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8화
제13편 버려진 유적 (2)
갑작스러운 변화에 나는 구슬과 단도를 번갈아 쥐며 물었다.
“왜 이러는 거지? 뭔가 아는 것 없어?”
하지만, 에고 구슬도 단도도 대답은 없었다.
대신, 손에 들린 검은 큐브에서 흘러나오는 마나가 더욱 짙어졌다.
푸아아악.
뭔가 할 사이도 없이 검은 마나가 내 몸을 덮었고,
딸깍.
세상이 어두워졌다.
* * *
어두워진 후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얼마 뒤에 세상이 밝아졌다.
다시 밝아진 세상.
나는 낡은 오두막 안에 있었다.
나는 낡은 나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낡은 의자에 앉아 반대편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대편에 앉아 있는 남자는 오두막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고풍스럽고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역시 황실에서 나온 고위 귀족다웠다.
그의 양옆에는 처음 보는 복식의 기사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황실 기사들이었다.
콜록, 콜록.
나는 언제나처럼 잔기침을 흘리고, 앞에 앉은 남자를 비웃어주었다.
“제국은 정말 추하군. 제국이 멸망할 지경이 되었다지만, 그토록 탄압하던 나와 내 신에게 손을 벌리다니…….”
내 입에서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늙고 지친 늙은이의 목소리였다.
내 말에 황실에서 온 귀족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대답했다.
“황실을 모독하지 마시오. 신의 이름으로 그대들이 스스로 맹세한 약속을 지킬 때가 되었을 뿐이오. 신관의 명맥을 끊는 대신에 제국의 요청을 들어주기로 한 약속 말이오.”
콜록.
나는 다시 마른기침을 토해낸 뒤에 그의 말에 반박했다.
“……흥, 나를 죽이지 않은 것도, 신전을 숨겨놓은 것도 네놈들이 신의 힘을 연구하고 빼앗기 위해서가 아닌가.”
틀린 말이 아니었는지, 귀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이제야 어떻게 된 것인지 알게 되었다.
지금 내가 보고 느끼는 이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나는 다른 이에게 빙의한 것이었다.
전에도 한 번 경험한 적이 있었다.
‘기사의 검’을 잡았을 때, 나는 대전쟁 때의 카를로스 용사에게 빙의해서 그의 기억을 경험했었다.
이번에도 같은 경우인 듯했다.
아마도, 손에 들고 있는 육면체 유물이 과거의 기억을 불러온 것일 터.
내가 빙의한 이는 그 유물과 관련이 있는 사람일 게 분명했다.
지금 보는 광경도, 그가 경험한 과거의 일일 테고.
내가 앞에 앉은 귀족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것도 빙의한 사람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내가 보고 있는 이 광경은 대전쟁 때의 기억. 아직 고대 제국이 멸망하기 전의 기억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기억을 경험하기로 했다.
“제국이 이렇게 멸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야. 신의 힘을 물건에 담더니, 이제는 그 힘을 인간에게 넣어버리다니.”
내가 빙의한 노인은 신랄한 어조로 제국을 꾸짖었다.
“너희는 언제까지 신께서 제국의 방자함을 용서하실 거로 생각했느냐. 너희는 너희 죄에 파묻혀 멸망하는 것이다.”
늙고, 지쳤지만, 확실히 그는 신의 종이었다.
그가 하는 말은 신이 그의 입을 빌려 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제국의 귀족은 그의 말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 아니 늙은 신관은 귀족의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귀족의 손가락에는 반지가 여러 개 껴 있었다.
전부 신의 힘을 담은 반지들이었다.
그중에 그의 능력을 막는 반지도 있었을 게 분명했다.
하긴, 평범한 인간인 귀족이 맨몸으로 그를 찾아왔을 리가 없었다.
귀족은 다시 말을 반복했다.
“미안하지만 아직 제국은 멸망하지 않았소. ‘무덤지기’는 약속을 지키시오.”
귀족의 말에 신관은 코웃음을 쳤다.
“약속이었으니,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이 비루한 이를 데려다가 뭐에 쓰려고…….”
노인의 말에 귀족은 눈썹을 찌푸렸다.
“과거 대륙의 삼 분의 일을 지옥으로 만들었던 악신의 신관이 할 말은 아닐 텐데.”
귀족의 말에 노인은 크게 웃었다.
“카카카카카, 쿨럭. 쿨럭.”
늙은 신관은 너무 웃다가 기침까지 터져 나와 한참을 콜록대더니, 겨우 웃음을 멈추었다.
그는 비웃음을 가득 담은 어조로 귀족에게 말했다.
“그거야, 신이 준비해주신 힘을 모두 썼을 때 이야기고. 아쉽게도 제국과 한 약속은 대대로 ‘무덤지기’에게만 내려온 약속일 뿐이니까.”
제국과의 약속은 신과 맺은 약속이 아니라, 신관인 개인이 맺은 약속일 뿐이었다.
대륙에 펼쳐 보였던 신의 은혜는 이런 약속 따위로 행할 수 없었다.
노인은 제국과 제국이 보낸 귀족을 신나게 비웃었다.
“그 약속은 무덤지기인 나만 움직일 수 있는 약속일 뿐이지.”
귀족도, 귀족의 호위 기사들도 그의 비웃음에 화를 내지 않았다.
귀족은 쓴 물을 들이켠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별로 기대하지 말라던 말이 이런 뜻이었군. 그래도 별수 없지. 당신, 개인의 힘도 약한 것이 아니니까.”
신관으로 불리지 않아도, ‘무덤지기’는 약하지 않았다.
물론 대륙을 휩쓴 신의 종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무덤지기’라는 이름이 그냥 붙은 게 아니었다.
“아쉽지만, 당신 말대로 지금 제국은 모든 힘을 다 모아야 하오. 짐을 정리하고 바로 나오시오.”
그 말을 끝으로 귀족은 기사들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
귀족과 기사들이 밖으로 나가자,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아래에 숨겨놓은 물건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꺼낸 물건은 검은 육면체 큐브였다.
신의 힘이 담긴 성물.
이 큐브는 제국이 만든, 인간이 능력을 심은 물건이 아니었다.
신이 직접 내려주신 성물이었다.
그는 성물을 품에 넣었다.
“드디어 케레스 님의 뜻을 이룰 때가 되었군.”
그는 성물을 품에 넣으며 홀로 말을 이었다.
“케레스 님의 힘을 쓰지 않는 게 아니라, 쓰지 못하는 거였지. 오래전 싸움으로 성물의 힘이 다 소진되었거든. 오랜 시간 성물의 힘을 채워왔지만, 아직 많이 부족했는데……. 이번에 다 채울 수 있겠군.”
아무도 없는 오두막 한가운데서 그는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는 것처럼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돌아오지 못하겠지만, 다음 대 신관이 세워지면 신의 뜻을 이룰 수 있겠지.”
그는 거기까지 말을 하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렇지 않나? 다음 대 종이여?”
어느새 나는 그의 몸에서 튕겨 나와 있었다.
유령처럼 서 있던 나에게 그가 말을 걸고 있었다.
오래전 기억을 보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오두막이 허물어졌다.
오두막이 사라지자 눈앞에 돌비석이 가득한 평야가 펼쳐졌다.
거대한 공동묘지였다.
그 공동묘지에 노인과 내가 서 있었다.
이렇게 앞에 두고 보니, 노인은 지하 유적에서 보았던 조각상과 닮아 있었다.
로브를 뒤집어쓴 곧 죽을 것처럼 보이는 뼈다귀만 남은 노인.
“생각보다 훨씬 좋은 종이 선택된 것 같아. 내 헌신이 보답을 받은 것 같아 기쁘군.”
그는 똑바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빙의를 벗어난 순간, 나도 말을 할 수 있었다.
“나를 보고 인식할 수 있어? 그럼, 이건 기억이 아닌 건가?”
내 질문에 그가 대답했다.
“일종의 사념이라고 할까. 성물에 남긴 내 인사라고 해두지. 곧 사라질 인격에게 하는 마지막 인사라고 해도 되고.”
늙은 신관의 말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지금은 내가 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지금이 가장 취약한 순간일지도 몰랐다.
내 물음에 그가 다시 대답했다.
“나는 케레스 님의 마지막 사도이니 내가 죽으면 케레스 님의 뜻을 이어받을 사도는 없어지게 되는 거지. 그래서 나는 성물에 내 뜻을 남겨 두었어.”
“알맞은 이가 성물을 이어받으면, 그는 케레스 님의 믿음과 사명을 따르는 사도가 되게 만든 걸세.”
“설마, 세뇌?”
“비슷하긴 하지만, 인격의 전환에 가까울 걸세. 기억과 능력을 이어받은 케레스의 사도가 되는 거지.”
“설마, 이렇게 말을 늘어놓는 것도…….”
“맞네. 시간을 버는 거지. 곧 전환이 끝날 걸세.”
그의 말을 끝으로 내 몸이 점점 희미해졌다.
세상도 어두워지고, 내 앞에 기괴하게 웃고 있는 악신의 사도만 보일 뿐이었다.
* * *
얼마 전 알렉스가 정신을 잃었던 석관이 늘어서 있는 거대한 지하 홀은 전과 달라져 있었다.
알렉스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들썩거리던 석관의 덮개는 모두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 많은 석관이 모두 활짝 열려버린 것이다.
그리고, 활짝 열린 석관은 하나같이 모두 비어 있었다.
석관에 있던 시체 아니 뼈만 남은 사체는 석관에 누워있는 대신, 제단 앞에 서 있었다.
고대 갑옷을 입은 천이 넘는 해골들이 뼈로 만든 제단 앞에 열을 맞춰 서 있었다.
해골들은 마치 살아있는 사람들처럼 제단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신께 기도를 드리는 기사인 것처럼, 제사를 지내는 사제처럼. 해골들은 제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단 뒤 조각상의 손에는 육면체 유물.
성물이 올려져 있었다.
성물은 조각상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마치 원래부터 그곳에 있어야 할 물건 같았다.
유물에서는 검은 기운이 흘러나와 제단을 가득 메우고, 광장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검은 연기는 제단 앞에 서 있는 해골들의 몸에 흡수되고 있었다.
해골들의 몸에 연기가 흡수될수록, 해골들의 뼈가 반짝였다.
딱딱하던 행동이 부드러워지고, 점점 더 살아있는 인간처럼 움직였다.
잠시 뒤, 검은 연기가 감싸고 있던 제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뼈로 만든 제단 위에는 알렉스가 누워있었다.
검을 가슴 위에 올린 그는 마치 잠든 것처럼 보였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사과를 먹은 백설 공주처럼.
그는 뼈로 쌓은 제단 위에 조용히 누워있었다.
이윽고, 제단을 감싸던 검은 연기가 그의 몸속에 전부 빨려들자, 알렉스가 눈을 떴다.
그의 눈은 전과 달라져 있었다.
붉게 변한 눈동자가 어두운 광장 안에 홀로 번뜩였다.
그의 표정도 전과 달랐다. 어딘가 음침해 보이는 표정으로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뼈로 만든 제단과 조각상 위의 성물을 확인하고, 제단 앞에 늘어선 해골 기사들을 보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한 손에 검을 들고, 조각상 손 위에 올려진 성물을 잡았다.
부르르르르르.
성물이 부르르르 떨려왔지만, 알렉스는 개의치 않고 성물을 끄집어내렸다.
그리고 그는 성물을 가슴팍 속 유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성물에서 퍼져 나오던 검은 연기가 뚝 끊어졌다.
연기가 사라지자 차분히 늘어서 있던 해골 기사들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알렉스의 눈이 점차 원래 색으로 돌아갔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와, 정말 큰일 날 뻔했네.”
정말 아슬아슬했다. 까닥했으면 먹힐 뻔했다.
나는 내 손에 들린 환하게 빛나는 검을 쳐다보았다.
이 ‘기사의 검’이 아니었으면 악신의 신관이 되어버렸을 터였다.
정말 무시무시한 성물이자 능력이었다.
내 ‘마나 감응력’과 ‘기사의 검’을 가지고도 겨우 막아내는데 급급한 능력.
둘 중의 하나만 없었더라도 막아내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막지 못했으면, 정말 큰일 날뻔했다.
내가 신관이 되어버린다는 말은, 대륙의 삼 분의 일을 박살 낸 악신의 신관이 되살아난다는 소리였다.
옛날 대륙의 삼 분의 일을 박살 낸 것은 악신의 기사들이었다.
생전보다 훨씬 강해진, 죽여도 죽지 않는 악신의 기사들.
바로 내 앞에 늘어서 있는 해골들이었다.
다행히 도중에 막아냈기에 망정이지, 제대로 끝났으면 마왕이 아니라 내가 대륙을 파괴한 것이 되어버릴 수도 있었다.
철컥. 철컥. 철컥.
혼란스러워하던 해골 기사들이 검을 빼 들고 있었다.
나를 공격할 모양이었다.
예식이 취소되고, 내가 저들의 신관이 되지 못했으니, 해골들이 나를 적대하는 게 당연했다.
지금도 기사급은 되어 보이는 천명의 군세.
내가 쓸 수 있으면 정말 유용하겠지만, 아쉽지 않았다.
저들을 쓸 수 있는 것은 죽음의 사제밖에 없었다.
앞으로도 수많은 생명을 쌓아야 움직일 수 있는 악신의 수족.
저들을 써먹으려면 영지와 왕국의 백성을 모두 재물로 써야 했다.
아쉽지는 않지만,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지금 천명의 기사가 분노한 채로 나를 포위했다는 점이었다.
저들을 밖으로 보낼 수도 없고, 당장 출구도 보이지 않으니 싸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실력에 자신이 있기는 했지만, 솔직히 천명의 기사와 싸우기는 힘들었다.
더구나, 저들은 죽진 않는 기사.
내가 이번에 새로 얻은 게 없었다면, 죽은 뒤에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다가오는 해골 기사들을 보고, 나는 ‘기사의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부우우우웅.
검이 환하게 빛났다.
전과 다른 성스러운 빛.
다가오던 해골들이 뒤로 주춤 물러서게 만드는 빛이었다.
나는 검을 들고, 해골 기사들에게 달려들었다.
번쩍.
기사의 검.
아니 ‘정화의 성검’이 광장 전체에 빛을 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