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6화
제11편 용암 호수 (2)
주교가 기도를 하는 동안, 내 머릿속으로는 다시 조아나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계단을 다 올라왔어요. 여기는 절벽 위 같은데요? 커다란 바위에 큰 문양이 그려져 있어요.]
그녀는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목적지는 이 성전이 세워진 절벽 위인 모양이었다.
절벽 안에 구멍을 뚫어서 절벽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만들다니. 고대 제국의 대단함은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그녀는 내 지시대로 열심히 주변 모습을 설명했다.
[여기서는 섬 전체가 다 보여요. 숲도 있고, 화산도 보여요. 반대쪽에는 성벽에서 싸우는 기사님들이 보이고……. 맙소사! 숲에서 도마뱀처럼 생긴 거대한 괴물이 다가오고 있어요!]
마물 왕이 근처까지 다가온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였다.
잘못하다가는 주교가 뭔가 하기 전에 마물 왕이 들이닥칠 것 같았다.
다행히, 그때 베네틱토 주교의 기도가 끝났다.
“……신께 용서를 빕니다. 당신이 맡겨 주신 이 성지를 제 손으로 무너뜨리게 되었습니다. 저를 용서치 마옵소서.”
그는 기도를 마치고 용암 위에 손을 폈다.
그가 손을 펼치며 중얼거리자, 지하 공간 전체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척이나 무기질적인 목소리였다.
“시설 폐쇄 명령을 확인했습니다. 탈출 절차를 진행합니다. 시설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도록 다시 한번 확인을 부탁드립니다.”
쿠구구구궁!
그 말과 함께 지하 광장 한쪽을 가득 메우고 있던 용암 호수에서 용암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조금씩 줄어드는 용암.
동시에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쿵. 쿠쿵.
먼지가 날리고, 머리 위에서 돌도 떨어졌다.
[갑자기 지진이…… 아니, 화산에서 연기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바닥의 문양이 빛나고요. 어? 문양 위에 서라는데요?]
조금 전에 들었던 탈출 절차라는 게 공간 이동인 모양이었다.
고대 제국은 유물만으로도 공간 이동이 가능했던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각성한 능력과 유물의 능력 중에는 비슷한 것도 많았다.
각성 능력을 연구해 유물을 만든 게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설마 반대였을까?
머릿속으로 그런 의문이 잠깐 떠올랐지만, 의문은 우선 한쪽으로 미루어 두기로 했다.
[……공간 이동인가 봐요? 어, 갑자기 계약이 자동으로 되는데요? 이게 비밀…….]
텔레파시가 갑자기 뚝 끊어졌다.
공간 이동을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공간 이동을 하기 전에 한 말이 뭔가 의미심장했다.
자동으로 걸리는 계약이라니.
계약이라면 교단 신관이 주체하는 계약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다만, 그 계약은 강제성이 없었을 텐데?
이해가 안 되는 말이었지만, 이건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할 것 같았다.
게다가, 계약이라면 한 가지 방법이 있었다.
뒷일이 좀 걱정이 되긴 했지만, 나부터 살고 볼 일이었다.
용암이 더 줄어들고, 진동은 더 심해졌다.
섬 전체가 흔들리는 것을 보니, 이제는 돌이킬 수 없어 보였다.
주교는 잠시 덩그러니 놓여있는 유물들을 보다, 몸을 돌렸다.
그도 탈출할 생각인 듯했다.
다만, 그는 몸을 돌린 뒤에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뒤쪽에 서 있는 나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여기에…….”
나는 놀란 그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볼일이 있어서요.”
내 말에 주교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습니다. 성전이 인정한 자만이 가능한데…….”
“성전이 아니라 황실 별장과 유물 창고겠죠.”
내 말에 주교는 나는 노려보았다.
“당신은 잠긴 고대 제국의 시설물을 전부 열 수 있다는 겁니까?”
그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안 되는 것도 있죠. 이 시설의 폐쇄 같은 것도 안 되어서 주교님이 하기를 기다려야 했죠.”
시간을 들여 정식 등록자가 되면 나도 가능하다고 들었지만, 그럴 시간은 없었다.
내 말에 주교는 내게 물었다.
“설마, 당신은 계속 나와 교단을 속였다는 겁니까?”
“전부는 아니고……. 아니, 꽤 많이 속이긴 했군요.”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따지고 보면 속이기도 많이 속이고, 피해도 많이 주었다.
주교는 나를 처음 보는 것처럼 쳐다보았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죠?”
“잘 알 텐데요. 알렉스 디 샤를 자작. 아이샤 여왕의 전 호위 기사이자, 그레시아 공작의 서자. 그리고…… 성물을 찾으러 온 사람.”
나는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용암 호수를 가리켰다.
내가 가리키는 방향에는 유물들이 놓인 바위가 있었다.
“설마, 이단의 주교였나!”
주교의 표정이 바뀌었다. 마치 사생결단을 내야 하는 적을 보는 것처럼 나를 쳐다보았다.
“이단이라고 하긴 좀 그런데. 그냥 다른 종교라고 하면 안 될까?”
조금 전까지는 서로 존대도 하며 간을 보는 분위기였는데, 이제는 그냥 적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크게 나쁘지 않았던 주교였는데. 이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감히, 교단의 심장까지 들어오다니. 어느 이단이냐!”
주교의 말에 눈을 끔벅였다.
어라, 바위에 놓인 유물 중에 두 개는 모르는 유물이었는데, 설마 다른 종교의 성물이었나?
“셀린 여신의 성기사.”
뜬금없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어쨌거나, 나는 그의 질문의 대답해 주었다.
대검을 등에 메고, 유물 주머니에서 신검을 꺼내 보여 주니, 주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정말, 때가 된 건가?”
내 검을 본 그가 작게 중얼거리더니, 내게 손을 펼쳤다.
“역시, 아무리 노력해도 영원히 막을 수는 없는 것인가 보군. 그래도 교단은 최선을 다했으니. 신께서 이해해 주시겠지.”
내게 펼친 손과 손가락에는 팔찌와 반지가 가득 끼워져 있었다.
전부 유물이었다.
교단은 대륙에 널려있던 유물들을 모두 수거했었다.
왕국에 있던 신전에서도 유물이 가득한 것을 봤었으니, 주교인 그가 유물을 한가득 끼고 있는 게 이상할 게 없었다.
게다가, 그는 유물의 능력을 최대한 뽑아내는 것으로 유명한 신관이었다.
왕의 제사를 주관한 것도 그래서였고, 이 시설을 폐쇄하게 만든 것도 그의 능력 덕분이었다.
다만, 그는 상대를 잘못 만났다.
방어막이 펼쳐지고, 화염과 번개가 내가 있던 자리에 쏟아졌지만, 나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나는 빛나는 신검을 들고, 그에게 쏘아졌다.
방어막이 깨지고, 화염이 갈라지고, 신검이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우리 교단은 최선을 다했어. 제발 증오로 모든 이들을 징죄하지는 말아 주기를…….”
그의 마지막 말은 교단에 대한 용서와 부탁이었다.
이 주교는 확실히 다른 이들과는 달랐다.
나는 그의 말에 대답했다.
“교단에 대해 악감정은 없습니다. 어차피 셀린 여신에 대한 믿음도 없으니. 다만, 교단이 내 앞을 막아서 치웠을 뿐입니다.”
그는 내 말에 표정이 밝아졌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나는 앞으로도 교단이 내 앞을 막으면 봐줄 생각이 없다는 말이었다.
과연, 내 행동이 증오보다 나은 걸까?
그건 나중에 다른 이들이 결론을 내려야 할 문제였다.
어두운 얼굴로 주교는 죽었다.
나는 그가 가진 유물들을 수거하고 바닥을 드러낸 용암 호수로 향했다.
아직 열기가 남아 있었지만, 이제는 충분히 넘어갈 만했다.
나는 땅을 박찼다.
군데군데 남은 용암을 피하며, 바닥을 드러낸 용암 호수를 건넜다.
두 번 정도, 넓게 뛴 뒤에 나는 유물이 놓인 바위 위에 올라설 수 있었다.
문양이 그려진 바위 위에 놓인 세 개의 유물.
아름다운 보석이 박힌 왕관과 아직도 살아있는 것 같은 나무 지팡이, 그리고, 검은색 정육면체 튜브까지.
셀린 여신의 성물 외에는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지조차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셀린의 신도라면 왕관을 보고 감격했겠지만, 나는 별다를 바 없이 유물 주머니에 세 유물을 집어넣었다.
콰아아앙!
셀린의 신도라도 지금은 감격할 때가 아니었다.
유적이 폐쇄되는 진동과 다른 진동이 벽을 울리고 있었다.
여기서도 느껴지는 마나.
마물 왕이 도착한 것이다.
나는 유물들을 챙기고, 달리기 시작했다.
* * *
쾅!
거대한 꼬리가 앞으로 휘돌자, 단단한 성벽이 터져 나갔다.
위에 있던 사제와 기사들은 성벽과 함께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크아아악!
마물 왕의 괴성과 함께 피와 비명이 성벽을 가득 메웠다.
살아남은 기사들은 필사적으로 성벽 위로 올라오는 마물들을 처리하는 중이었지만, 그들은 절망적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조금 더 버텨!”
“뭘 어떻게 버팁니까? 저 괴물에게는 검이 들어가지도 않습니다!”
선임 기사가 같이 싸우는 젊은 기사에게 외쳤지만, 젊은 기사는 그의 말에 투덜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다른 놈들도 있잖아!”
“그거야 열심히 막고 있잖습니까. 소용없는 짓이라서 문제지!”
도마뱀 인간의 목을 날려버리면서 젊은 기사는 중년의 기사에게 입을 삐쭉였다.
그의 말 대로였다.
그들이 도마뱀 인간들을 잘 막고 있어도 소용없었다.
거대한 도마뱀 괴물이 부숴 놓은 성벽으로 도마뱀 인간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기사들의 분전은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래도 열심히 다른 기사들의 기운을 북돋던 기사가 뒤쪽을 돌아보더니, 검을 거뒀다.
“그런가……. 이제 안 막아도 될 것 같군.”
“네.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선임 기사의 말에 젊은 기사가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선임 기사가 멀리 뒤쪽을 검으로 가리켰다.
“이제 시작되었어.”
화산의 봉우리에서 검은 연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성전이 문을 닫기로 한 모양이야. 말로는 들었지만, 진짜 할 줄은 몰랐군.”
“설마, 화산이 터지는 겁니까?”
젊은 기사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연기가 솟아오르는 화산을 쳐다보았다.
“그래. 수백 년간 억지로 막았던 화산이니, 무척 장관일 테지.”
“설마…….”
“아마 섬 전체가 폭발에 휩싸일 거야. 저 말도 안 되는 괴물들도 죽일 수 있을지 몰라.”
“맙소사.”
젊은 기사는 그의 말에 검을 떨궜다.
화산을 본 기사들은 하나둘 검을 거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벽 위로 마물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 * *
성벽이 무너지는 광경을 보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교단과 적이라 해도, 인간들이 마물에 휩쓸려 죽는 것은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지하 광장을 빠져나와, 나는 조아나 일행이 갔던 곳으로 향하지 않았다.
대신, 건물 밖으로 나가, 절벽을 등반했다.
공간 이동진이 있는 곳이 절벽 위라는 것을 알았으니, 층계로 갈 이유가 없었다.
수직으로 세워진 절벽은 보통 사람은 올라가기도 힘들겠지만, 내게는 빠른 길일 뿐이었다.
마나를 움직여 몸을 절벽에 붙이고, 쭉쭉 위로 솟구쳤다.
거미맨이 부럽지 않은 속도였다.
위로 오르며, 성벽이 무너지고, 마물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성벽 너머로 거대한 도마뱀과 그 뒤에 또 하나의 마물 왕을 보게 되었다.
녹슨 갑옷을 입고 썩은 살들을 늘어뜨린, 거대한 좀비 거인 같은 모습.
분명, 봉인지에서 만났던 마물 왕이었다.
좀비 마물 왕을 이곳에서 또 보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저 좀비 마물 왕도 나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마물 왕은 내 쪽을 보고 괴성을 질렀다.
크와와왕!
공기가 출렁이고, 마물들이 움직임을 멈출 정도였다.
좀비 마물 왕은 앞선 도마뱀을 밀어젖히며 앞으로 나섰다.
분명, 내 쪽으로 달려오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팔다리를 빠르게 움직였다.
나에게 화가 난 마물 왕과 다른 마물 왕이라니.
이건 냉큼 도망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