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8화
제23편 제국의 황자들 (1)
우리 왕국의 동쪽에 있는 이피로스 왕국은 위아래로 길쭉한 모습의 땅을 가지고 있었다.
원형에 가까운 우리 왕국을 동쪽으로 살짝 에워싸고 있는 모습.
이피로스 왕국과의 남동쪽 경계는 동쪽 경계보다 훨씬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기에, 왕국 남부에 넓게 펼쳐진 숲을 동쪽으로 관통하면, 이피로스 왕국과의 경계와 맞닿게 되어 있었다.
숲을 가로지르는 작은 길로 말을 타고 달린 지 일주일 만에 우리는 숲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왕실 기사단의 튼튼한 말과 마나를 활용하는 기사들의 튼튼한 육체 때문이기도 했지만, 발레아의 도움이 제일 컸다.
숲에서 물을 찾는 것도, 길이 망가진 것도, 잠자리를 찾는 것도 발레아가 나서면 바로 해결되었다.
덕분에 일주일이 지난 지금, 왕실 기사들은 나보다 발레아를 더 따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이피로스 왕국과 우리 왕국의 경계라 해도, 뭔가 대단한 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제국과 맞닿아 있는 공국이나 소로카 요새처럼 성채를 두른 것도 아니었고, 북부 산맥 같은 것으로 가로막힌 것도 아니었다.
그냥 우리 왕국의 한 영지와 이피로스 왕국의 영지 하나가 맞닿아 있을 뿐이었다.
경계 같은 것도 없는 평범한 벌판.
내전 때 이피로스 왕국군이 쉽게 넘어온 것도 그런 이유였다.
덕분에 우리도, 다른 이들 몰래 이피로스 왕국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갑옷을 갈아입어야 합니다.”
왕국 경계를 넘자, 나는 말에 싣고 온 배낭에서 용병용 가죽 갑옷을 꺼냈다.
이번 일을 위해 수도에서 급하게 사놓은 가죽 갑옷들이었다.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내 개인재산을 털어서 산 물건이었으니, 나중에 제대로 받아낼 생각이었다.
나는 가죽 갑옷들을 왕실 기사들에게 건네주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기사들에게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과 해야 하는 일, 그리고 왕국의 사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설명이 잘 되었는지, 기사들은 내 말대로 쉽게 갑옷을 갈아입었다.
그렇게, 용병대 모습을 한 일행은 이피로스 남부로 들어서게 되었다.
* * *
알렉스 일행이 이피로스 왕국에 들어선 그 시각.
이피로스 왕궁, 왕세자의 집무실에서는 둘째 막스 왕자가 자신의 형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2 황자 편에 서서 새 황제와 싸우다니요. 이런 미친 짓을 형님도 동의할 줄 생각도 못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정하신 일이다. 재상도 동의했고. 아직 2 황자를 따르는 이들이 많이 있다. 거기다, 교단도 2 황자님을 지원하고 있고.”
“하지만, 그게 제국의 새 황제와 싸우게 되는 일이란 말입니다!”
동생의 말에도 왕세자는 이상하게 여유 있어 보였다.
그는 책상을 두드리며 동생의 말에 대답해주었다.
“걱정할 것 없다. 제국이 공격해 오는 일은 없을 거다.”
그의 말에 막스 왕자가 표정을 굳혔다.
“설마, 새 황제와 뭔가 이야기가 있는 겁니까?”
“그건, 네가 알 것 없다.”
막스 왕자는 왕세자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알 것 없다는 말은 뭔가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그걸 자신에게는 알려 줄 수 없다는 말이었고.
그동안, 최선을 다해 형과 아버지의 눈에 들려고 노력해 왔는데, 다 소용없는 일이었던 모양이었다.
작은 실수만으로도 실권을 빼앗기고, 제국에 다녀와서 겨우 회복이 되었나 싶었지만, 이렇게 선을 그어버리다니.
“도대체, 우리 왕국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겁니까?”
황제의 내전 상대를 받아들여 놓은 뒤, 황제와 뒤에서 조율하고 있다니…….
그럼, 연합을 맺은 2 황자는 뭐고, 새 황제와 싸울 준비를 하는 왕국의 기사와 병사들은 무엇을 준비하는 것인지.
묻고 싶은 것도, 따지고 싶은 것도 많이 남아 있었지만, 막스 왕자는 이 말을 끝으로 더 묻지 않았다.
조금 전 거절로 그도 자신의 가족에게 정나미가 떨어져 버린 것이다.
막스 왕자는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도 듣지 못했다.
대신 그가 들은 것은 새로운 지시였다.
“2 황자님이 교단의 지부를 방문한다고 하시니, 2 황자님을 모시고, 남부에 있는 교단의 지부로 가라. 이런 일은 근래 제국에 다녀온 네가 제격일 테지. 그리고, 어디 가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막스 왕자는 왕세자의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알겠습니다.”
그는 겨우 대답한 뒤에 왕세자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집무실을 나서니, 그의 호위 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전, 카를로스 왕국에서 후퇴한 뒤에 새로 곁에 두게 된 호위 기사였다.
호위 기사치고는 옆에 없을 때가 더 많은 기사였지만, 그에게는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호위 기사와 함께 그는 왕궁의 복도를 걸어갔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제국의 내전에 휘말리게 되었으니,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는 막스 왕자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
“원하시던 대답을 듣지 못하셨나 보군요.”
“대답 자체를 듣지 못했어. 대신 2 황자 안내 일만 맡게 되었지.”
“그렇다면…….”
“거기다 뒤 꿍꿍이까지 있는 것 같아.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참을 수는 없겠어.”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내 이름으로 포섭을 시작해.”
“감사합니다.”
호위 기사가 막스 왕자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럴 만도 한 게, 그는 막스 왕자의 호위 기사 이전에 제국의 속국에 가까워진 이피로스 왕국의 자주 독립을 외치는 결사의 일원이었다.
마물 왕에게 쓸려나간 기사와 영주들의 후손들이 모여 만든 결사로, 이피로스 왕국 안에 상당한 세력을 만들고 있었다.
그런 이들이 막스 왕자에게 손을 뻗친 것이었다.
막스 왕자는 그동안 호위 기사로만 두며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고 있었지만, 이번에 생각이 바뀐 것이었다.
악마가 아니라면, 아니 악마의 손을 잡고라도 이 나라를 바꿔야 했다.
제국에 갔을 때,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제국의 손에 휘둘리게 되면, 어느 때고 버려질 수밖에 없었다.
유적에서의 그처럼.
그렇지 않으려면, 유적에서 봤던 알렉스 기사처럼 힘을 가지고 스스로 결정해야 했다.
마물을 썰어버리고, 황자를 구하던 그 모습.
현실적으로 제국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해도, 그처럼 스스로 설 수 있어야 제국이 쉽게 버릴 수 없었다.
막스 왕자의 머릿속에는 제국 귀족들이 보는 가운데, 전 황제에게 상을 받던 카를로스 왕국 기사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도 알렉스 기사처럼 이 나라를 다시 세우기로 한 것이었다.
그동안의 억울함과 자신의 욕심이 범벅이 된 결정이었지만, 막스 왕자는 오직 이피로스 왕국을 위한 것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었다.
“그런데, 2 황자 안내라니. 이런 때에 2 황자는 어디를 간다는 겁니까?”
“남쪽에 있는 교단 지부라던가, 수도원이라던가. 왕세자도 잘 모르는 모양이야. 기도라도 할 생각인 모양인가 보지. 어차피 교단에서 나온 사람이 안내할 테니, 나는 말동무나 하게 될 테지.”
“사람을 좀 붙일까요?”
“아니, 2 황자가 움직이는데 괜히 의심을 살 필요는 없어. 세력을 갖추는 데만 신경 써. 돌아와서 일을 진행할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호위 기사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막스 왕자는 그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어차피 서로 이용할 생각으로 같이 가는 사이였다.
목표가 비슷해서 같이 움직일 뿐, 목표에 도달했을 때는 서로 검을 겨눌지도 몰랐다.
그래도, 그도 호위 기사도 서로에게 최선을 다할 모양이었다.
다음 날, 이피로스 왕국의 수도에 머물러 있던 제국의 2 황자는 신께 기도를 드린다는 명목으로 남쪽 수도원으로 출발했다.
내전 중이라서 그런지, 그는 단순한 기도치고는 많은 인원을 데리고 갔다.
두 개의 기사단과 수백의 병사들.
남의 나라에서 저런 병사와 기사단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도 기가 찰 일이었지만, 이피로스 왕국은 안내라는 명목으로 그들에게 2 왕자, 막스 왕자를 붙여 주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진짜 안내는 교단에서 나온 여사제들이었고, 막스 왕자는 정말 명목상의 안내였을 뿐이었다.
* * *
2 황자가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로 우리는 용병 차림으로 이피로스 왕국에 들어섰다.
용병 차림을 해놓으니, 왕실 기사단도 별다를 게 없었다.
그냥 다른 이들보다 덩치가 더 큰 용병대일 뿐.
다른 용병대와 붙는다면, 다섯을 세기 전에 전부 몰살시킬 수 있는 실력이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용병대로 보일 터였다.
왕실 기사들이 용병처럼 꾸미고, 옆 왕국으로 넘어가서 제국 3 황자를 잡아 오는 일.
나중에 이게 알려지면 난리 칠 사람이 많을 것 같았다.
나라의 얼굴인 왕실 기사들에게 용병들의 옷을 입혔다는 것부터 해서, 다른 나라에 몰래 들어가서 작전을 한 것까지.
제국이 알면 분노를 감당해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그때가 되면 쓸데없는 걱정이 될 게 분명했다.
마물 왕들이 쏟아져나오고, 마왕이 풀려나게 될 터인데, 왕실 기사들이 옆 나라에 간 정도로 뭐라 할 사람은 없을 터였다.
그렇게 작은 걱정을 날려버리고, 길을 가고 있는데, 길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우리와 달리, 제대로 된 용병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작님.”
그는 ‘신검 추적자’라는 별명을 가진 용병이자, 경매장 주인, 셀린 교단의 신관인 레스티아도였다.
“다행히 길이 어긋나지 않았군.”
우리가 수도로 향할 때, 나는 레스티를 이곳 이피로스 왕국으로 보냈다.
조아나 사제와 연결을 해준 것도 그였기에, 교단의 진행 상황을 확인시키고, 정보망을 이용해서 이피로스의 현지 사정도 듣기 위해서였다.
그는 발레아와 디오구와도 인사를 나눈 뒤 일행에 합류했다.
“3 황자의 위치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
“네. 원래는 한가한 수도원이었습니다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3 황자가 있는 곳은 내가 교단의 성전으로 넘어갈 때 보았던 수도원과 비슷한 일을 하는 수도원이었던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 수도원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망해가는 한가한 수도원일 텐데.
지금은 전혀 달랐다.
일행과 함께 열심히 달려가 본 수도원은 기사와 신관들로 버글거리는 곳이 되어 있었다.
“제국 수도의 교단이 새 황제의 이름으로 폐쇄되는 바람에 본단의 기사들이 이 수도원으로 오게 된 듯합니다.”
멀리서 수도원을 지켜보던 나는 레스티의 설명에 혀를 차고 말았다.
본단의 평범한 기사들이라면 덜하겠지만, 저들이 교단의 악명높은 추살대라면 계획대로 진행하기가 곤란했다.
“계획이 있었습니까?”
“있었지. 냅다 들어가서 다들 두들겨 패고, 3 황자를 잡는 거였지.”
특히나, 황자를 잡다가 아차 실수로 황자를 죽이게 되면 끝날 일이었는데.
아무래도 계획대로 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내 말에 레스티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계획을 세워야겠군요.”
그가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멀리 수도원으로 사람들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흠. 그런데 저건 또 뭐지?”
우리가 숨어 있는 반대편 길로 기사들이 오고 있었다.
상당수의 기사와 더 많은 병사였다.
거기다, 선두에 선 사람들은 전에 본 적이 있던 사람들.
2 황자와 막스 왕자였다.
저들을 보니, 번뜩 머릿속에서 새로운 작전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