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천재는 무한리셋 중-387화 (387/563)

제387화

제12편 버려진 유적 (1)

조아나의 말대로 절벽은 무척이나 높았다.

절벽을 타고 쭉쭉 올라가는데도 아직 끝이 보이지 않았다.

아래에서는 마물 왕의 괴성이 들려오고, 하늘은 화산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퍼져나가고 있었다.

마치 세상이 멸망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위만 쳐다보며 열심히 절벽을 올랐다.

로프도 도와주는 사람도 없는 프리 솔로 등반이었지만, 나는 환경 파괴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고, 단도를 암벽에 박아 넣으며 계속 위로 올라갔다.

그렇게 계속 오르니, 결국, 절벽 위에 오를 수 있었다.

절벽 위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은 화산에서 이어진 작은 돌산이었다.

쿠루루루룽.

여기서 보니, 눈앞에서 화산이 분화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제는 화산에서 검은 연기 이외에도 용암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기다, 붉게 달아오른 화산탄들이 사방으로 날아가고, 화산 아래 숲도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섬 전체가 불타고 있었다.

불타고 있는 것은 성전도 마찬가지였다.

고대 제국 황실 별장은 온통 불바다로 변해 있었다.

성벽은 이미 반 이상 허물어져 있었고, 아름다운 붉은 꽃밭은 불길이 일렁이는 불의 정원으로 변해 있었다.

그 불길 속에 많은 마물이 갇혀서 죽어 가고 있었다.

꽃밭에 마물들이 저렇게 갇혀 있는 것을 보면, 꽃밭에 숨겨져 있던 유물들이 발동된 듯했다.

불길 속에서 도마뱀, 아니 날개 없는 드래곤처럼 생긴 마물 왕이 열심히 중앙 건물을 부수고 있었다.

마물 왕이 집요하게 건물을 부수는 모습은 마치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보였다.

절벽 위 농구장 크기의 바위에는 조아나의 말대로 원형의 문양.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아직도, 문양이 빛나고 있는 것을 보니, 이런 상황에서도 이 공간 이동진은 잘 가동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이런 상황이니 잘 가동되는 것이려나.

나는 구슬을 꺼내 이 공간 이동진에 대해 물어보았다.

“공간 이동진 맞지?”

[비상용 황실 별장 부속 공간 이동진입니다. 마나 사용량이 많아, 평상시에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축적한 마나로 가동하거나, 유적을 폭주시켜야 합니다.]

나는 불을 뿜고 있는 화산을 보았다.

이번에는 축적한 마나가 아니라 유적을 폭주시킨 것이었다.

“목적지는 어딘지 알 수 없나?”

[네. 정식 사용자가 아니라서 거기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목적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차피 교단과 관계가 있을 곳일 터였다.

이곳 성전에서 했던 것처럼 하면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그럼 이제 한 가지 확인만 하면 되었다.

조아나가 공간 이동을 하기 전에 남긴 말.

“이 공간 이동진에 공간 이동 말고 다른 기능이 있나?”

[정신 관련 능력이 추가로 부가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폭주한 마나로 인해 능력이 변형되었습니다.]

정확히 무슨 능력인지는 알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조아나가 말한 ‘계약’과 에고가 말한 ‘정신 관련 능력’이라는 말로, 무슨 능력인지는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능력을 무효로 만들 방법도 가지고 있었다.

당장 여왕이 귀찮아지겠지만, 장식으로 걸려 있는 것보다는 당장 필요한 내가 쓰는 게 나았다.

나는 신검과 대검을 유물 주머니에 집어넣고, 빈손으로 작게 말했다.

“소환, 기사의 검.”

오래 떨어져 있었고 먼 곳에 있지만, 검은 내 부름에 답했다.

부웅.

카를로스 왕국의 국보.

‘기사의 검’이 내 손 안에 소환되었다.

나는 소환된 검을 들고, 문양 안으로 들어갔다.

[공간 이동진 안에 이동 대상자가 들어왔습니다. 공간 이동을 하겠습니다. 대상자에게 강제 계약이 진행됩니다. 계약 내용은 섬에서의 기억 봉인입니다.]

계약은 내 예상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머릿속에 마나가 쏟아져 들어왔다.

내가 허락도 안 했는데, 강제로 계약이 진행되려 했다.

기억이 잠기고, 여기서 있었던 일들이 점점 머릿속에서 지워져 갔다.

나는 ‘기사의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정신 공격을 막아 내는 카를로스 왕국의 국보가 환하게 빛을 뿌렸다.

쨍그랑.

검이 빛을 뿌리자, 계약이 깨져나갔다.

기억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성전에서 있었던 일과 마물과 싸우던 기억.

그리고, 마물 왕들까지.

“잠깐……. 좀비 놈은 어디 있는 거지?”

조금 전, 불타고 있는 도마뱀 인간들과 도마뱀 마물 왕은 보았지만, 좀비 마물 왕은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주위를 다 살폈었다.

보지 않은 곳이라면, 내가 올라온 절벽밖에 없었다.

그럼, 설마…….

쿵.

그 순간, 절벽 위로 거대한 손이 불쑥 올라왔다.

반쯤 허물어져서 뼈가 보이는 손.

하지만, 허물어지는 그 순간에도 다시 근육과 살이 복귀되는 괴물의 손이 절벽 끝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손 뒤로 거대하고 낡은 투구가 솟아올랐다.

투구 안에는 분노에 찬 커다란 눈과 허물어지는 코와 입이 있었다.

좀비 거인이 여기까지 쫓아온 것이었다.

“미친놈이…….”

절로 욕이 터져 나왔다.

나 하나를 쫓기 위해 이 절벽을 기어 올라오다니.

도대체 내가 뭘 했다고 이렇게 죽으라고 쫓아오는지…….

그냥 서로 열심히 싸우다가 자기가 지쳐서 물러간 것일 뿐이었는데.

그걸 앙심을 품다니. 놈은 마물 왕답지 않게 무척이나 쪼잔했다.

하지만, 놈은 너무 늦었다.

이미, 공간 이동진은 발동한 뒤였다.

나는 흐려지는 마물 왕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마물 왕도 내 인사에 대답하려는 지, 힘차게 주먹을 휘둘렀다.

불타는 화산을 배경으로 좀비 거인이 나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은 덜컥 겁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주먹이 나를 내려치기 전, 세상이 검게 변했다.

공간 이동이 된 것이다.

화아악.

다시 세상이 밝아지자,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봐야 했다.

도착한 곳은 내 예상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다.

교단의 기사들이 주변을 지키고 있지도 않았고, 아름다운 예배당이 나를 반기지도 않았다.

더구나, 먼저 떠난 황자와 조아나, 엘레나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도착한 곳은 사방이 꽉 막혀 있는 낡고 황량한 유적이었다.

유적은 어디에도 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바닥에 그려진 문양에 마지막 빛이 사라지자, 유적은 어둠에 잠겼다.

그리고,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손에 쥐고 있던 구슬 에고가 내게 알려 주었다.

[공간 이동에 오류가 있었습니다. 공간 이동 도중에 충격이 발생해서 도착 지점이 다시 지정되었습니다.]

맙소사.

좀비 거인의 공격은 쓸데없는 공격이 아니었다.

구슬 에고의 말에 따르면, 마물 왕의 마지막 공격이 공간 이동에 충격을 줬다는 소리였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려나.

공간 이동 뒤에 바위 사이에 끼인 것도, 바닷속으로 이동된 것도 아니었다.

정해진 장소가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문양이 있는 곳에 도착한 것이다.

다만, 문제는 이곳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여긴 어디지?”

구슬의 에고도 내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구슬 에고가 알지 못하는 곳이라는 말이었다.

나는 낡은 유적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작위를 받은 뒤에 유적을 찾아보려 했던 것이 이렇게 이뤄진 건가.”

영지를 관리하는데 쫓겨서 좀처럼 시간을 내지 못한 것을 보고, 셀린 여신이 유적으로 나를 보내 준 것인지도 몰랐다.

더구나, 유물 주머니에 식량과 숙영 장비도 충분히 있으니, 한참 동안은 잠자리도 배고플 걱정도 없었다.

영지도 오헨 기사와 발레아에게 잘 맡겼고, 교단과 조직도 싸움을 붙여놓았으니, 크게 걱정할 일은 없었다.

“……라고, 긍정적으로 열심히 생각해 보아도, 막막한 것은 어쩔 수 없네.”

다른 것보다, 이 유적이 어디에 있고, 무슨 유적인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저장 시점이 너무 오래전이라 함부로 죽기도 힘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섬에 도착했을 때 저장했을 텐데.

과거로 돌아갈 수 있어도, 역시 선택에 관한 문제는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답답함을 큰 숨과 함께 털어 버리고, 유적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중앙에 문양이 그려진 이곳은 공간 이동을 위한 방이었다.

특별한 물건이나 특이한 그림도 없어 걱정되었지만, 다행히 한쪽에 문이 있었다.

당장은 갇힐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오래 방치된 문이었지만, 문은 쉽게 열렸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자, 나는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예상외의 광경이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엄청나게 넓은 광장에 (사방이 꽉 막힌 것을 보니, 지하 광장일 가능성이 컸다) 돌관이 가득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수백, 아니 천이 넘어 보이는 돌관 끝에는 제단과 조각상이 있었다.

이곳은 일종의 묘지 같았다.

뜬금없이 날아온 유적은 아무래도 고대 제국 때의 공동묘지인 모양이었다.

공동묘지라니.

나는 조금 실망했다.

뭔가 기연 같은 곳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현실은 달랐다.

나는 돌관 사이를 지나 제단 앞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니, 제단과 조각상은 무시무시했다.

제단은 평범한 돌이 아니라, 뼈 무더기를 쌓아 만든 것처럼 보였다.

그 뒤에 서 있는 조각상도 평범한 조각상이 아니었다.

로브를 눌러쓴 허리가 굽은 남자의 조각상이었다.

손바닥을 위쪽으로 한 채로 한쪽 손을 내민 조각상이었는데, 내민 손은 얼마나 얇은지 뼈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손 위에 무언가 올려놓았던 것처럼 보이는 조각상.

제단의 위치나 분위기를 봐도 이 조각상은 신전의 신상처럼 보였지만, 이 조각상은 아무리 봐도 신성함 같은 것은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았다.

“악신 같은 걸까?”

묘지에 걸맞은 무시무시한 제단과 조각상이었지만, 이건 또 제국의 묘지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 순간.

부르르르.

유물 주머니가 떨렸다.

유물 주머니에 있는 뭔가가 이곳에 반응한 모양이었다.

나는 유물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유물 주머니에 있던 물건 하나가 손에 잡혔다.

나는 손을 꺼내 보았다.

내 손에는 검은 큐브가 들려있었다.

검은 육면체 유물.

유물에서 검은 마나가 피어올랐다.

동시에.

그그그긍.

묘지에 있던 석관들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 * *

유적에서 내가 석상을 보고 있을 때, 카를로스 왕궁에서도 작은 소란이 일었다.

중앙 홀에 걸려 있던 기사의 검이 사라진 것을 보고 놀란 집사장이 여왕의 집무실로 달려온 것이었다.

“중앙 홀에 걸려 있던 기사의 검이 또 사라졌습니다!”

그는 놀란 목소리로 여왕에게 아뢨지만, 여왕은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그의 말에 대답했다.

“내가 조사할 게 있어서 검을 내렸어요. 미리 말하지 않은 것은 사과할게요.”

여왕의 말에 집사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기사의 검은 왕의 검이었다. 왕이 가지고 있다면 문제 될 게 없었다.

“아닙니다. 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졌던 모양입니다. 왕이 아니면 쓰지도 못할 검인데, 다른 사람이 가져갈 리가 없겠죠. 괜한 소란을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집사장이 돌아가자, 여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기사의 검’을 가져가다니. 무슨 일이 생긴 거죠?”

여왕은 알렉스가 그녀에게 검을 건네주었을 때, 그가 ‘기사의 검’을 소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그녀는 확신했다.

기사의 검을 소환하고, ‘마나 감응력’과 초대 왕의 검술을 가지고 있는 알렉스가 이 왕국을 세운 카를로스 용사의 진정한 후계자라고.

그래서 그녀는 용사가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왕국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뒤에서 용사를 최대한 지원할 생각이었다.

“욕심 많은 귀족을 구슬리는 게 쉽지 않아서 문제지만…….”

적어도 이 왕국은 지킬 힘은 만들어 놓아야 했다.

“몸조심하셔야 해요.”

다시 업무에 복귀하기 전, 여왕은 창밖을 보며 어딘가 있을 자신의 호위 기사에게 말을 남겼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