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0화
제15편 자작의 귀환 (1)
고개를 숙이고 있는 좀비 마물, 마물 언데드를 보고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조금 전에 이 지하에서 천 구의 해골을 박살 낸 뒤였다.
마물 시체가 내게 고개를 숙인다고, ‘새로운 부하가 생겼군.’ 하고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나는 긴장한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마물 시체에 ‘기사의 검’을 내밀었다.
스르르르.
검이 다가가자, 마물 시체가 꿈틀거리더니, 검은 연기, 아니 마나가 사체에서 빠져나왔다.
풀썩.
마물은 다시 허물어져 시체로 돌아가고, 주변을 배회하던 연기는 검을 피해 다시 내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가슴 속에 있는 유물 주머니로 돌아간 것이었다.
하지만, 검을 다시 거두자, 조금 전에 벌어졌던 일이 다시 반복되었다.
가슴에서 검은 마나가 흘러나와 마물 시체를 다시 움직인 것이다.
다시 움직이는 마물 시체는 살아 있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반쯤 잘린 목도 멀쩡한 것처럼 움직여서 무섭기까지 했다.
“곤란한데…….”
지하에서 달려들었던 해골 기사들과 달리, 눈앞의 마물은 조금도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일어나. 앉아.”
더구나, 말귀도 어느 정도 통했다.
앉으라 하면 앉고, 일어나라고 하면 일어나는 것을 보니, 이건 펫과 다를 바가 없었다.
마물 사체는 내 말이 아니라 내 의사를 따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마도, 내가 성물을 가지고 있고, 내게 신관의 체취가 남았기 때문일 터였다.
신관의 잔재도 사라졌으니, 문제가 생길 여지도 많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안전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어찌 되었건 죽음의 신, 악신의 힘이었다.
죽은 마물을 움직이는 것을 보니, 마물의 마나와도 연관이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그건 죽은 짐승이나 사람이 움직이는지 봐야 하려나.
더구나, 사람들 앞에서 이런 죽은 마물을 데리고 다닐 수도 없었다.
다만, 그 문제는 바로 해결되었다.
“큐브로 들어가.”
계속 명령하다 보니, 검은 마나가 마물을 빠져나가 성물로 돌아가려 하고, 다시 나오지 않게 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나와.”
물론, 내 지시로 죽은 마물에 검은 마나를 씌워 움직이게 할 수도 있었다.
이렇게 되니, 안 쓰기도 곤란해졌다.
걱정된다고, 큐브를 땅에 묻어버리거나, 부수기도 힘들었고.
더구나, 지금 당장은 나를 따르는 이 언데드 마물이 꼭 필요했다.
“뒷일은 돌아가서 고민해 봐야겠다.”
결국, 나는 언데드 마물의 등에 올라탔다.
덩치도 크고, 평범한 날짐승도 아니니, 나를 태우고도 충분히 날 수 있을 터.
못 날면, ‘기사의 검’으로 조각조각 잘라 줄 생각이었다.
내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내가 올라타자, 마물은 날개를 활짝 폈다.
피막이 펼쳐지고, 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바람이 일고, 마나가 움직였다.
촤아아아악!
그리고, 마물이 위로 떠 올랐다.
나를 태우고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안개 위로 마물이 떠 올랐다.
점점 높아지는 고도, 아래로 안개가 덮인 공동묘지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꺄아아악.
내가 아래를 보는 사이, 머리 위에서 마물들의 괴성이 들려왔다.
멀리 하늘을 맴돌던 마물들이 우리를 보게 된 것이었다.
마물들은 우리를 보자마자 아래로 내려꽂혔다.
마물들은 언데드 마물이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안 모양이었다.
피막 달린 날개를 접고, 엄청난 속도로 아래로 쏘아지는 마물들.
한두 마리가 아니어서, 언데드 마물이나 평범한 기사라면 막기 어려울 것 같았다.
다만, 나는 평범한 기사가 아니었다.
내게는 하늘을 나는 마물들을 상대할 만한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쏘아져 오는 마물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촤악! 촤악!
빛의 선들이 검에서 튀어 나가 전방을 휩쓸었다.
‘마나 유영화’로 만들어진 마나의 선이었다.
기습이 아니라면, 기사 정도면 피하거나 막을 수 있는 공격이었지만, 여기는 지상이 아니었다.
평범한 날짐승 이상으로 움직임이 좋은 마물들이었지만, 땅 위의 기사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끼이익! 쿠엑!
마물들은 상처를 입고, 뒤로 물러섰다.
마물 중 일부는 피를 뿌리며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실제로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는 약한 공격이라, 마물들을 죽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인간을 보고 눈이 돌아간 마물들을 정신 차리게 하기는 충분했다.
마물들은 계속 위로 올라가는 우리를 따라오지 않았다.
한참을 올라오자, 협곡 주위의 산보다 높은 하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눈이 덮인 산들과 서쪽으로 쭉 이어진 산맥.
산맥을 보니, 이곳이 어디인지 알 것 같았다.
봉인지의 서쪽. 북부 산맥과 이어진 곳이었다.
정상의 눈과 그 아래 펼쳐진 푸른 숲을 보니, 아래쪽 협곡의 죽은 안개가 더욱 비교되었다.
사기로 가득 채워진 죽음의 협곡.
북부 산맥과 이어진 봉인지에 이런 협곡이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모를 터였다.
나는 협곡 위치를 기억하고, 서쪽으로 언데드 마물을 몰았다.
“가자! 용개.”
용을 닮은 펫이라서 그런지 바로 이름이 생각나서 붙여주었다.
용개는 별로 마음이 들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어차피 이 모습을 하고 있을 때만 쓸 이름이었다.
나는 용개를 타고 산맥 위를 날았다.
산맥의 나무와 달리는 마물들이 점처럼 보였다.
구름이 가까워 보이고, 멀리 지평선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대단한 경치였지만, 이렇게 나는 것은 전생에 본 소설처럼 멋진 기분은 아니었다.
영하의 추위와 사람을 날려 보낼 듯한 바람이 꽤나 힘들게 했다.
맨몸으로 날짐승을 타고 이렇게 높이 나는 것은 비행기를 탄 것과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제대로 된 안장도 없이 다리 힘으로 버티는 것도, 가벼운 옷 하나로 추위를 버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각성한 몸과 강력한 육체 덕에 나는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마물이 이렇게 많았나?”
북부 산맥을 따라 날아가면서 본 산맥의 모습은 예상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수많은 마물이 서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전에 있었던 마물들의 웨이브 때처럼 수많은 마물이 봉인지에서 빠져나와 산맥을 달리고 있었다.
다만, 지금 보는 마물들의 이동은 웨이브로 불리기에는 너무 광범위했다. 서쪽으로 날아가며 보게 된, 지상의 모습은 시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다, 마물들은 산맥으로만 달리지 않았다.
산맥을 달리던 마물들은 남쪽과 북쪽의 평야로도 쏟아지고 있었다.
‘설마, 전에 들었던 마물들의 폭주인가?’
나는 용개의 속도를 더 올렸다.
이 언데드가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지만, 서둘러야 했다.
우리 왕국이, 내 영지가 걱정되었다.
* * *
산맥이 뚝 끊어진 좁은 협곡.
한 떼의 기사들이 협곡을 막아선 채로 마물들과 싸우고 있었다.
기사들은 피를 뒤집어쓴 채로, 덤벼오는 마물들을 쓰러뜨리고, 밀어내고 있었다.
기사들 가운데, 나이가 지긋한 남자가 마물들을 쓰러뜨리며 기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지친 기사는 뒤로 물러서!”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열심히 고함을 질렀지만, 기사들은 그의 명령을 잘 따르지 못했다.
“기사 중에 안 지친 놈은 없는 것 같은데요.”
대신, 옆에 있는 기사가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좀 더 버텨! 이번 웨이브는 곧 끝난다.”
기사들은 자신들의 대장이자, 요새의 장군인 바도르 장군의 명령에 이를 악물었다.
다행히 장군의 말대로 마물들의 웨이브는 금방 끝이 났다.
일부는 직접 쓰러뜨리고 나머지 마물들은 반대편 산맥으로 넘긴 기사들은 지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기사들을 지휘하던 장군도 지친 얼굴로 투구를 벗었다.
그는 옆의 기사에게 물었다.
“몇 번째 웨이브였지?”
“네 번째였습니다.”
“일주일에 네 번이라. 여태 이런 적은 없었는데.”
“웨이브라고 하기에는 간격이 너무 짧습니다. 그냥 봉인지의 마물들이 밀려 내려오는 게 아닌지…….”
부하 기사의 말에 장군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여기서 물러설 수도 없는데…….”
전과 달리, 협곡 북쪽의 제국 요새가 단단히 마물들을 막고 있었다.
소로카 요새로 물러서면 마물들은 왕국 쪽으로 쏟아져 내려올 게 분명했다.
하지만, 기사들도, 자신도 이제 한계였다.
여기서 기사들이 쓰러지면, 왕국만이 아니라 소로카 요새도 위험했다.
이제는 슬슬 물러서야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장군이 그렇게 결심을 다지고 있을 때, 그의 눈앞에서 허공이 일렁거리더니, 사람이 나타났다.
가죽 갑옷을 입고 있는 젊은 남자.
장군의 아들. 글란이었다.
“정찰을 다녀왔습니다.”
“수고했다.”
장군은 자랑스러운 표정을 감추며 아들의 복귀를 환영했다.
한때는 자신과 어긋나 방황했던 아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능력을 활용해, 누구보다도 대단한 활약을 하는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대답에 글란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마물들이 밀려오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조금 전 마물보다 두 배 이상이 많습니다.”
“이렇게 빨리?”
아들의 말에 장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과거 웨이브와 다르다지만, 이건 너무 빨랐다.
이런 속도라면, 기사단을 물렀다가 뒤를 공격당할 수도 있었다.
우선, 여기서 막아야 했다.
장군은 아들에게 말했다.
“넌, 바로 요새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알려라.”
하지만, 글란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같이 싸우겠습니다.”
아들의 말에 장군은 버럭 화를 내려 했지만.
“하지만, 너는…….”
그는 아들의 표정을 보고, 말을 멈추었다.
아들의 얼굴은 옆에 있는 기사들과 자신의 얼굴과 다르지 않았다.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는, 죽음을 각오한 기사의 얼굴.
그런 이에게 도망치라고 할 수는 없었다.
“네 어미가 슬퍼하겠군.”
“걱정 마십시오. 저는 최대한 살려고 노력해 볼 생각입니다.”
글란은 그 말과 함께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장군은 아들의 말에 피식 웃었다.
“좋아. 누가 오래 살아남나 해 보자고.”
장군의 말에 기사들이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지치고, 힘들었지만, 물러서는 이들은 없었다.
그리고, 멀리서 마물들의 괴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악! 콰악! 케에엑!
여태껏 싸워온 마물 떼와 비교도 안 될 커다란 괴성들이었다.
장군은 괴성이 들려오는 산맥 쪽을 보더니, 신음을 흘렸다.
“설마, 하늘을 나는 마물도 나타난 건가?”
그의 말대로 산맥 위로 커다란 마물이 날아오고 있었다.
넓은 피막을 펼친 하늘을 나는 마물.
봉인지에서 발견된 적은 있었지만, 이곳까지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던 마물이었다.
“설마, 사람이 타고 있는 걸까?”
더구나, 믿기지는 않지만, 마물 위에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장군은 손으로 눈을 누르고 다시 쳐다보았다.
다행히 그건 잘못 본 모양이었다.
마물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한 사람이 그의 앞에 떨어져 내렸다.
쿵!
땅을 푹 꺼트리며 땅에 내려선 사람은 그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은 여왕의 호위 기사이자, 왕국의 귀족. 알렉스 디 샤를 자작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왕국이 자랑하는 기사, 알렉스가 그에게 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