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9화
제14편 버려진 유적 (3)
나는 ‘기사의 검’을 정신공격을 막아 주고, 주위 사람들의 정신을 회복시켜주는 검이라고 알고 있었다.
역대 왕도 그렇게 써왔고, 초대 왕도 다르게 썼다는 이야기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케레스’의 성물에 남겨져 있는 정신공격을 막으면서 이 검의 진정한 능력을 알게 되었다.
아니, 깨어났다고 할까.
이 검은 정신공격을 막는 검이 아니라, 오염된 정신과 영혼을 정화하는 검이었다.
정신공격을 막고, 사람들의 정신을 회복하는 것은 그 능력에 달린 부가적인 능력일 뿐이었다.
하기야, 왕국의 국보인 ‘기사의 검’ 치고는 능력이 별 볼 일이 없어 보였었다.
내가 이런 공격을 받지 않았다면, 깨어나지 않을 능력이었지만, 한번 깨어난 이상, 충분히 사용할 수 있었다.
끼에에에엑!
검에 잘려 나간 해골이 비명을 질렀다.
물론, 해골이 소리를 내지는 못했지만, 머릿속으로 비명이 울렸다.
해골을 움직이는 정신, 혹은 악령의 비명이었다.
대륙의 삼 분의 일을 뒤덮고, 고대 제국을 공포에 질리게 한 해골 기사가 그대로 허물어졌다.
신관의 기억으로는, 부숴도, 박살 내고, 갈아버려도, 끝없이 되살아난다는 해골 기사.
죽음의 기사가 허무하게 쓰러졌다.
사방에서 덤벼오는 해골 기사들에게 나는 열심히 검을 휘둘렀다.
퍽! 푸악! 퍼억!
갈비뼈를 부수고, 다리를 잘라 내고, 목을 베는 그 순간마다, 해골 기사들은 다시 뼈로 돌아갔다.
바닥에 뼈들이 쌓이고, 갑옷이 굴러다녔다.
천 명의 기사와 홀로 싸우기는 불가능했지만, 검에 닿기만 해도 허물어지는 해골 더미 천 개와는 싸울 수 있었다.
다만, 전보다 쉬워졌다고 해도 해골 기사와 싸우는 것은 나로서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쉽게 적을 쓰러뜨릴 수 있게 되었지만, 적의 기사급 검술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쏟아져 들어오는 검을 피하고, 막은 뒤, 차례로 해골 기사들을 격파해 나가는 일은 칼날 위에서 줄타기하는 것 같았다.
공격해 오는 해골 기사들의 수는 끝이 없는 것 같았다.
백을 세고, 이백을 세고, 삼백을 세고.
바닥에 쌓인 뼈에 자리를 여러 번 바꾸고, 상처를 입을 정도로 팔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덤벼드는 해골 기사의 수는 줄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싸우다 보니, 나중에는 내가 싸우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꿈을 꾸고 있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였다.
다만, 끝이 없지는 않았다.
입에서 단내가 나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결국, 나는 덤벼오는 모든 해골 기사들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고, 다른 검을 꺼내 쥐었다.
‘신검’을 쥐자, 피가 멈추고, 상처가 빠르게 치료되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닥 가득 쌓인 뼈들.
나는 그 뼈들을 보며 머리를 두들겼다.
영혼들의 비명이 지금도 머릿속을 울렸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지금 울리는 소리는 환청에 불과했다.
지하 묘지에는 검은 마나도, 영혼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싸우느라 반쯤 허물어진 제단에 걸터앉아 숨을 골랐다.
“이번에는 정말 위험했던 것 같은데…….”
천 구의 해골 기사와 싸운 것도 힘들었지만, 그 전에 이 악신의 신관에게 오염될 뻔했던 것이 훨씬 더 위험했었다.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그런 공격이라니.
‘기사의 검’으로 막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과거로 돌아가는 내 능력으로 막아 낼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당연히 그걸 확인해 볼 생각도 없었고.
갑작스러운 위기에 나는 진이 빠져버렸다.
나는 뼈가 가득 쌓인 광장을 멍하니 쳐다보며 케레스 신관의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기억이 전부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제국 귀족과의 대화는 신관의 기억이 맞았다.
신관은 제국과의 약속만이 아니라, 성물의 힘을 회복시키기 위해 마물과의 싸움에 참여했었다.
그 성물을 조직이 가지고 있었으니, 싸우다가 죽었다는 말이었고, 결국, 화산의 힘으로 여태껏 보호되다가 내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그의 생각대로 성물은 힘을 다시 채워 이 지하의 해골 기사들을 다 깨운 것일 터였고.
내가 중간에 예식을 막아버렸으니, 아직 성물의 힘은 남아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남아 있어 봤자 쓸 수가 없잖아.”
겁이 나서 유물 주머니에서 꺼내지도 못할 정도였다.
큐브에 남아 있는 힘은 전부 사라진 것처럼 보였지만, 차라리, 어딘가에 파묻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다만, 또 어디 쓸데가 있을지 몰라,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이건 타이머가 멈춘 핵폭탄을 가지고 다니는 기분이네.”
나는 한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보니, 조금 전에 광장 전체에 퍼져나갔던 검은 마나가 떠올랐다.
나를 변화시키려 했던 검은 마나는 짐승들을 마물로 바꾸었던 오염된 마나와 어딘가 비슷해 보였다.
그리고, 검은 마나로 움직이는 해골 기사들은 마물로 변한 짐승들과 닮아 보였다.
‘뭔가 연관이 있을까?’
그런 의심이 들었지만, 뭔가 확정을 짓기에는 아직 정보가 부족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기사의 검을 들어, 제단을 후려쳤다.
콰아아앙!
반쯤 남아 있던 제단이 박살 났다.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조각상도 부숴버렸다.
콰직.
여러 조각으로 박살 난 조각상이 바닥을 구르는 것을 확인한 뒤에 나는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악신과 악령이라니.
갑작스러운 싸움으로 그동안 떠올리지 못했지만, 정말, 내게는 정말 황당한 이야기였다.
죽으면 회귀하는 내 능력 때문이라도, 영혼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악령으로 움직이는 해골들과 싸울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거기다, 유물의 능력과 인간의 능력은 전부 신의 사제들의 능력을 연구해서 만들어 낸 것이라니.
직접 듣지 않았다면,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악령도 있고, 신이 내려준 능력도 있다라…….’
설마, 정말 신도 있는 걸까?
신을 믿지 않는 성기사인 나에게는 무척 중요한 문제였다.
나는 힐끗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셀린 여신이 보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여신이 진짜 보고 있다면, 아침 기도 정도는 하는 게 좋을지도 몰랐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도대체 양파도 아니고, 이 세계는 까도 까도 숨겨진 이야기가 계속 나왔다.
이러다가, 이곳이 지구의 먼 미래던가, 아틀란티스 대륙이라던가, 외계인이 나오던가 같은 일이 나올지도 몰랐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그런 생각들을 털어버렸다.
괜한 망상에 빠질 때가 아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빨리, 돌아가야 했다.
다행히 밖으로 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거대한 광장 끝에는 커다란 문이 있었다. 튼튼한 철문이었지만, 다행히 내 힘으로도 열 수 있었다.
철문을 여니,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왔다.
도대체 이런 계단을 몇 번이나 다니는 것인지…….
나는 작게 푸념하고는 계단을 올랐다.
그리 길지 않은 계단 끝에는 닫힌 천장이 있었다.
돌로 막힌 천장이었다.
다행히 이번에도 힘으로 열 수 있었다.
드드드득.
돌로 만든 천장을 밀자, 계단으로 빛이 들어왔다.
반쯤 열고, 밖으로 나가자,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신관 기억의 마지막에 보았던 거대한 공동묘지였다.
내가 지금 나온 곳도 묘지 중 한 곳. 커다란 석관이 있는 곳이었다.
석관은 지금도 반쯤 밀려나 있었다.
지형이 바뀐 것일까, 아니면 제대로 보여주지 않을 걸까.
거대한 묘지는 내가 본 것과 조금 달랐다.
묘지가 있는 곳은 커다란 협곡이었다.
눅눅한 습기와 안개가 가득한 그런 협곡.
안개로 멀리까지 보이지 않고, 바닥은 썩어 철퍽거렸다.
거기다, 공기 중에는 시체에서 나온 사취가 가득 담겨 있었다.
어디에도 살아 있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이 거대한 묘지가 있는 협곡은 죽어 있었다.
아마도, 이 협곡은 공동묘지가 만들어지고, 오랜 시간이 지나 이런 죽은 협곡이 된 모양이었다.
캬가가가가가.
지상은 모두 죽어 있었지만, 하늘은 그렇지 않았다.
머리 위, 높은 하늘에 날아다니는 생명체들이 보였다.
거대한 피막을 펼친, 날아다니는 마물들.
오염된 마나로 변형이 된 마물들이 아닌, 다른 세계의 마물들. 봉인지의 마물들이었다.
“봉인지였나.”
내가 본 기억대로라면, 이 묘지들은 고대 제국의 묘지들일 터였다.
그렇다면, 이곳은 멸망한 고대 제국의 수도 근처인 봉인지일 터였다.
이제 대충 어디인 줄은 알게 되었지만, 알았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이 봉인지라면, 문제가 해결되긴커녕 더 커진 것일 수도 있었다.
봉인지만 해도 웬만한 왕국만 한 크기였다.
그 안에 마물이 가득했고, 마물 왕까지 있었다.
지금은 방향도 모르고 있으니, 영지에 어떻게 돌아갈지 막막할 뿐이었다.
“높은 나무라도 있으면, 방향을 알 수 있을 텐데.”
시독 때문에 협곡에는 멀쩡한 나무도 보이지 않았다.
부러져 죽은 나뭇가지들만 간간이 보일 뿐이었다.
결국, 협곡을 나가, 산을 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구름이 걸려 있는 산을 보며 한숨을 내쉰 나는 머리 위에 맴돌고 있는 마물들을 보며 투덜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하늘을 나는 능력이나 찾아다니는 건데.”
물론, 하늘을 나는 능력자나 유물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지만, 지금이라면 다른 능력하고 바꾸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하늘을 보고 있자, 하늘을 나는 마물 가운데 움직임이 달라지는 놈이 보였다.
“눈이 좋네. 지상에 있는 나를 본 건가?”
그 모습을 보고 내가 감탄을 하는 사이, 마물은 피막이 달린 날개를 접고 아래로 쏘아져 내려왔다.
마치, 다이빙을 하는 것처럼 나를 향해 내리꽂는 것이었다.
“내가 먹이로 보인 건가?”
하기야, 움직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협곡에서 혼자 움직이고 있으니, 알아차릴 만도 했다.
이런 죽은 협곡이니, 먹을 것도 찾기 어려웠을 터.
“그런데, 마물도 똑같이 사냥했었나?”
인간을 공격하는 것은 먹기 위한 것이 아니어서, 주위에 인간이 없는 마물의 생활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마물을 인간의 적으로 생각하는 바람에 사람들은 마물의 생활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고.
어느 정도 다가오자, 마물의 자세한 모습을 알 수 있었다.
털이 없는 붉은 피부와 새를 닮은 부리, 그리고, 피막이 덮인 날개.
마물은 날개 달린 도마뱀이나 하늘을 나는 익룡과 비슷했다.
전생에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저 마물을 보고 ‘와이번’이라고 했을 것 같았다.
마물은 아래로 내려오다가, 나를 보고 다시금 괴성을 질렀다.
카아아아악.
인간인 것을 이제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물론, 인간인 것을 알아차린 것으로 움직임이 달라지지 않았다.
마물은 더 빨리, 쏘아져 내려올 뿐이었다.
점점 빨라지는 속도.
지상에 가까이 오자, 속도가 수백 킬로는 되어 보였다.
아마도 마물은 마나로 덮인 튼튼한 몸을 믿고 저렇게 낙하하는 것 같았다.
다만, 아쉽게도 마물의 먹잇감은 나였다.
콰아아아앙!
마물은 나를 깔아뭉개지도, 낚아채지도 못하고, 목이 반쯤 베어진 채로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목이 베어진 채로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마물은 금방 숨이 멈추었다.
나는 바닥에 쓰러진 마물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머지 마물들의 움직임도 이상한 것이, 앞으로도 피곤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스르르르르.
그때. 황당하게도 쓰러진 마물의 몸에 검은 연기가 스며드는 게 보였다.
그 연기는 내 가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시 보니, 연기가 아니었다. 검은 마나였다.
놀라서, 검을 치켜들고, 다른 손으로 큐브를 꺼내려 했지만, 마물의 시체가 눈을 뜨는 게 먼저였다.
크르르릉.
마물은 몸을 일으켰고, 나는 다시 한번 마물의 목을 자르려 했다.
하지만, 마물은 내게 덤벼들지 않았다.
마물 시체는 몸을 일으킨 뒤에, 나를 향해 반쯤 잘린 목을 숙였다.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행동이었다.
저건 내게 복종하겠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