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3화
제18편 검의 주인 (1)
한 달이 넘게 밖에서 지내다가 겨우 돌아왔는데, 바로 떠나게 되었다.
나는 다음 날 아침부터 이리저리 영지의 사람들을 만나고, 오후 늦게 수도로 출발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샤를 자작이자 이 영지의 주인으로서의 행차였다.
제대로 준비한 마차를 타고, 후안이 이끄는 병사들이 마차를 호위했다.
일행의 선두는 보고를 위해 아침에 돌아온 디오구 기사가 하게 되었다.
산맥에서 열심히 마물과 싸운 덕에 디오구 기사에게도 관록이란 것이 보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나와 우리가 떠나는 것을 배웅하고 있었다.
오헨 기사와 집사장, 우고 기사, 저택의 하녀들과 어머니까지.
우고 기사는 저택에 남기로했다.
그는 호위 기사로 나를 따라오려 했지만, 미겔이 북쪽 산맥으로 가 있는 지금, 저택에도 믿을 만한 기사가 있어야 했다.
다행히 디오구 기사가 아침에 돌아와서 후안 기사 대신 우리 일행에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발레아와 내가 마차에 오르자, 어머니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와 발레아를 쳐다보며 작별 인사를 했다.
어머니의 표정을 보니, 오늘 아침에 문안을 드렸을 때,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아침 문안 시간, 응접실에서 인사를 하는 나에게 어머니는 거두절미하고 말을 꺼냈다.
“네가 없는 동안 발레아가 정말 잘해주었다. 안주인 이상의 일을 하더구나. 그동안은 말을 안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준비해야 할 때가 된 것 같구나.”
당연히 발레아와의 결혼 이야기였다.
사실, 영지를 가지고 있는 자작이 결혼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사교계에서는 흠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나이도 젊고, 작위를 얻은 것도 얼마 안 되어서 다들 말이 없는 것이었지만, 곧 말이 나올 터였다.
전에 여자들을 소개하려 했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한 소문을 낼 게 분명했다.
솔직히 슬슬 결혼을 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오헨 기사 덕이긴 했지만, 이제 영지도 안정되었고, 영주 부인이 뒤에서 영주를 받쳐주는 것도 필요한 일이었다.
다만, 결혼은 내가 내키지 않았다.
내가 대답을 못 하자, 어머니는 다시 물으셨다.
“혹시,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는 거냐?”
어머니의 말에 언 듯 머릿속으로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발레아도 내키지 않고, 다른 사람을 생각한 것도 아니라면 내가 알아볼까. 연락 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어렵지 않을 것 같구나.”
내가 바쁘게 돌아다니니, 어머니께로 사람이 가는 모양이었다.
발레아와 내 사이를 다들 알고 있겠지만, 어차피 일부다처가 허용되는 세계였다.
첫 번째 부인은 정략적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으니, 다들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어머니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한 몇 년은 너무 바빠서 시간을 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한 달 넘게 외유한 것도, 이번에 다시 수도로 가게 된 것을 봐도 한동안은 바쁠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어머니는 고민하는 얼굴로 지긋이 나를 쳐다보았다.
“알았다. 아예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으니, 더 말하지는 않겠다. 다만……. 아니다. 바쁠 테니, 어서 일을 봐라.”
결국,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나를 내보냈다.
물론, 마물 왕과 마물이 쏟아져 나오고, 봉인된 마왕도 풀려나리라는 예언도 내가 결혼을 고민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마물 왕이 쏟아져나오고, 마왕이 풀려나기라도 한다면, 가족을 남긴 채로 싸우다 죽게 될 수도, 가족이 죽는 것을 볼 수도 있었다.
그런 걱정이 결혼을 고민하게 했지만, 내가 결혼을 망설이는 가장 큰 이유는 아니었다.
내가 결혼을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내 능력 때문이었다.
죽으면 과거로 돌아가는 내 능력.
나는 그 능력 때문에 차마 결혼하겠다고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이 능력 때문에 주위 사람들과 다른 시간 속에 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삶을 보냈고, 그들이 알지 못하는 수많은 추억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과 가까워질수록 그 괴리감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주위 사람들이 의문을 가지고 있는데, 나와 결혼한 사람은 의심과 불안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그것을 이겨낸다고 해도,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내 아이들이었다.
내 아이들은 내 능력 때문에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이 될 수도 있었다.
아니면, 내가 아이들 때문에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었다.
둘 다 선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능력을 쓰지 않아도 될 세상이 올 때까지.
나는 아이를 낳을 수도, 결혼을 하기도 어려웠다.
그런 고민을 하는 나를 태우고, 마차는 수도로 달려갔다.
오랜만에 기수를 하게 되어서인지, 디오구 기사는 멋진 모습으로 선두에서 말을 달렸다.
그가 쳐든 깃발은 바람에 펄럭였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일행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대륙은 혼란했지만, 오히려 왕국은 평화로워 보였다.
내전이 끝나서이기도 했지만, 왕이 된 아이샤와 그레시아 공작이 나라를 잘 다스리고 있어서 일터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밝고, 활기찼지만, 내가 보기에는 폭풍이 오기 전의 평온함일 뿐이었다.
몇 개월 만에 다시 오게 된 왕국의 수도도 분위기는 다르지 않았다.
도시는 활기에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어디에도 대륙의 위기나, 제국의 위협은 보이지 않았다.
수도 외성의 병사들은 깃발을 보고 바로 마차를 통과시켜주었다.
마차는 수도의 중앙 대로를 달려, 왕궁 앞에 도착했다.
왕궁의 내성 문을 지키던 왕실 기사들은 나를 알아보았고, 바로 마차를 통과시켜주었다.
병사들을 남겨두고, 마차는 왕궁의 앞뜰을 지나, 정문 앞에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려 기다리니, 연락이 되었는지, 늙은 왕궁 집사장이 허겁지겁 내려와 내게 인사를 했다.
“돌아오셨군요. 여왕님께서 기다리셨습니다.”
집사장이 이렇게 빨리 내려온 것을 보니, 기다렸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지금 여왕님을 뵐 수 있습니까?”
다행히 예복을 입고 마차를 타고 와서, 따로 준비할 필요는 없었다.
내 말에 집사장은 조금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지금 회의 중이시기는 합니다. 그런데, 회의에 들어가실 때도 오시면 최대한 빨리 모셔오라고 하셔서…….”
기사인 내가 회의에 무슨 필요가 있을까 했지만, 계속 여왕이 불렀다니 가보기로 했다.
“그럼, 회의장으로 가 보죠. 가서 여쭈면 되겠지요.”
“알겠습니다.”
내 말에 집사장은 고개를 숙였다.
나는 집사장과 가기 전에 발레아를 돌아보았다.
발레아는 내게 미소를 지었다.
“다녀오세요. 저는 왕후님께 가 있겠어요.”
따지고 보면, 이 왕궁에서는 나보다 발레아가 더 발이 넓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집사장을 따라, 회의장으로 향했다.
“그동안 수도는 별일 없었습니까?”
오기 전 레스티에게 이야기는 따로 들었지만, 왕궁 내에서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다를지도 몰랐다.
“별일이 없지는 않았지만, 제국에서 사절이 오기 전까지는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레스티의 말과 다르지 않았다.
여왕과 그레시아 공작은 그동안 왕국을 잘 다스려왔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제국에서 사절이 온 뒤로 잠잠하던 귀족분들이 들고 일어나서, 여왕님께서 많이 힘들어하십니다.”
사절을 핑계로 반대파들이 들고일어난 걸까?
하지만, 제국이 우리 왕국의 내전에 참여한 것 때문에 다들 쉽게 나설 수 없을 텐데?
여왕을 지지하던 귀족들도, 다른 왕자들을 지지하던 귀족들도 함부로 나서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누가 나서서 말한 것인지…….
내 의문은 회의실에 도착하기 전에 풀렸다.
회의실에 다가가자, 마나로 강화된 내 귀로 회의실 안의 소리가 들려왔다.
“제국이 직접 요청한 일입니다. 그 거대한 제국이 직접 사절을 보내서 부탁한 일입니다. 거절했다가는 제국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릅니다!”
내 귀에 들려온 소리는 설득력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평범한 사람이 들었다면 바로 고개를 끄덕일 능력이 가득 담긴 목소리.
바로 나와 함께 제국을 다녀온 사절단의 수장. 시드 백작이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이번 기회에 그동안의 적대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우리가 이피로스 왕국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가 제국의 뜻을 따르는 귀족들의 대표인 모양이었다.
“제국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입니다!”
“어차피 제국이 북부 산맥을 넘어오지도 않을 테니, 상황에 따라서 이피로스의 땅 일부를 할양받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의 말에 이어, 다른 귀족들도 한마디씩 말을 덧붙였다.
백작의 말처럼 귀에 감기는 말은 아니었지만, 다른 귀족들의 말도 무척이나 그럴듯한 말이었다.
“안 됩니다. 아직 내전의 후유증이 다 치료된 것도 아닙니다. 벌써 군을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이어서, 아버지, 그레시아 공작의 말이 들려왔다.
논리적인 대답이었지만, 그동안 한참을 시달렸는지, 그는 조금 지친 것 같았다.
“제국은 기사단만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상대는 이피로스 왕국입니다. 제 기사 중에도 가겠다는 기사들이 많습니다.”
공작의 말을 반대한 귀족의 목소리는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그는 내전 중에 여왕의 편에 섰던 귀족이었다.
그는 분명 공작의 계파였었다.
그런데, 이렇게 내놓고 반대를 하다니.
내전 중에 이피로스 왕국군과 신경전을 벌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수도의 귀족 세력이 달라진 걸까?
어찌 되었건 상황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동안, 여왕님께서 키워오신 기사단과 병력을 테스트해볼 기회입니다!”
그 뒤에도 계속 귀족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잠깐 듣는 것만 해도 제국의 편에 서야 한다는 말이 훨씬 더 많았다.
그렇게 시끄럽게 이어지던 말이 잠깐 멈추었을 때, 집사장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가슴에서 검을 꺼냈다.
문 양쪽에 서 있던 왕실 기사들이 내가 검을 꺼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나는 꺼낸 검을 허리에 찼을 뿐이었다.
기사들은 내가 갑자기 검을 꺼낸 것에 놀란 것 이상으로 내가 꺼낸 검에 놀랐다.
“여왕님의 호위 기사니 검을 차고 들어가겠습니다.”
내 말에 두 기사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검을 꺼내고 기사들에게 말을 하는 동안, 집사장도 안에서 말을 전한 모양이었다.
회의실 안이 조용해졌고, 집사장이 안에서 회의실의 문을 열었다.
“들어오시랍니다.”
집사장이 연 문 안으로 문 쪽을 쳐다보는 귀족들과 여왕이 보였다.
나는 열린 문을 통해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긴 테이블에 앉아있던 귀족들이 나를 노려보았다.
대부분 적대적인 눈이었다.
그리고, 테이블 제일 끝 쪽에 그레시아 공작이 있었다.
공작은 생각보다 더 지쳐 보였다.
생각보다 이쪽 일이 취향에 안 맞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테이블 맨 끝. 상단에 어린 여왕이 앉아 있었다.
여왕은 무척이나 피곤해보였다.
그래서인지, 여왕은 전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이제는 어린 소녀라 부르기 어려울 정도였다.
“자작도 사절단으로 제국을 같이 다녀왔다지만, 호위 임무로 간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회의에 참여시킨다는 건…….”
내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시드 백작이 목소리를 높였다.
예상했지만, 자리에 앉아 차분히 이야기를 늘어놓기는 어려워 보였다.
나는 자리에 앉지 않고, 여왕 옆으로 걸어갔다.
다들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여왕 옆에 서서 검을 뽑았다.
“설마……. 그 검은…….”
가까이 있던 공작이 제일 먼저 알아보았다.
나는 검을 거꾸로 들고, 여왕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지시하신 일을 마치고 왔습니다. 맡겨주신 검을 돌려드립니다.”
그 말과 함께 검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환하게 빛나는 검.
‘기사의 검’, 아니 ‘정화의 검’이 회의실 가득 빛을 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