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5화
제10편 용암 호수 (1)
처음, 마물을 죽이지 않고, 아래로 떨군 것은 마물들이 성벽으로 올라와서 난전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성전 안에서 마물과 난전이 벌어지면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주교가 일을 제대로 처리하기 위해서도, 사람들이 무사히 탈출하기 위해서도 제대로 전선이 펼쳐질 필요가 있었다.
다만, 마물들의 양을 확인한 뒤에는 성전이 위험하기에 조금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내가 제대로 끼어들면 성벽을 넘지도 못할 것 같았고, 내가 없어도, 성전 전체가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 하나 했는데…….
마물 왕이 등장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한 마리가 왕국 하나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마물들의 왕.
그런 괴수가 두 마리나 나타난 것이다.
덕분에 앞의 고민이 전부 부질없게 되어버렸다.
마물 왕 두 마리면 내가 전력을 다해도 상대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마물 왕들이 이곳까지 오려면 커다란 숲을 지나야 했다.
아직 시간이 있었다.
나는 마물 왕들의 모습을 확인하는 대신에 성벽 뒤로 뛰어내렸다.
그 뒤에, 앞서 중앙 건물로 달려가는 기사를 쫓아 대로를 달렸다.
마물과 싸우는 중이라서 그런지, 중앙 건물로 달리는 나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긴장한 얼굴로 내달리는 사람들.
뒤에서 들려오는 마물들의 소리, 거기다 점점 다가오는 거대한 마나까지.
어제 보았을 때는 화려해 보였던 교단의 성전도, 대로 주위에 활짝 펴있는 붉은 꽃밭도 더는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활짝 열린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는 기사를 따라, 나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열린 문 안, 로비에는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젊은 주교와 사제들. 그리고, 누이와 조아나 사제. 마지막으로 3 황자까지.
3 황자는 이제 화를 내기보다, 주교에게 달라붙어 애원하고 있었다.
“또, 마물이 쳐들어온 거잖아. 여기는 안전한 곳이 아니잖아. 제발 안전한 곳으로 보내줘.”
같은 얼굴이었지만, 3 황자는 이제 제국 수도에서 보았을 때와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물들은 금방 정리될 겁니다. 그리고, 저희도 곧 더 안전한 곳으로 황자님을 모실 생각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젊은 주교는 열심히 황자를 달래 주고 있었지만, 별 효과는 없는 것 같았다.
결국, 엘레나가 나서서 능력을 펼쳐졌다.
엘레나가 황자를 향해 손을 펼치자, 일그러졌던 황자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정신을 차린 그는 헛기침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조금 전 일이 창피한 모양이었다.
황자가 물러서자, 기사가 주교에게 다가갔다.
그는 주교와 자신 주위에 방음벽을 펼치고, 빠르게 상황을 전달했다.
방음벽을 펼친 덕에 사람들은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듣지 못했다.
하지만, 굳어지는 주교의 표정에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게 된 것 같았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로비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겨우 정신을 차렸던 3 황자는 다시 안절부절못했고, 다른 사람들도 불안한 눈으로 대화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두 사람을 보는 동안, 나는 슬쩍 엘레나와 조아나 뒤에 가서 섰다.
엘레나와 조아나가 나를 보고 아는 체를 했다.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일이죠? 어제 싸웠던 마물이 아닌가요?]
엘레나가 작은 소리로 물었고, 동시에 조아나도 머릿속으로 내게 질문을 던졌다.
“감당하기 어려운 마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제 싸웠던 마물과 함께 마물 왕이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나는 엘레나 누이에게 대답하면서, 머릿속으로는 조아나에게 답을 했다.
두 사람은 내 말에 놀라 동시에 반문했다.
“그럼 어떻게…….”
[마물 왕이 온다니, 어떻게 하죠?]
이번에는 다시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대답하기 전, 신관 기사와 주교의 대화가 끝났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을 둘러싼 방음벽이 사라진 뒤, 주교가 3 황자에게 말했다.
“안전한 곳으로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아, 다행……. 아니, 갑자기 왜?”
3 황자는 반가워하면서도 갑작스러운 주교의 번복에 의아해했다.
“생각보다 마물들이 많이 몰려온 모양입니다. 만약을 위해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주교의 말에 황자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곳에 오자마자 또 다른 곳을 가야 한다니……. 교단에 실망이 크오. 나중에 제대로 항의할 것이오.”
안전한 곳으로 가게 되었다는 말을 들어서일까?
3 황자는 고풍스러운 어조로 주교에게 불만을 늘어놓았다.
“다음부터는 조심하겠습니다.”
황자의 불만에 주교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사과했다.
그가 고개를 숙인 덕에 황자는 알 수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무표정한 주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주교는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한쪽에 서 있는 두 여 사제와 나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모두 여기 계셨군요. 여러분도 황자님과 같이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엘레나와 조아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손을 드는 것으로 그의 권유를 거절했다.
“싸울 수 있는 기사가 필요할 겁니다. 저는 남겠습니다.”
사람들은 놀라 나를 쳐다보았다.
황자도 엘레나도 조아나도.
[마물 왕이 오고 있다면서요!]
조아나의 고함이 머리를 울리는 사이, 주교가 감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전에도 도움을 받았는데, 또 도움을 받게 되었군요.”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대답하면서도, 나는 그에게 조금 미안했다.
내가 할 일은 그의 생각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엘레나는 복잡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조아나도 내 머릿속으로 말을 걸었다.
[성기사님이 남으신다면, 저도 남겠어요.]
‘아뇨. 먼저 가요. 어제 말했죠? 성물을 챙길 기회가 올 것 같다고. 바로 지금입니다.’
내 말에 조아나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조아나 사제도 해 주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뭐죠? 무슨 일이든지 맡겨주세요!]
‘지금부터 어디로 가는지, 주변 모습은 어떤지 능력으로 알려 주세요. 제가 뒤따라가려면 길을 알아야 하니까요.’
[아……. 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자님과 사제분들은 저를 따라오시지요.”
그 뒤에 주교 옆에 서 있던 사제 한 명이 일행을 이끌고 복도 안쪽으로 사라졌다.
황자와 두 여사제가 떠난 뒤, 주교는 옆에 있는 사제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사제들도 준비한 대로 사람들을 모아 전송진으로 가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의 지시에 사제들도 바쁘게 움직였고.
“그럼, 저도 성벽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신관 기사도 주교에게 인사를 하고 건물 밖으로 향했다.
다시 마물들의 공격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멀리 성벽 쪽에서 마물과 싸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럼, 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주교는 내게 고개를 숙였고, 나는 신관 기사를 따라 건물 밖으로 향했다.
밖에 나와,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 조아나의 음성이 머릿속에 울려왔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그녀의 음성을 들었다.
[복도 끝에 도착했어요. 복도 끝에는 닫힌 문이 하나 있어요. 안내하던 사제가 문을 여니, 위로 올라가는 원형 계단이 있어요.]
이어서, 계단을 올라가고 있다는 말이 들려왔다.
거기까지 듣고, 나는 몸을 돌려,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로비에는 아무도 없었다.
로비에 있던 사제들은 주교의 지시를 받고, 뛰어다니고 있을 테고, 주교는 로비 안쪽의 홀로 들어갔을 터였다.
나는 텅 빈 로비를 가로질러, 닫힌 문 앞에 섰다.
감각을 일으켜, 홀 안을 살핀 뒤, 주머니에 손을 넣어 구슬을 쥐었다.
“문 열어.”
[알겠습니다.]
딸깍.
구슬의 에고가 닫힌 문을 열었다.
나는 바로 문 안으로 들어가 다시 문을 닫았다.
그그그긍.
조금 일찍 들어왔는지, 안쪽에 있는 제단이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안쪽으로 걸어가, 그사이 닫힌 제단을 다시 열었다.
그그그긍.
제단이 움직이자 지하로 향하는 통로가 보였다.
주교는 이미 계단을 내려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그그긍.
다시 제단이 움직여 입구를 막았고, 머릿속에는 조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형으로 만든 계단을 계속 올라가고 있어요. 벽은 울퉁불퉁한 게 암벽 같고. 마치 탑 내부의 계단을 올라가는 것 같아요.]
나는 통로의 벽을 쓸어보았다. 여기도 울퉁불퉁한 암벽이었다.
[꽤 올라온 것 같은데, 아직 한참 남았어요. 계단 끝은 환한데……. 설마 밖인가?]
조아나와 달리, 나는 계단을 다 내려왔다.
계단 끝에는 거대한 지하 광장이 있었다.
계단을 다 내려오자, 열기가 확 몰려왔다.
이글거리는 공기와 온통 붉게 보이는 시야.
각성하지 않은 보통 사람이라면 버티기 어려울 열기였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광장 안쪽을 쳐다보았다.
광장을 메운 열기와 붉은 광채는 광장 안쪽, 용암 호수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하 광장 한쪽을 가득 메운 용암 호수라니.
어젯밤에도 보았지만,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전 지하에 이런 용암 호수가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용암 호수 안에는 더 놀라운 물건들이 있었다.
용암 호수의 중앙, 문양이 그려진 평평하고 커다란 바위 위에 물건 들이 놓여있었다.
자리 배치를 보면, 더 많은 물건이 바위 위에 놓여있었을 것 같았지만, 지금은 총 세 개의 물건, 아니, 유물만 놓여 있었다.
그 세 개의 유물 중 하나.
아름다운 보석이 박힌 왕관이 내가 노리는 유물이었다.
셀린 여신의 눈물로 만들었다는 보석 왕관.
셀린 교단의 성물이었다.
조아나의 생각과 달리, 셀린의 성물은 어딘가에 숨겨놓지도, 금고에 단단히 봉해있지도 않았다.
성물은 누구나 볼 수 있는 지하 광장에 놓여있었다.
하지만, 눈에 보인다고 쉽게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마물 왕을 쓰러뜨리고, 성벽을 타고 오른다고 해도, 저 넓은 용암 호수를 뛰어넘기는 어려웠다.
더군다나, 바위에 그려져 있는 문양이 문제였다.
어젯밤, 에고 구슬이 해 준 말로는 저 바위, 저 문양이 이 유적의 핵심이었다.
화산 용암의 기운을 모아 마나로 가공하는 문양으로, 이 유적이 오랜 시간 멀쩡하게 유지되는 것도 저 문양과 화산의 용암 덕분이었다.
문양 위에 유물들을 놓아둔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용암의 기운이 변한 마나는 문양 위의 유물도 오랜 기간 원래 모습으로 지켜준 것이다.
이 유적은 황실의 별장이자, 유물의 보관 창고였다.
그러기에, 함부로 바위 위에 놓은 유물을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었다.
에고 구슬의 말에 따르면, 함부로 유물을 건드렸다가, 마나의 흐름이 꼬이기라도 한다면 용암의 기운이 폭주할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용암의 기운이 폭주한다는 말은 화산이 터질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젯밤에 성물을 보고도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성물을 꺼낼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용암이 폭주하기 때문에 유물을 꺼낼 수 없다는 말은, 용암을 폭주시키면 유물을 꺼낼 수 있다는 말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용암을 폭주시키려는 사람이 있었다.
거대한 용암 호수 앞.
젊은 주교, 베네틱토가 존재하지 않는 신에게 기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