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4화
제9편 성전 (2)
내가 다시 조아나의 방으로 돌아간 것은 지하 계단을 찾고, 세 시간 정도 지난 뒤였다.
조아나는 내 신호를 듣고 바로 방문을 열어주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먼저 성물에 관해 물었다.
[성물을 찾았나요?]
조아나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 모습을 보고 조아나는 크게 실망했다.
[아. 거기에 성물이 없었군요.]
그녀의 말에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성물은 있었어.’
셀린 교단의 성물은 성전 지하에 너무나 잘 있었다.
[네? 그럼 왜 고개를 저으신…….]
그녀의 물음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성물은 거기 있었지만, 가지고 나올 수가 없었어.’
이렇게 시간이 걸린 것도, 지하에서 이리저리 방법을 찾으려다가 늦은 것이었다.
[성물이 거기 있었다고요?]
내 대답에 그녀의 표정이 다시 환해졌다.
[다행이에요. 정말 있었군요.]
그녀는 두 손을 꼭 모으고 셀린 여신에게 감사를 드렸다.
[얼마나 단단한 곳에 넣어 둔 거죠? 성기사님도 가져 나오실 수 없다니…….]
단단한 금고에 넣어 둔 것도 아니고, 눈으로 빤히 보이는 곳에 잘 있었지만, 지금은 금고 이상으로 가져나오는 게 불가능했다.
‘빼내도 문제가 될 것 같고…….’
그래도 방법이 없지는 않을 것 같았다.
방법을 찾지 못한 채로 다시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나는 성전의 주교와 마주칠 뻔했다.
제단을 움직여 다시 홀로 나온 그 순간에 홀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순찰 시간이긴 했지만, 문이 잠긴 홀 안으로 들어올 이유가 없어, 나는 잠깐 당황했었다.
다행히 늦지 않게 제단이 닫히고, 조각상들 뒤에 숨을 때까지 안으로 들어오지 않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덜컥.
문이 열리고, 홀 안으로 젊은 주교와 신관이 들어왔다.
같이 들어온 신관은 우리와 같이 성전에 왔던 신관.
공간 이동 능력을 가지고 있던 알란 신관이었다.
안으로 들어오며 주교가 물었다.
“더 옮길 성물은 없죠?”
“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그럼 되었습니다.”
신관의 대답에 주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교의 대답에 오히려 신관이 아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다른 유물들은…….”
“아깝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죠. 추기경님과 본단의 결정이니.”
“결국, 전부 같이 묻는 겁니까?”
주교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최악의 상황에는 그렇게 되겠죠. 이 물건들은 유출하면 안 되는 것이니.”
주교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최악의 상황, 우리가 마물들을 막아 내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을 때나 벌어질 일입니다.”
그의 말에 신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도, 성물들을 옮긴 것은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 아닌가요?”
“글쎄요. 아마, 그렇겠죠?”
주교는 그의 말에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저 먼저 떠나도 괜찮을까 모르겠습니다.”
“성물을 옮겨야 하니까요. 본단에 상황을 전달해 줄 사람도 있어야 하고요.”
주교의 말에 신관도 동의하는 모양이었다.
“주교님도 저와 같이 가심이…….”
“하하, 무슨 악의 꾀임이십니까. 저는 이곳의 주교입니다. 마지막까지 여기를 지켜야죠. 뭐, 그렇다고 순교를 하겠다고 작정한 것도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대화를 하는 동안 두 사람은 제단 앞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그그그긍.
제단이 열리고, 두 사람은 나타난 계단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데려오신 황자와 일행은 일이 터지면 제일 먼저 섬 밖으로 보내겠습니다. 성전의 능력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니, 성전의 비밀은 지켜질 것…….”
그그그그긍.
주교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결국, 제단이 다시 닫히며,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나는 그길로 홀을 빠져나왔고, 조아나의 방으로 온 것이다.
나는 조아나의 방을 떠나기 전에 조아나를 안심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셀린의 성물을 회수할 수 있을 겁니다.’
마물들이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니, 주교가 말한 최악의 상황이 금방 닥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라면 충분히 성물을 빼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황자와 우리를 섬에서 빼내 준다고 했으니, 타이밍만 잘 맞춘다면 성물을 들고, 떠날 수 있을 듯했다.
타이밍이 맞지 않는다면, 다시 반복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아예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었다.
조아나에게 말을 남긴 뒤, 나는 다시 창문을 통해, 내 숙소,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날.
내 잠을 깨운 것은 아침 햇살이 아니라, 내 감각이었다.
찌르르 울리는 마물들의 느낌.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보자, 날이 어렴풋이 밝아지고 있었다.
갑옷을 걸치고, 대검을 들고, 복도를 나서자, 어제처럼 종소리가 들려왔다.
땡,땡,땡.
“마물의 공격입니다!”
종소리가 들리자 사방이 소란스러워졌다.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기사들과 피곤함에 겨워 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들.
나는 감각으로 겨우 일어나는 사람들을 느끼며 숙소에서 벗어났다.
아침이 되어서인지, 꽃밭에 숨겨져 있던 유물의 마나는 원래대로 돌아가 있었다.
어제 낮처럼 대로로 다니면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대로를 통해 성벽에 도착했다.
벌써, 마물들이 가까이 다가온 게 느껴졌다.
어제보다 강하고 많은 마나.
나는 바로 성벽 위로 올라갔다.
성벽 위에는 야간에 경계를 서던 기사들이 질린 얼굴로 성벽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을 따라 나도 밖을 살폈다.
기사들이 질릴 만했다.
마물이 많았다. 적어도 어제의 두 배 이상.
어제와 달리, 지금은 마물들로 숲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곧이어, 마물들이 숲을 빠져나와 성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달려오는 마물들을 보니, 마나가 어제와 달라진 게 이해가 되었다.
마물들은 전처럼 맨몸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손톱만이 아니라, 녹슨 검을 들고 있는 마물들도 있었고.
헝겊 쪼가리에 가까운 옷을 걸친 마물도 있었다.
저런 녹슨 검이나, 헝겊 쪼가리가 싸움이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저런 것을 들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머리가 좋다는 말이었다.
이제는 짐승과 싸울 때처럼 싸우면 안 된다는 말이었다.
마물들이 막 성벽을 타고 올라오려는 것을 보고, 나는 성벽 위를 둘러보았다.
성벽 위에 있던 기사들은 검을 빼 들고,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피곤한 가운데에서도 기세를 잃지 않는 것을 보니, 과연 신관 기사들이라 생각했지만.
문제는 아무 생각 없이 어제와 똑같이 상대하려 했다.
참견을 안 하려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크게 고함을 질렀다.
“죽일 생각을 말고, 사람들이 올 때까지 마물들을 아래로 떨구는 데만 집중해요!”
그리고, 제일 먼저 올라오는 마물들을 대검으로 후려쳤다.
퍽!
가볍게 후려친 덕에 마물들은 멀쩡한 모습으로 아래에 떨어졌다.
마물들이 떨어지면서 올라오던 마물들과 충돌했고, 대여섯 마리의 마물들이 같이 성벽 아래로 추락했다.
쿠엑!
비명과 함께 성벽 아래가 엉망이 되었다.
다치거나 죽은 마물들은 없었지만, 내 앞 성벽은 깔끔하게 비워졌다.
물론, 마물들을 단번에 죽일 수도 있었지만, 기사들에게 내 말을 설명하기 위해 보여준 것이었다.
“들었지? 죽이지 말고 떨궈! 시간을 벌어야 해!”
마물들이 추락한 것을 본 기사들은 내 행동을 따라 했다.
검과 창으로 올라오려는 마물들을 차례로 떨군 것이다.
꽤애액!
먼저 성벽 위로 치고 올라오던 마물들이 계속 추락하고, 숲에서 계속 마물들이 쏟아져 나오니, 얼마 지나지 않아, 성벽 아래에는 마물들이 가득해졌다.
그렇게 마물들이 쌓이자, 몇몇 마물들이 고함을 질렀다.
모두 그럴싸한 갑옷 비슷한 옷을 입고, 손에 무언가를 들은 마물들이었다.
성벽 위로 오르려던 마물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뒤로 물러섰다.
마치, 군대 같은 모습에 기사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우리는 그 덕분에 시간을 벌게 되었다.
허겁지겁 달려온 기사들이 차례로 성벽 위로 올라왔고, 성문 앞에도 많은 기사들이 자리를 잡았다.
사제들도 도움을 주기 위해 창과 기름을 들고, 성벽 위로 올라왔다.
이제는 충분히 싸울만한 모습이라, 낯빛이 안 좋아졌던 기사들도 다들 표정이 좋아졌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달랐다.
나는 멀리 바다를 보며 혀를 찼다.
“너무 빠른데. 조금 더 시간이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네. 무슨 말씀입니까?”
옆에 있던 기사가 물었지만, 나는 고개를 젓고는 다른 사람을 찾았다.
어제 우리를 맞이한 기사가 어디 있을 터였다.
다행히 늦지 않게 그 중년 기사도 성벽 위로 올라왔다.
나는 바로 그의 옆으로 달려갔다.
내가 달려오자, 그는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벌써 와서 도와주고 계셨군요. 감사합니다.”
어제 열심히 도운 덕분에 그도 나를 외면하지 않았다.
이 중년 기사는 이 섬에서 제일 강한 기사였다.
주교와도 편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니, 실력만큼 위치도 낮지 않을 터.
물론, 10대 검호 같은 실력자는 아니었지만, 이곳에 오기 직전에 죽은 추살 대장과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듯했다.
다행이었다.
그의 실력이라면, 내가 느끼는 것을 그도 느낄 수 있을 터였다.
“지금 아래에 모인 마물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멀리 바다를 가리켰다.
지대도 높고, 성벽 높이 덕분에 숲 너머로 수평선이 보였다.
바다는 조용했다. 숲도 조용하고, 마물들도 조용했다.
하지만, 마나는 달랐다.
쿠쿠쿠쿠쿵.
거대한 마나가 바다 쪽에서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먹구름이 피어오르듯.
강대한 마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이런 광경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었다.
이런 마나는 여러 마리의 마물이 만들어 내는 마나가 아니었다.
단 한 마리.
마물들의 왕이라 불리는 마물이 만들어 내는 마나였다.
“바다에서 마물 왕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기사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차분히 살펴보시면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마나를 볼 수 없더라도, 이 신관 기사 정도의 실력이라면 저 기세는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설마, 그럴 리가……. 말도 안 돼…….”
처음에는 부인하던 그도, 점점 말이 달라졌다.
그리고, 잠시 뒤에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크아아아아아앙!
마물 왕이 섬에 상륙한 것이었다.
너무 멀어서 실루엣만 보였지만, 마물의 괴성과 출렁이는 숲의 끝자락만 봐도 얼마나 강대한 마물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빨리, 알려야…….”
마물 왕이 확실해지자, 기사는 내 예상대로 주교에게 가려고 했다.
내가 노리던 기회. 나도 그의 뒤를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뒤에서 느껴지는 마나가 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실루엣에서 퍼져나오는 거대한 마나 뒤로, 또 하나의 마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어이, 어이. 한 마리가 아니었었나?”
이쪽으로 이어지는 물살.
다가오는 마물 왕은 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