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1화
제16편 자작의 귀환 (2)
기사들은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고 놀란 것 같았다.
장군도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글란도 놀란 모양이었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마나가 출렁이는 게 보였다.
나는 마나가 출렁이는 방향으로 손을 흔들었다.
화아악.
글란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바르도 장군이 내게 물었다.
“어떻게 여기에…….”
“영지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내 말에 글란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외유 중이라고 들었는데……. 외국에 계셨었나요?”
영지로 돌아가는 길에 국경인 소로카 요새에 들렀다는 건, 그동안 외국에 있었다는 말일 수밖에 없었다.
틀린 말도 아니었고.
다만, 내가 영지에 없다는 것을 글란도 알고 있다니.
“두 주 전에 들었어요. 한 달 전부터 외유 중이라는 말을 들어서 너무 오래 영지를 비우는 게 아니냐고 말들이 있었어요.”
하늘 위는 추웠지만, 지상에 내려오니 더위가 느껴지고 있었다.
이제 막 여름에 들어서는 듯한 주변의 경치.
영지를 떠난 지도 벌써 한 달 가까이 지난 모양이었다.
잠들어 있던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되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이렇게 마물들의 움직임이 달라진 것일 테고.
그래도, 다행히 내가 마물을 타고 온 것은 들키지 않은 모양이었다.
몇몇 기사는 어떻게 등장했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돕겠습니다. 이번 마물들을 막아 내면 좀 여유로워질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내가 위에서 마물들을 유인하고, 뒤에서 공격하곤 해서 마물들 무리를 키워놓았다.
웨이브 세 번 정도 되는 마물의 떼를 한 무리로 만들어버렸으니, 이번 웨이브만 처리하면 앞으로는 한동안 편해질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두 배가 넘는 마물들이 몰려오는데…….”
“괜찮겠나? 우리야 고맙지만, 자작도 자신의 영지가 있잖나.”
부자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북쪽 요새는 다시 복구되었겠죠?”
“그렇다네. 그쪽도 열심히 막고 있어서, 우리도 버티기가 어려워진 거지.”
양쪽에서 계속 막고 있으면, 마물들이 협곡을 넘어 서쪽으로 이동하게 될 터였다.
하지만, 장군은 서남쪽에 있는 카를로스 왕국 영지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이렇게 협곡 안까지 들어와 마물들을 막아 내는 것일 테고.
다만, 기사들의 모습을 보니, 더 버티기는 어려워 보였다.
‘아슬아슬했네.’
내가 마물들을 모아온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제국이 보수해 놓은 북쪽 요새를 다시 뚫어놓을 생각이었다.
북쪽 요새가 다시 뚫리면, 앞으로 소로카 요새의 기사들은 몰려오는 마물들을 막기가 편해질 터였다.
그러면 서쪽에 있는 내 영지 쪽으로 넘어오는 마물들도 줄어들 테고.
앞으로 마물은 계속 밀려올 테니, 제국이라도 한번 뚫린 요새는 다시 막기 어려울 터였다.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몰려오는 마물들을 막고, 마물들을 협곡의 북쪽으로 밀어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전에 경험했던 것보다 훨씬 강하고 많은 마물을 쓰러지기 직전인 기사들과 함께 막아 내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나는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마물들이 들이닥쳤다.
크아아앙!
마물들의 괴성이 동쪽 협곡 위에서 들려왔다.
그와 함께 협곡 아래로 쏟아지는 마물들.
얼마나 수가 많은지, 좁은 산길로 다 내려오지 못해, 상당수 마물이 절벽으로 굴러떨어졌다.
곤충처럼 각피를 두른 마물에서 팔다리 숫자가 엄청 많은 마물까지.
마물들은 이 세상의 생물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전부 봉인지에서 흘러나온 마물들이었다.
협곡으로 쏟아지는 마물들을 보고, 기사들이 창과 검을 움켜쥐었다.
글란은 다시 몸을 감추었고, 장군은 기사들에게 목이 터질 듯이 외쳤다.
“모두 힘내라! 샤를 자작의 말대로라면 이번만 막으면 쉴 수 있다!”
그의 말에 기사들이 큰 숨을 몰아쉬었다.
몇몇 기사는 피식 웃기까지 했다.
“하하……. 막으면 말이죠.”
그도 그럴 것이 쏟아지는 마물의 양은 그들이 감당하기 어려워 보였을 터였다.
내가 봐도 지친 기사들로는 첫 웨이브도 막기 어려워 보였다.
결국, 내가 저 웨이브를 멈춰야 했다.
나는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가, 대검을 크게 휘둘렀다.
부우우웅.
여러 가닥의 빛의 선이 전방으로 퍼져나갔다.
퍽, 퍽.
선이 스쳐 지나간 곳에서 피가 튀어 올랐다.
몇몇 마물들은 땅을 굴렀지만, 달려오는 기세가 멈추지는 않았다.
나는 멈추지 않고, 마주 달려 나갔다.
뒤에서 멈추라는 고함이 들려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달려드는 마물들의 파도에 몸을 던졌다.
사방에 가득한 마물들.
나는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도움을 주겠다고 온 기사가 혼자 뛰쳐나가 버리니, 뒤에 있던 기사들은 술렁일 수밖에 없었다.
“미친!”
“구해야 합니다!”
“대기해! 진형을 깨면 안 돼!”
기사 중에는 도와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장군은 부하들을 멈춰 세웠다.
이 뒤로 마물들을 보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저런 마물 떼 속에서는 제국의 검호도 못 버틸 겁니다!”
전에 알렉스와 같이 싸웠었던 기사가 다시 건의했지만, 그의 말은 다른 기사의 외침에 묻혀버렸다.
“어 잠깐……. 아직 싸우고 있습니다.”
마물 떼를 지켜보던 기사들의 눈이 커졌다.
달려오는 마물 떼 중간에서 피와 살점들이 솟구치고 있었다.
마물 떼에 휩쓸렸지만, 샤를 자작은 아직 싸우고 있었다.
더구나, 갈수록 솟구치는 피와 살점이 더 많아지는 것 같았다.
거기다, 마물들의 움직임이 점점 이상했다.
“마물들의 전진 속도가 느려지고 있습니다.”
기사들을 향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오던 마물 떼의 방향이 중구난방으로 변하고 있었다.
계속 달려오려는 마물도 있었지만, 다른 방향으로 가려는 마물도 있고, 되돌아가려는 마물까지 보였다.
그리고, 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마물들이 이상합니다!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습니다.”
마물 떼의 중앙 부분에서부터 마물끼리의 싸움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상처가 심한 마물들이 옆에 있는 마물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마물들은 종류가 다른 마물들만이 아니라, 같은 마물들도 공격하고 있었다.
기사들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어리둥절했지만, 그걸 계속 지켜볼 수는 없었다.
“모두 막아!”
속도가 늦어진 마물 떼가 진형을 갖춘 기사단과 접촉한 것이었다.
캉! 퍽!
기사들은 마지막 힘을 모아 마물들을 쓰러뜨렸다.
하지만, 그동안의 피로와 너무 많은 마물로 인해 기사들은 금방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다친 기사들이 속출했고, 진형이 휘청거렸다.
다들 암울한 표정을 지을 때, 장군의 지시가 달라졌다.
“막으면서 조금씩 물러선다! 죽이지 않아도 돼! 천천히 후퇴한다!”
뜻밖의 지시였다.
기사들은 의아했지만, 지시에 따라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신기하게도 물러서는 만큼 여유가 생겼다.
압력이 확 줄어든 것이다.
“어? 수가 왜 이렇게 줄었지?”
기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자, 상황이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마물의 수도 많이 줄어들어 있었지만, 협곡 안의 싸움도 난전으로 바뀌어 있었다.
기사들과 마물들과의 싸움만이 아닌, 마물끼리의 싸움도 사방에서 벌어지는 중이었다.
“사람을 앞에 두고 왜 자기들끼리 저러지?”
기사 하나가 옆에 있는 기사에게 물었다.
마물끼리도 충분히 싸울 수 있겠지만, 기사들은 웨이브 때에, 인간을 앞에 두고 서로 싸우는 마물을 본 적이 없었다.
“나도 모르지, 그보다, 저 마물들은 저 꼴로 어떻게 움직이는 거지?”
팔다리가 잘리고, 몸이 반쯤 잘려 나간 마물들이 다른 마물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마물들의 생존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박살 난 마물들이 멀쩡히 움직이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난전이 되어버리자, 기사들은 천천히 물러서며 마물들과의 거리를 벌릴 수 있게 되었다.
마물들은 서로 싸우며 점점 북쪽으로 움직였다.
마치, 마물 일부가 다른 마물들을 북쪽으로 모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마물들은 사체들을 바닥에 남기고 북쪽으로 떠나갔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지…….”
기사들은 마물들이 떠나는 모습에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장군은 기사들을 지휘했다.
“모두, 잠시 휴식하면서 인원 점검을 한다!”
그의 말에 기사 한 명이 번뜩 고함을 질렀다.
“아, 맞다, 알렉스 공은 어떻게 됐지?”
“샤를 자작은 무사하니 걱정하지 말도록.”
그의 말에 장군이 대답했다.
장군은 마물들이 달려가고 있는 북쪽 협곡을 보고 있었다.
장군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 그에게 말을 남기고 북쪽으로 달려가던 젊은 기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기사는 그때, 여러 마리의 마물들을 이끌고, 다른 마물들을 북쪽으로 모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은 어이없게도 양치기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무도 안 믿겠지.”
자신도 믿기 어려웠으니, 누구도 믿지 못할 터였다.
어찌 되었건, 마물들과 함께 북쪽으로 향했다는 것은 그가 무엇을 할 생각인지는 알 것 같았다.
성공만 한다면, 큰 도움이 되겠지만, 아쉽게도 자신은 도울 수 없었다.
지치고 다친 부하들 때문도 있지만, 지금 샤를 자작이 하는 일에 자신은 공식적으로 나설 수 없었다.
제국이 알게 되면 꼬투리를 잡힐 수도 있었다.
호전적인 새로운 황제에게 틈을 보일 수는 없었다.
지금은 내부 정리 때문에 정신이 없어 보였지만, 언제 왕국으로 눈을 놀릴지 몰랐다.
지금 같은 난세에는 한 걸음 걷는 것도 조심해야 했다.
그런 이유로 그는 북쪽으로 향한 자작이 부러웠다.
* * *
확실히 제국의 저력은 대단했다.
협곡 북쪽에 있는 제국의 요새는 전에 보았을 때보다도 더 단단히 보강되어 있었다.
전처럼 기사들도 협곡으로 빠져나가지 않아서, 기사진도 튼튼했고.
다만, 이번에 몰려든 마물들은 그들의 예상보다 훨씬 더 강하고 많았다.
남쪽으로 내려온 만큼, 마물들은 북쪽으로 올라갔었고.
그 뒤에 내가 남쪽으로 내려왔던 마물까지 몰고 올라가니, 열심히 보강했던 요새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내가 손을 올릴 필요도 없었다.
마물들과 정신없이 싸우는 도중, 검은 마나로 되살아난 마물들이 내 지시에 따라, 성문을 열어버린 덕에 단단했던 요새는 허물어졌다.
마물들은 다시 요새를 거쳐 제국의 영지로 퍼져나갔다.
나는 부서진 문을 통해 계속 북쪽으로 달려가는 마물들을 보며, 검은 마나를 회수했다.
쿵, 쿵, 쿵, 쿵, 쿵.
내 주변에 서 있던 마물들이 무너져내렸다.
각양각색의 마물들.
전부 검은 마나로 움직인 마물 사체들이었다.
“총 다섯인가.”
용개에서 마나를 빼낸 뒤, 되살린 마물들이 총 다섯.
내가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최대한의 수였다.
쓸수록 숫자가 늘어나는 것 같아, 좋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그렇다고, 가지고 있는 힘을 쓰지 않을 수도 없으니, 최대한 조심하며 쓸 수밖에 없었다.
나는 검은 마나를 다시 풀어, 사체로 돌아가 있던 용개를 움직였다.
크르르릉.
언데드 비룡이 몸을 일으켰다.
나는 용개에 올라타기 전에 뒤를 돌아보았다.
허공에 일렁이는 마나.
“다 봤지?”
내 물음에 허공에서 사람이 나타났다.
글란이었다.
“네.”
글란은 두려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어떻게 하신 건지.”
“일종의 능력이야.”
“하지만, 이건…….”
“남들보다 능력이 다양하다고 생각하면 돼. 알겠지.”
내 말에 글란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은 지키겠습니다.”
나는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어차피 말할 수 없을걸? 전에 걸린 계약이 아직 남아 있으니.”
“아…….”
내 말에 그는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글란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용개에 올라탔다.
이제, 영지로 돌아갈 때였다.
나는 용개를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