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7화
제22편 라포스 백작의 뒷정리 (2)
원래, 죽은 사람에게는 악신의 성물. 큐브의 능력을 쓸 생각은 없었다.
스스로도 꺼림직했고, 다른 이들이 보면 오해하기 딱 좋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젯밤 백작을 죽인 뒤, 내 가슴에서 흘러나온 검은 마나는 죽은 백작과 여자를 또 일으켰다.
이제 내가 지시하지 않는 한, 마물 시체는 건드리지 않아서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시체가 일어나 나도 깜짝 놀랐었다.
다행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움직이는 두 시체는 제대로 된 사고나 말을 하지는 못했다.
머물 때처럼 간단한 지시는 따르지만, 인간처럼 생각하지도, 대화를 나눌 수도 없었다.
처음에는 실망했지만, 나는 곧 한가지 쓸 만한 계획을 떠올렸다.
알리바이도 만들고, 백작이 암살당했다는 사실을 숨길 수 있는 그런 계획.
나는 움직이는 두 언데드들에게 아침에 사람들이 들어오면 연기를 하라고 시켰다.
서로 죽이는 간단한 연기였다.
물론, 이미 시체들이었으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연기가 아니었다.
다행히 내 생각대로 계획은 제대로 진행된 듯했다.
일행이 수도의 외성을 빠져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만 보이는 검은 마나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 뒤에도 별다른 급보도 날아오지 않고, 옆에서 나를 호위하고 있는 쿠스타 선임 기사와 그 일행도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수도의 남문으로 나온 우리는 계속 남쪽으로 내려갔다.
벌판에 널린 곡식은 푸르름을 더해가고 있었고, 여름의 햇살은 마나를 가진 기사들도 땀에 젖게 했다.
“목적지가 왕국 남쪽에 있나 보군요.”
쿠스타 기사가 우리가 가는 방향을 보고 내게 물었다.
어느 쪽 방향으로 가는지는 사람들에게 미리 말해 두었었다.
쿠스타 기사도 알고 있었을 텐데.
이렇게 다시 확인하다니…….
방향을 바꿀까 봐 그러는 걸까?
나는 그를 안심시켜주기 위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내가 확인을 시켜주자, 그는 다시 묻지 않았다.
방향만 묻고 끝나다니, 역시 그는 목적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속이 보이는 대화를 나누며 한참 달리다 보니, 수도 남쪽에 있는 숲에 들어서게 되었다.
평야에 펼쳐진 숲이라 험난한 숲은 아니었지만, 넓고 깊어서 이야깃거리가 많이 나오는 숲이었다.
정령 이야기에, 미로를 만드는 나무에, 사라진 사람들 이야기까지.
물론 대부분 이야기는 흥밋거리 소문일 뿐이었고, 숲을 가로지르는 길은 산맥에 걸쳐있는 숲들보다는 훨씬 안전했다.
이 숲은 마물이 나오지 않는 숲이었기 때문이었다.
숲에 들어서자, 길이 좁아졌다.
일행의 속도는 늦어졌고, 행렬도 길게 늘어서게 되었다.
나는 발레아와 선두에서 쿠스타 기사 일행의 호위를 받으며 좁은 길을 나아갔다.
숲이 점점 울창해지자, 여행 느낌이었던 일행도 조금씩 긴장이 올라갔다.
나와 발레아를 호위하던 쿠스타 일행도 내 주위로 더 다가왔다.
그들을 보고 발레아가 미소를 지었다.
이미 발레아에게는 그들을 조심하라고 말해 두었었다.
그렇게 긴장을 한 채로 걸어가자니, 어느 순간 숲에서 들려오던 벌레 소리와 새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대신, 길 양쪽 숲에서 꾹꾹 눌러놓은 살기와 마나가 느껴졌다.
기사와는 다른 농밀한 마나.
‘암살자들인가.’
어디서 이렇게 마나를 가진 자들을 잘 구하는지.
기사 몇 명과 영지를 이끄는 나로서는 부러울 따름이었다.
영역을 펼쳐두었는지 발레아도 상황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녀는 내가 선물했던 지팡이를 꺼냈다.
발레아가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손을 들어 잠시 기다리게 했다.
잡아야 할 자들이 더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죽어라!”
뻔한 말과 함께 길 옆 숲에서 화살들이 쏘아졌다.
상당히 많은 화살이었다. 이어서 용병들이 고함을 지르며 숲에서 튀어나왔다.
“모두 공격해!”
“죽어라!”
용병들은 고함을 지르며 일행에게 달려들었다.
기사들은 황당한 얼굴로 달려오는 용병들을 바라보았다.
분명, 지금 달려오는 용병들은 마나를 가지지 못한 평범한 용병들이었다.
감히 왕실 기사들에게 달려들다니.
왕실 기사단이 아니더라도, 마나를 가진 기사들에게 용병이 달려들다니.
미치지 않았다면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황당한 일이었지만, 기사들은 할 일을 미루지 않았다.
그들은 말을 움직이며 달려오는 용병들에게 검을 휘두른 것이다.
스각!
검이 움직이자, 머리가 날아가고, 팔다리가 날아갔다.
날아가는 용병의 머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숲에서 나온 용병에게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속았다! 진짜로 공격하잖아!”
말을 꺼낸 용병은 가슴에 검이 박혀 쓰러졌고.
“모두 도망쳐! 계약과 달라!”
다른 용병이 기겁하며 고함을 질렀지만, 도망칠 수 있는 용병은 몇 없었다.
거기다, 기사 몇이 숲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도망친 용병과 숲에 숨어서 화살을 날리는 용병들을 쓸어버렸다.
그렇게 기사들이 용병들을 처리하는 사이, 나는 반대쪽 숲에서 튀어나온 암살자들을 상대해야 했다.
용병들은 기사들을 묶어놓기 위한 미끼였던 모양이었다.
넷, 아니 다섯 명의 암살자들이 진정한 습격자들이었고.
용병들이 기사들에게 학살당하는 그 순간, 암살자들이 튀어나왔다.
수풀 속에서, 땅속에서, 나무 위에서, 암살자들은 같은 순간에 튀어나와 나를 공격했다.
수풀과 흙으로 위장을 한 암살자들의 공격은 무척이나 날카로웠다.
살기도 억눌러, 마나가 아니었으면 나로서도 정확한 위치를 알기 어려웠을 제대로 된 암살자들이었다.
기사들이 사면을 지키고 있었지만, 암살자들은 그 틈으로 몸을 비집고 들어왔다.
세검을 앞세우고 달려드는 암살자들을 기사들은 막지 못했다.
아니, 몸으로 막기는커녕, 몇몇 기사들은 검을 치우기까지 했다.
더불어, 스쳐 지나가며 서로 눈을 맞추기까지.
뒤에서 보니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암살자들은 그렇게 호위하는 기사들을 지나, 내게 다가왔다.
그들은 세검을 내밀었다. 녹색으로 번들거리는 검.
검이 다가오자, 감각이 활짝 열렸다.
용병들을 정리하는 기사들이 보였고, 옆에서 지팡이를 쥔 채로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발레아도 보였다.
비웃는 표정으로 이쪽을 돌아보는 쿠스타 기사와 다른 기사들도 보였다.
저들의 배신을 미리 알지 못했으면 조금은 위험했을까?
솔직히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일이 귀찮아졌을 테지.
나는 다가오는 세검들을 보며 들고 있는 대검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캉! 캉! 캉!
한순간에 대검에 튕겨 나는 검들.
“어억.”
그리고, 암살자들이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검이 막혀서 흘린 신음이 아니었다.
그 정도에 신음을 흘릴만한 암살자들도 아니었고.
암살자들이 신음을 흘린 것은 그들이 검을 놓쳤기 때문이었다.
부딪친 상대방의 검을 밀어내는 내 마나 덕에, 암살자들은 모두 검을 놓친 것이었다.
“크윽.”
“윽.”
“컥!”
신음은 다른 사람들의 입에서도 나왔다.
암살자들을 지나가게 놔둔 기사들이 신음을 흘리며 각각 몸의 한 부분을 움켜잡고 있었다.
내 검에 튕겨 나간 암살자들의 검에 모두 상처를 입은 것이었다.
팔에 세검이 꼽힌 기사도 있었고, 허리에 스친 기사도 있었고, 다리에 박힌 기사도 있었다.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왕실 기사단에 들어올 만한 기사들이 다른 이의 싸움에서 튕겨 나온 검에 상처를 입은 것이다.
자신은 물론, 누구도 믿지 못할 일이었다.
물론, 튕겨 나가는 검에 내가 마나를 실어 가속해서 그렇게 된 것이었지만, 그들이 알 리가 없었다.
거기다, 단순한 부상일 뿐이었지만, 부상을 입힌 것은 암살자들의 독검이었다.
쿵. 쿵. 쿵.
부상을 당했던 세 기사가 그대로 허물어졌다.
일이 틀어졌지만, 암살자들은 침착하게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역시, 숙련된 암살자들이었다.
오히려 흥분해서 이성을 잃은 것은 살아남은 두 기사였다.
쿠스타 기사와 살아남은 또 한 명의 기사가 내 쪽으로 몸을 날렸다.
동시에 암살자들도 단검을 내밀며 내게 달려들었다.
나도 검을 다시 움직였다.
제일 가까이 다가온 단검을 튕겨내 다가오는 기사 쪽으로 보내고, 그다음 암살자의 팔을 잡아, 내 앞에 세웠다.
잡은 팔은 반대로 내밀게 하고.
덕분에 처음 단검을 찔렀던 암살자는 기사와 싸우는 꼴이 되었고.
푹. 푹.
내가 몸을 끌어당긴 기사는 나 대신 쿠스타 기사의 검에 맞았다.
대신 암살자가 들고 있던 단검은 내 손에 들려, 쿠스타 기사의 가슴에 박아넣었다.
나 대신 검을 맞은 암살자는 바로 죽었지만, 심장에 단검을 맞은 쿠스타 기사는 궁금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의문이 가득한 얼굴. 그는 어떻게 알았는지, 왜 이렇게 하는지 궁금했을 터였다.
나는 짧게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나는 마나를 움직여 방음벽을 펼친 뒤, 작게 속삭여 주었다.
“백작도 내 손에 죽었고, 그동안의 일을 전부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왕실 기사단의 내분이 알려지면 곤란하니, 여러분은 저를 지키다 희생한 것입니다.”
내 말을 들은 쿠스타 기사는 허망한 얼굴로 쓰러졌다.
기사가 쓰러지자, 나도 손에 쥐고 있던 암살자를 놓았다.
쿠스타의 검에 이미 목숨이 끊어진 암살자는 그 자리에 허물어졌다.
주위를 둘러보자, 내 옆에는 발레아외에 서 있는 사람이 없었다.
실수로 검을 맞댔던 기사와 암살자는 사이좋게 죽어 있었다.
둘은 평생의 대적과 싸우다 죽은 표정들이었다.
아마도 환상에 빠졌을 터.
이건, 발레아의 솜씨였다.
거기다, 남은 암살자는 땅속에 빨려들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가 있던 자리는 옅은 핏자국만 남아있었다.
발레아는 조용히 내 옆에 다가와 물었다.
“잡아 놓은 둘은 어떻게 할까요?”
내가 느꼈던 암살자는 다섯. 공격한 암살자는 셋뿐이었다.
나머지 두 사람분의 마나는 숲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마나들은 지금도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잡아둘 시간이 없어.”
“알겠어요.”
그녀의 대답과 함께 숲에서 느껴지던 마나가 뚝 끊어졌다.
비명도, 소음도 없었다.
내가 성장한 만큼 발레아도 달라져 있었다.
발레아와 대화를 하는 도중에 기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으십니까?”
나와 다른 기사들을 믿고 용병들을 처리하던 기사들이 달려온 것이었다.
나는 쿠스타 기사의 눈을 감겨주며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암살자들이 독을 썼습니다. 제가 움직이기 전에, 쿠스타 기사와 다른 기사분들이 몸을 던져서 막아주셨습니다.”
“이런…….”
“새로 들어 온 기사들은 자작님의 실력을 몰랐을 테니…….”
기사들은 파랗게 질린 채로 죽어 있는 기사들을 보고 혀를 찼다.
그들은 내가 암살자 정도는 충분히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내 말에 쿠스타 기사와 그의 동료들은 쓸데없이 희생한 꼴이 되어버렸다.
나는 기사들에게 말했다.
“암살자들이 있다는 말은 우리 일을 막으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래도 서둘러야겠습니다.”
내 정론에 기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시체를 대충 묻은 뒤 바로 출발했다.
나는 일행의 방향을 바꾸었다. 동쪽으로.
“3 황자는 이피로스 왕국 남쪽에 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남쪽으로 향한 것이었다.
3 황자가 이피로스에 있다는 사실은 제국의 사절에게 숨겨야 했다.
이미 제국군이 이피로스를 공격하는 상황.
사절이 알았다면 협상 자체가 될 수가 없었다.
나는 기사단을 이끌고 동쪽으로 내달렸다.
이피로스 왕국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