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2화
제17편 자작의 귀환 (3)
용개가 영지에 도착한 것은 어두운 밤이었다.
밤하늘 아래 저택이 있는 도시가 보였다.
간간이 창문으로 빛이 새어 나오는 밤의 도시.
도시를 감싸는 성벽 위로 등불이 드문드문 피어오르고 있어, 도시의 경계를 알 수 있었다.
다만, 어두운 도시 안에 홀로 환한 건물이 있었다.
도시 북쪽 커다란 저택. 이 영지의 영주가 사는 저택이었다.
크르르릉.
멀리 성벽과 저택이 보이는 높은 상공에서 언데드 비룡, 용개가 신음을 흘렸다.
조금씩 뜯겨나가는 피부와 피막. 힘을 잃어가는 날갯짓.
죽음의 신의 이름으로 되살린 게 아니어서일까?
해골만 남은 채로도 생생하던 해골 기사들과 달리, 용개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분해되어갔다.
언데드 비룡은 풍화가 되는 것처럼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점점 고도를 낮추는 비룡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고맙지. 수고했다.”
캭.
내 말에 용개는 입을 벌려 대답을 하려 했지만, 이제는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이 비룡이 짧은 시간이나마 다시 살아난 것인지, 아니면, 검은 마나로 어디선가 조종하고 있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협곡에서 죽은 다른 마물들을 일으켰을 때, 전부 반응이 다른 것을 보고, 되살아난 마물들은 각각 개성이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전생에는 디지털 펫이나 로봇 펫들도 살아 있는 펫처럼 대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내 행동도 별로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이름을 지어주었던 비룡이 자신의 몸을 흩날리며 점점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성벽을 넘어, 마을을 지나, 영주의 저택이 조금 남았을 때, 용개는 더 이상 날지 못하게 되었다.
비룡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저택 쪽으로 몸을 날리며 검은 마나를 거두어들였다.
슈우우욱.
검은 마나가 돌아오자, 비룡은 이제 제 형체로 유지하지 못했다.
피부와 피막은 물론, 살점과 뼈까지 갈가리 찢겨서 허공에 흩날렸다.
그렇게 언데드 비룡은 하늘에서 사그라들었다.
허공에서 흩어지는 비룡을 마지막까지 확인한 뒤에 나도 내려설 자리를 확인했다.
아쉽게도 저택 안에 내려서기는 어려워 보였다.
내가 떨어질 곳은 저택 담과 가까이 붙어 있는 커다란 집이었다.
이 정도 높이는 마나를 이용해서, 다치지 않고 내려설 수는 있었지만, 내려설 곳을 바꾸는, 허공을 박차는 기술은 없었다.
아무래도, 남의 집 지붕을 부숴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저택의 안쪽 정원에서 검은 그림자가 쭉쭉 자라나는 게 보였다.
촤아아아악!
그 그림자는 정원에 세워져 있던 나무였다.
나무는 높게 자라나다가, 가지를 뻗었다.
가지는 저택의 담을 너머, 내가 떨어지고 있는 집 위로 계속 자라났다.
나는 늘어나는 가지를 보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가지 끝에는 발레아가 서 있었다.
발레아가 마중 나온 것이다.
어두운 밤.
저택의 불과 별빛만이 반짝이는 시간이었지만, 발레아의 얼굴은 전부 확인할 수 있었다.
반가움이 담긴 환한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가득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뭇가지는 내가 내려서려 했던 지붕 위까지 길게 자라났고, 나는 지붕 대신, 나뭇가지 위에 내려섰다.
터억.
나뭇가지는 휘청이며 나를 받쳐주었다.
“어서 오세요.”
이어서 들려오는 발레아의 목소리.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집에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 * *
늦은 밤이었지만, 내가 돌아온 것을 알게 되자, 많은 이들이 찾아왔다.
어머니가 제일 먼저 뛰어오셨고, 이어서 오헨 기사가 달려왔다.
우고도 헐레벌떡 달려오고, 퇴근했던 집사마저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다.
거기다, 저택에서 일하는 신도에게 연락을 받았는지 레스티마저 찾아왔다.
다들 잠든 깜깜한 밤에 내 집무실은 무척이나 북적이게 되었다.
어머니를 안심시켜드린 뒤, 나는 다른 사람들과 집무실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하거나 회의를 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지만, 이렇게 일부러 찾아온 사람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대신 나는 감춰두었던 와인을 꺼내 모두의 잔에 따라주었다.
성전으로 가기 전, 수도원을 뒤지고 다닐 때 지하에서 찾은 와인이었다.
그 수도원은 성전으로 향하는 교단의 비밀 지부였지만, 와인도 잘 만드는 모양이었다.
와인은 무척 맛있었다.
집무실에 모인 사람들도 와인이 맛있었던 모양이었다.
일행이 만족한 얼굴로 와인을 음미하는 동안, 먼저 내가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발레아만 있었다면 최대한 자세히 말했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있어서 전부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다만, 제국 3황자와 함께 교단의 성전으로 공간 이동을 했다가, 마물들의 습격을 받아, 겨우 돌아왔다는 식으로 말해 주었다.
그 이야기 중에는 성전에서 성물들을 찾은 것도, 마물 왕을 만난 것도, 마지막에는 악신의 신전에서 해골 기사와 싸운 것도 빠져 있었다.
“이상한 곳에 떨어져서, 돌아오는 길에 세우타 요새에 들러, 그곳의 기사들과 함께 마물과 싸웠습니다. 마물들이 전과 달라진 것 같더군요.”
내 말에 우고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얼마 전부터 마물들이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영지도 미겔과 디오구 기사가 병사들을 데리고 사냥꾼 마을로 가 있습니다.”
미겔이 왜 안 보이나 했더니, 영지 북쪽의 산맥에 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걱정했는데 다행이군요. 아무튼 그렇게 되어서 저는 영지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용개를 타고 온 내용이 빠지니, 복귀한 날짜가 조금 어긋나버렸지만, 나는 발레아에게만 눈짓을 하고 모른척했다.
소로카 요새에 확인하지 않으면 날짜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모두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많은 내용을 빼버렸는데도, 남들이 보기에는 놀랄 만한 여행이었던 모양이었다.
다만, 이들 중에는 감탄 대신, 지친 한숨을 내쉬는 사람도 있었다.
나 대신 두 영지의 업무를 보아왔었던 오헨 영주 대행이었다.
“다들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여기 레스티를 통해서 조아나 신관과 엘레나 님, 그리고 제국의 손님이 무사하다는 연락까지 받아서 걱정이 더 됐죠. 발레아님이 중심을 잡아주지 않으셨으면, 일이 쉽지 않았을 겁니다.”
오헨은 고개를 젓더니, 와인을 다시 들이켰다.
그의 지친 모습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헨에게는 유물 주머니에 따로 담아둔 와인을 건네주어야 할 모양이었다.
내 이야기가 끝났으니, 이번에는 영지 이야기를 들을 차례였다.
사람들은 차례로 내가 없는 동안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우선 영지는 내 예상보다 더 잘 돌아가고 있는 듯했다.
레스티의 경매장은 귀족들 사이에 대호평이었고, 도시는 귀족과 상인들로 북적였던 모양이었다.
다만, 얼마 전부터 시작된 마물의 준동으로 호황이 많이 가라앉았지만, 그래도 초기에 기사와 병사들이 나서서 치안을 잡은 덕에 다른 영지들보다는 상황이 훨씬 좋은 것 같았다.
“마님께서 걱정이 많으셨는데, 발레아 님이 계속 위로해 주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저야 실무만 봤을 뿐, 귀족들의 접대와 공식적인 일들은 발레아 님이 다 해주셨습니다.”
“질 안 좋은 용병들이 몇 번 들어왔는데 발레아 님이 미리 알려 주셔서 문제없이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경매장에 방문한 귀족분들도 발레아 님이 나와서 접대를 해 주신 덕에 모두 기뻐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었지만, 집사도, 오헨 기사도, 우고와 레스티까지 전부 발레아에 대한 칭찬으로 말을 마쳤다.
발레아를 혼자 놔두었더니, 벌써 사람들을 휘어잡은 모양이었다.
모두의 칭찬에 발레아를 쳐다보았지만, 발레아는 와인을 든 채로, 나를 보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전과 다르지 않은 발레아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발레아와 다른 이들의 노력 덕에, 영지는 내 예상보다 좋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왕국은 그렇지 않았다.
먼저, 오헨이 입을 열었다.
“새로 황위에 오른 제국의 황제가 보낸 사절 때문에, 수도는 무척이나 시끄러운 모양입니다.”
“사절?”
“네, 사절이 와서, 이피로스 왕국을 공격하는데 우리 왕국도 한 손을 거들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오헨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피로스 왕국은 제국의 속국에 가까운 나라였다.
그런 나라를 같이 공격하자고 하다니…….
차라리 우리 왕국을 공격한다면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어리둥절한 내 표정을 보고 레스티가 나섰다.
“제가 우선 그동안의 상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레스티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레스티에게 할 말이 있었다.
나는 레스티에게 배운 셀린 교단의 수화로 성물을 가져왔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내 손짓에 레스티의 얼굴이 환해졌다.
모두 어리둥절해서 레스티를 쳐다보았고, 레스티는 바로 표정을 다잡고 내게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우선 교단의 도움으로 몸을 피한 3 황자 때문에 새 황제와 교단의 사이가 극도로 안 좋아졌습니다.”
“설마, 영주님의 외유가 3 황자를 대피시킨 일 때문이었습니까?”
사정을 몰랐던 사람들은 3 황자 이야기에 눈을 크게 떴다.
사람들이 다시 놀란 가운데, 레스티는 말을 이었다.
“새 황제는 제국 수도에 있는 교단의 본단이 폐쇄되고, 교단도 이번 황제를 이단으로 규정할지 모른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까지는 알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전 대륙에 신도가 퍼져 있는 레스티가 아니라면 알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레스티의 말을 들으니, 내가 남긴 증거들을 황제가 안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열심히 남긴 증거들이 묻혔다면 무척이나 아쉬울 뻔했다.
“교단도 그렇지만, 2 황자와의 싸움도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레스티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황태자가 여태 2 황자를 정리하지 못했다고?
3 황자를 쫓는 데만 십 대 검호 둘을 보낸 황태자였다.
내가 그 둘을 죽여서 황태자에게 피해를 주기는 했지만, 황태자에게 남아 있는 세력이 작을 리가 없었다.
거기다, 황태자에는 조직이 있었다.
조직만 움직였어도, 2 황자 정도는 정리하고도 남았을 터였다.
“물론, 세력의 차이는 커서, 2 황자는 지지하는 세력과 함께 제국의 외각, 그리고 나머지는 국외까지 밀려났습니다.”
“외각이라면 어디지?”
“제국의 남동쪽으로 밀려난 모양입니다. 이번 마물들의 난동에 2 황자쪽 세력이 큰 피해를 본 모양입니다.”
“설마, 2 황자가 이피로스에 있나?”
“네. 이피로스 왕국과 몇몇 소국이 2 황자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2 황자는 지금 이피로스에 있습니다.”
“아니, 이피로스가 왜?”
내 물음에 오헨이 대신 대답했다.
“다들 의아해하고 있습니다. 교단 때문이라는 사람도 있기는 한데, 어쨌거나 이피로스의 왕이 2 황자를 지원하기로 한 모양입니다.”
다들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지만, 이야기를 들으니, 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일부러 밀어 넣었군.”
황태자는 2 황자를 마물들의 진격로에 밀어 넣은 것이었다.
조직을 움직여 그 길목의 왕국들에게 2 황자를 지원하게 했고.
상황을 알게 되자, 우리 왕국에게 같이 싸우자고 한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조직, 아니 새 황제는 우리와 이피로스 왕국을 싸움 붙여서 마물이 움직일 길을 열어놓을 생각이었다.
“여왕님이 나를 찾지 않았나?”
“네. 전령이 있었습니다. 영지에 돌아오시면 바로 수도로 오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오헨은 미리 준비해 놓았는지, 책상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여왕의 명령서였다.
나는 발레아를 돌아보았다.
“여왕님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군요. 발레아도 출발 준비해요. 내일 바로 출발합니다.”
내 말에 모두 한숨을 내쉬었지만, 발레아는 환한 얼굴로 내게 대답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