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6화
제21편 라포스 백작의 뒷정리 (1)
나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준비를 마치고 왕궁 내성 앞 광장으로 나갔다.
내성 문 앞에는 벌써 왕실 기사들이 나와 있었다.
처음 보는 수십 명의 왕실 기사.
내전이 끝나고, 새로 왕실 기사들을 대거 충원했다더니, 얼굴을 아는 기사들이 몇 없었다.
얼핏 보았던 기억이 나는 기사들도 그리 친하지 않은 기사들이었고.
디오구는 미리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실 기사단과 같이 있었지만, 그동안 제대로 담력을 키웠는지, 디오구는 꿀리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내성 앞에 도착한 뒤에 발레아도 바로 따라 나왔다.
외출복 위에 가죽 갑옷을 덧댄 실용적인 옷이었지만, 그녀의 미모를 가리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왕실 기사에 입단한 만큼, 실력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내가 도착하자, 기사들 가운데 한 명이 나서서 내게 인사를 했다.
“왕실 선임 기사 쿠스타입니다. 샤를 자작님께 인사드립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30대 중반의 호남형의 기사였다. 인상도 실력도 좋아 보여, 모르고 봤으면, 꽤 호감이 생겼을 듯했다.
“선임 기사분들은 전부 알고 있는데, 새로 오신 분이신가 보군요.”
“전에는 라포스 백작님의 휘하에 있었습니다. 왕가의 요청으로 왕실 기사단에 소속되게 되었습니다.”
라포스 백작 밑에 있었다라…….
원래는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는데, 듣고 나니 의외로 쓸 만한 정보였다.
“선임 기사도 그렇지만, 다른 기사분들도 아는 분들이 거의 없군요.”
내 말에 발레아가 기사들을 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기사들은 발레아의 미소에 헛기침 하며 고개를 돌렸다.
“대부분 왕실 기사단에 새로 입단한 기사들입니다. 그들도 왕실 기사단으로 실전을 익히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이유로 이렇게 편성이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선임 기사가 내 말에 대답하는 순간.
“헉.”
“헙.”
뒤에서 기사들이 기겁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선임 기사의 머리 위로 아는 얼굴이 보였다.
“나는 그런 소리를 못 들었는데?”
거인처럼 중년의 기사.
기사단장이었다.
선임 기사가 급하게 고개를 돌려, 위로 올려다보았다.
선임 기사도 놀란 것 같았다. 그는 급하게 인사를 했다.
“기사단장님께서 여길 어떻게…….”
선임 기사의 말에 기사단장은 굵은 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기사단원들이 작전을 나가는데 내가 안 오는 게 더 이상하잖아. 내가 못 올 곳을 온 건가?”
기사단장의 말에 선임 기사가 떠듬거리며 대답을 했다.
“그게 아니라……. 다른 일로 바쁘시다고 들었습니다.”
기사단장은 손을 내린 뒤, 팔짱을 끼며 혀를 찼다.
“그러니까, 이상하게 며칠 전부터 일들이 밀려오더라고. 대단한 일도 아닌데, 부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어. 덕분에 여기도 오지 못할 뻔했다니까…….”
이번에는 선임 기사가 대답을 못 했다.
기사단장은 나지막히 혀를 차더니, 선임 기사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 인원은 누가 편성을 한 거지? 분명 나는 안 했는데?”
기사단장의 말에 선임 기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저, 저는 위에서 지시를 듣고…….”
“누가 지시했지?”
“그게……. 명령서가 왔습니다……. 그걸 보고…….”
선임 기사의 눈이 빠르게 좌우로 움직였다.
기사단장의 말에 선임 기사의 대답이 조금씩 달라졌다.
인상을 쓴 기사단장은 선임 기사에게 두꺼운 손을 내밀었다.
“명령서를 줘 봐.”
선임 기사는 움찔거리며 명령서를 꺼냈다.
기사단장은 뺐듯이 명령서를 받아 쭉 훑어 보였다.
“왕실 기사단의 정식 명령서가 맞군. 인장도 맞고, 잘못된 내용도 없어.”
그는 명령서를 둘둘 말더니, 손에 움켜쥐었다.
“단 하나 잘못된 게 있다면, 내가 적지 않은 내 사인이 적혀있다는 거겠지.”
“죄송합니다. 직접 확인했어야 했는데…….”
기사단장의 말에 선임 기사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럼, 바로 기사들을 물리겠습니다.”
선임 기사의 말에 기사단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것 없어. 내가 다른 기사들을 불렀으니까.”
“네?”
그때, 광장 한쪽에서 한 떼의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왕실 기사들. 이번에는 내가 잘 아는 기사들이었다.
나를 알아본 기사들이 말 위에서 고개를 숙였다.
“기사단 때문에 샤를 자작의 일을 망칠 수는 없으니까. 기사단에 누군가 수작을 부리는 모양인데, 그건 내가 천천히 해결하면 돼.”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기사단장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선임 기사는 기사단장의 말에 안절부절못했다.
선임 기사의 표정에는 뭔가를 해야 하는 간절함이 보였다.
그가 기사단장의 박력에 나서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내가 대신 나섰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왕실 기사단에 새로 합류한 기사분들도 몇 분 같이 가시죠. 기존 왕실 기사분들만 가는 것보다는 보기도 좋고, 왕실 기사단의 앞날에도 좋을 것 같습니다.”
내 말에 기사단장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한밤중에 단장실에 쳐들어가서, 그 몰래 인원이 정해졌다는 것을 알린 것은 나였다.
기사단원들을 바꾸기로 한 것도 기사단장과 내가 협의한 것이었다.
그 이야기에 이렇게 내가 나서는 것은 없었다.
나도 저 선임 기사가 라포스 백작의 휘하에 있었다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나설 생각은 없었다.
기사단장은 작게 혀를 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요. 쿠스타는 너를 포함해서 남길 기사 다섯을 고르도록.”
“알겠습니다.”
쿠스타 기사는 안도한 얼굴로 기사단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샤를 자작님께도 감사드립니다.”
그는 내게도 감사를 표했다.
감사를 받을 일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의 감사를 받아주었다.
그렇게 출발 인원이 결정되었다.
발레아와 나, 디오구와 왕실 기사단.
대부분은 아는 기사들이었고, 쿠스타 기사가 고를 다섯 명의 기사만 오늘 처음 보는 기사들이었다.
쿠스타 기사가 기사단 숙소로 돌아가게 된 다른 기사에게 손짓하더니, 내게 다가왔다.
쿠스타 기사는 내 앞에 와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하다는 뜻으로 처음에는 저희가 호위를 서겠습니다.”
나도 그의 말을 반겼다.
“그래 주면 저도 고맙겠습니다.”
그 일을 끝으로, 3 황자 체포대가 출발하게 되었다.
* * *
샤를 자작 일행이 떠난 뒤, 숙소로 복귀하라는 지시를 받은 왕실 기사들은 기사단장과 함께 숙소로 향했다.
다만, 기사 한 명은 화장실에 들른다는 핑계로 일행에게서 빠져나왔다.
그는 조금 전 쿠스타 선임 기사에게 수신호를 들었던 기사였다.
그는 왕실 기사단에 들어오기 전, 쿠스타 선임 기사와 같은 기사단에 있었다.
그도 ‘라포스 백작’ 기사단 소속이었다.
“백작님께 가서, 지금 상황을 말씀드려. 진행이 달라지면, 돌아와 알려 주고.”
그는 선임 기사의 지시에, 열심히 백작 저택으로 달려갔다.
열심히 달려간 백작 저택은 평상시와 다르지 않았다.
저택에 도착한 기사의 닦달에 집사장이 나와 이야기를 들었고, 그는 기사와 함께 백작의 방으로 향했다.
“아직 일어나실 때가 되지 않아서 화를 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일입니다.”
“그건 알겠지만, 제가 백작님을 깨울 테니, 기다려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기사의 떨떠름한 대답에 집사장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같은 날은 백작이 스스로 일어나기 전까지는 깨우지 않는 편이 좋았다.
집사장은 어젯밤, 백작이 여자를 데려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밖으로 드러난 백작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지만, 백작이 그런 것은 처음도 아니었고, 귀족 중에서 백작만 그러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백작의 방에 들어갔던 여자는 다음 날부터 아예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다른 귀족과 달랐다.
덕분에 추문도 없었고, 나쁜 소문도 나지 않았지만, 여자와 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저택의 몇몇 고용인들은 오늘 같은 날 극도로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집사장은 거리의 여성들처럼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기사를 데리고, 백작의 침실 앞에 도착한 집사장은 조심스럽게 방문을 두들겼다.
똑똑.
“아침 일찍 죄송합니다. 왕실 기사에 보냈던 헬데르 기사가 왔습니다. 중요한 일이랍니다.”
집사장은 문을 두드린 뒤에 작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백작이 깬 모양이었다.
고함이나 물건이 날아오는 소리가 아니라서 집사장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집사장의 안도는 너무 빨랐다.
“꺄아아악!”
방 안에서 여자의 비명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놀란 집사장과 기사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기사의 말에 집사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겠습니다.”
집사장의 말과 함께 기사가 문을 박찼다.
마나가 실린 발길질에 문이 박살이 났다.
박살 난 문 뒤로 보이는 실내의 모습은 두 사람을 아연실색하게 했다.
집사장의 예상대로 백작은 아직 침대 위에 있었다.
다만, 그는 두 사람을 맞이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가운만 걸친 채로 침대 위에 앉아, 누워 있는 여자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방금 말한 것처럼 침대 위에는 백작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침대 위에는 목이 졸리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전날 여자를 방에 들였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시간까지 여자가 있었던 적은 없었는데…….
이상한 일이었지만, 집사장은 뜻밖의 상황에 정신이 없어서, 의아함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황당하게도 백작에게 목이 졸리고 있는 여자는 버둥거리고 있지만은 않았다.
여자는 백작의 목에 박힌 단검을 쥐고 있었다.
상황을 보니, 여자가 백작의 목에 단검을 박아넣고, 백작은 여자의 목을 조르는 중이었다.
누가 먼저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방에 들어온 두 사람이 할 일은 한가지였다.
기사는 검을 뽑아 들고, 침대 위로 뛰어올라, 여자의 목을 베어버렸고, 집사장은 백작을 끌어당겼다.
“컥. 컥. 컥.”
하지만, 집사장에게 당겨진 백작은 목을 잡고 신음을 뱉더니, 바로 숨이 멈췄다.
백작이 죽은 것이다.
집사장은 반쯤 넋이 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피가 가득 튄 침대에, 목이 잘려 나간 여자.
그리고, 목에 단검이 꽂힌 채로 죽은 백작.
주변을 둘러보다가 집사장은 정신이 번뜩 들었다.
이렇게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금 상황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됩니다. 지금부터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지키십시오. 저는 백작 부인을 모셔오겠습니다.”
그의 말에 기사는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잘못되어 보고하러 왔는데, 더한 일에 휘말린 것이었다.
그는 집사장 말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집사장은 바로 방을 뛰쳐나갔고, 기사는 문 앞을 지키고 섰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두 사람은 방안의 광경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람의 목이 잘리고, 백작의 목에도 단검이 박혔는데, 둘 다 피가 많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과.
백작에게 목을 잡힌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는 점.
그리고, 방구석에 남아 있는 패인 자국까지.
이상한 점은 그 외에도 더 있었지만, 두 사람도, 뒤에 찾아온 백작 부인도 백작과 여자의 죽음에 신경을 쓰느라, 그런 것에 관심을 두지 못했다.
백작이 자신의 침대 위에서 거리의 여자와 같이 죽다니.
그건 수도의 사교계와 귀족들이 알면 절대로 안 되었다.
그 소식이 새어나가면, 백작 부인도 남은 가족도 오물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백작 부인은 그 사실을 묻기로 했다.
수면 중 평범하게 죽은 것으로.
소식을 전하려 했던 기사도 붙잡혀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도 백작 부인과 집사장과 함께 백작의 죽음에 증인을 서게 된 것이다.
거기다, 백작의 뒤처리가 그렇게 빨리 진행될 수는 없었다.
백작이 죽은 것이 알려진 것은 결국, 하루가 지나서였다.
샤를 자작과 같이 떠난 왕실 기사도, 그 일행을 기다리던 용병과 암살단에게도 백작이 죽었다는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