다.
둘이 부딪치기 전, 건물의 그림자에 숨어 있던 내가 뛰쳐나갔다.
“커억.”
“컥.”
언데드 기사들에게만 신경을 써서 그런지, 두 기사는 금방 쓰러뜨릴 수 있었다.
다만, 내가 두 기사를 쓰러뜨리기 전에, 언데드 기사 하나가 신관 기사에게 목이 날아가 버렸다.
나는 목 없이 건들거리며 서 있는 기사를 보고 혀를 찼다.
목이 없이도 움직일 수는 있었지만, 이런 몰골로 분란을 일으키기는 힘들었다.
나는 목이 날아간 언데드에게서 검은 마나를 빼낸 뒤 쓰러진 신관 기사에게 밀어 넣었다.
꿈틀.
다행히 신관 기사에게도 잘 먹혔다.
역시, 교단의 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악신의 능력이라, 다른 신의 저항을 받을 텐데. 죽은 신관 기사는 아무런 저항이 없었다.
내가 신관 기사를 일으키는 동안, 수도원 안쪽에서 사람들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문에서의 소란을 알게 된 모양이었다.
나는 방금 일어난 신관 기사와 2 황자의 기사 다섯을 문 안으로 보냈다.
그리고, 남은 신관 기사의 시체를 들고, 다시 건물의 그림자로 숨어들었다.
나도 신관 기사 갑옷으로 바꿔입기 위해서였다.
* * *
수도원 입구에서 벌어진 소란은 순식간에 수도원 전체로 퍼져나갔다.
병사와 기사들이 가득했지만, 소란을 막을 수 없었다.
수도원 입구에 난입한 사람들이 2 황자의 기사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수도원 사제들을 공격했다.
치료 능력밖에 없는 사제들은 엉성한 검술에도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놀란 신관 기사들이 막아서서 그들을 죽였지만, 그 와중에 신관 기사 하나가 2 황자의 병사를 죽였다.
그 신관 기사는 이미 언데드가 된 입구를 지키고 있던 기사였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몰랐다.
그렇게 서로를 죽이기 시작하자, 혼란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교단이 배신했다!”
“신관들을 죽여라! 황자님을 지켜야 한다!”
거기다, 낯선 병사들의 외침까지.
수도원은 난장판으로 변해버렸다.
그렇게 수습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버리는 순간.
“멈춰라!”
음성 하나가 수도원 전체에 울려 퍼졌다.
아니, 수도원에 있는 모든 사람의 정신에 내리꽂힌 음성이었다.
뒤이어, 수도원 건물 안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흰 수염이 가득한 노인.
근엄하고, 위엄이 넘치는 모습. 그의 머리 뒤로 은은한 후광이 비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노인은 반지를 가득 낀 손을 들며 다시 외쳤다.
“모두 계약을 받아들이도록. 오늘 하루 2 황자와 교단에 충성을 다한다는 계약이다.”
그의 말과 함께 싸우던 이들의 머리 위에 희미한 문양이 떠올랐다.
하지만, 몇몇 이들의 머리 위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노인은 고함을 질렀다.
“계약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은 살아 있지 않은 존재란 소리! 설마, 악신의 종자가 온 건가!”
노인의 고함에 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메시지창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나는 노인이 누구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교단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자, 대륙 신도의 최고봉.
교단의 주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