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9화
제4편 수도원 (2)
열심히 따라갔지만, 이제 황실 기사에 들어선 요하힘이 10대 검호인 질베스터 백작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언덕을 올라, 수도원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활짝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따라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일행 중에 황자를 표시해 놓은 추적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만 찾으면 될 일이었다.
그 계단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을 모양이었다.
“으아아암.”
가까운 방에서 로브를 눌러쓴 사제 한 명이 기지개를 켜며 복도로 나온 것이다.
그는 기지개를 켜다 말고, 우뚝 멈췄다.
열린 문과 요하힘 일행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요하힘은 속으로 웃고 말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사제가 덩치에 걸맞지 않게 어수룩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때마침 나타난 좋은 안내자였다.
요하힘은 손을 들어, 조직원들이 그를 죽이려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사제 앞으로 걸어가, 그의 목에 검을 대고 물었다.
“당장 지하로 내려가는 길을 말하지 않는다면, 이 수도원에 있는 모든 사제와 신관을 전부 죽이도록 하겠다. 그들은 모두 너 때문에 죽는 거다.”
그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제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역시 어수룩한 사제였다.
생각보다 쉽게 대답을 들을 것 같았다.
어차피, 이 수도원에 있던 사람 중에 살아남을 자는 없었다.
눈앞의 사제도 죽게 될 테니, 자신의 억울함은 죽은 뒤에 있지도 않은 신에게 풀면 그만일 터였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상대방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지하로 내려가는 길이 아니었다.
사제는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만날 줄은 생각도 못 했어. 거기다, 제법 괜찮았던 예비 기사가 이렇게 달라지다니……. 정말 깜짝 놀랐어.”
요하힘은 믿기지 않은 얼굴을 하고는 뒤로 물러섰다.
“말도 안 돼.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사제의 말과 고개를 든 사제의 얼굴이 요하힘을 놀라게 만든 것이다.
“네가 사제일 리가, 넌 영주가 되었잖아!”
요하힘의 말에 나는 로브를 뒤로 넘긴 뒤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영주가 된 것 맞아. 이 복장은 여기 수도원에 숨어들기 위해 입은 거니까.”
“뭐?”
“멀리서 지켜보다가는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 도착할 뿐이잖아. 그래서 옆에서 지켜보기로 한 거야.”
내 말에 요하힘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이 수도원에 도착한 것은 황자 일행보다 빨랐다.
내 다리가 그들의 말보다 빨랐고, 그들은 조금도 둘러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방향을 알고, 목적지까지 거리 안에 있는 교단의 건물이 이 수도원밖에 없으니, 그들의 목적지는 이 수도원일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지하에서 흘러나오는 마나도 꺼림직했고.
그래서, 나는 소란스러운 틈을 타서 수도원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뒤에 일은 내 예상대로 진행되었다.
황자 일행이 도착하고, 신관 한 명이 그들을 지하로 안내한 것이었다.
나는 바로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추적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미리 옆에서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아직 나는 지상에서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나니, 때마침 굉장한 실력의 기사가 복도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뒤따라오는 사람들이 있어,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조무래기들을 처리하고 지하로 내려갈 생각이었는데…….
뜻밖의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다.
“여기 왔다는 건, 너도 조직에 들어간 거겠지?”
“조직도 알고 있었나?”
내 말에 요하힘의 표정이 더 굳어졌다.
우리는 전과 달리 서로 편하게 말을 놓고 있었지만, 사이가 더 좋아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둘 다 과거의 관계를 무시하겠다는 뜻일 뿐이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만난 친구였다.
나는 그에게 내가 한 일을 자랑했다.
“너희도 나를 고마워해야 해. 원래 몰래 접근하는 것을 들켰어야 했는데, 내가 중간에서 보고를 막아 준 거였거든.”
나름 잘 숨어들어왔다고 생각했겠지만, 몇 번 신호가 올라왔었다.
운 좋게 내가 중간에 낚아채지 않았다면, 벌써 경고가 수도원 전체에 내려져 있었을 터였다.
“거기다, 미리 문까지 열어 주었잖아. 저 문 평범한 문이 아니야.”
낡은 수도원이 맞긴 했지만, 그 안까지 낡은 것은 아니었다.
문도 마나가 아니면 잘리지 않는 철목으로 만든 문이었고, 벽들도 무척이나 단단했다.
내가 미리 문을 열어 주지 않았으면, 무척이나 시끄러웠을 터였다.
내 말에 요하힘은 한 가닥 기대가 담긴 얼굴로 내게 물었다.
“무슨 생각인 거지? 설마, 너도 조직과 관련이 있는 건가?”
“관련이 있지. 많이.”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의 얼굴이 조금 더 밝아졌다.
나는 조금 미안해졌다.
“물론, 좋은 쪽은 아냐.”
“그런데 왜?”
요하힘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워 보였다.
나는 그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그건 교단과도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이지.”
내 대답에도 요하힘의 표정은 좋아지지 않았다.
나와 요하힘의 대화가 지겨웠던지, 옆에 있던 이가 요하힘에게 말했다.
“여기서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백작님이 지하로 내려가셨습니다. 아는 사이라도 조직 일이 우선입니다.”
말을 하는 것을 보니, 그가 추적자인 모양이었다.
전에 본 추적자와 달리 이 추적자는 제법 싸움을 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말에 요하힘이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그건…….”
미안하지만,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나도 어울려 주고 있었지만, 추적자의 말대로 이제는 끝낼 시간이었다.
“맞는 말이야. 시간이 되었으니,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야겠어.”
내 말과 함께 요하힘이 소리쳤다.
“내가 막을 테니, 백작님에게 알려! 모두 흩어져!”
말과 동시에 요하힘이 내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들은, 용병차림의 조직원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려 했다.
좋은 대처였고, 훌륭한 움직임이었지만, 아쉽게도 요하힘은 내 실력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잠시나마라도, 그가 나를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가슴에서 검을 뽑고, 달려드는 그의 검을 부수는 것은 검을 두 번 휘두를 필요도 없었다.
이어서, 다른 손으로 그의 머리를 잡고, 땅에 내려찍었다.
쿵.
단단한 철목이 찌그러지고, 다음 순간 요하힘의 눈이 풀렸다.
나는 요하힘을 찍어누른 자세로 검을 휘둘렀다.
가까이 있던 자들은 보이지 않는 검에 몸이 잘려 나갔고, 조금 멀리 달아난 자들은 검에서 튀어 나간 빛나는 선에 목숨을 잃었다.
몸이 잘리고, 벽에 피가 가득 튀었다.
눈을 깜빡일 정도로 짧은 순간이 지난 뒤에, 더 이상 조직원들 중에 서 있는 자는 없었다.
나는 머리를 찍어누르던 손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요하힘도 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요하힘도 바로 정신을 차렸다.
그는 누운 채로 내게 물었다.
“왜 나는 안 죽인 거지? 설마, 옛정 때문인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원래 다 정리한 뒤에 지하로 갈 생각이었는데, 너를 보고 한 가지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거든.”
이어서 나는 요하힘에게 사과를 했다.
“정신을 차리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힘 조절을 잘못해서 미안해.”
내 사과에 요하힘의 표정이 까맣게 죽어갔다.
* * *
같은 시각, 수도원 지하.
지하 광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닫힌 철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쾅! 쾅! 쾅!
엄청난 소리와 함께 철문이 조금씩 우그러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우그러지고 있는 철문은 조금 전 신관이 무척이나 자랑했던 철문이었다.
10대 검호가 와도 안전하다는 철문.
그런 철문이 빠르게 망가지고 있었다.
“괜찮다고 했잖아! 이게 뭔가! 지키고 있다는 사람들은 어디 있는데?”
3 황자가 그동안 지켜오던 체통을 다 던져버리고,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도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다행히 다른 이들은 제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두 여사제는 손을 잡고 문을 바라보고 있었고, 추살대장은 지하 광장 중앙에 서 있는 신관과 빠르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시간이 맞을까?”
“아슬아슬할 것 같습니다.”
“경고도 없이 문을 부수다니, 나도 황자님의 말이 틀리지는 않은 것 같네만.”
“저도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소리 없이 지하까지 내려올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신관의 말에 추살대장은 자신의 검을 움켜쥐었다.
“결국, 신은 내 목숨도 원하시는 건가.”
그렇게 중얼거린 그는 신관에게 말을 남기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서둘러주게. 내가 잠깐 시간은 벌도록 하지.”
홀로 남겨진 신관은 그 자리에 서서 정신을 집중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바닥 가득 그려진 문양의 중심.
신관이 정신을 집중하자, 문양 전체가 조금씩 빛을 뿌렸다.
신기하게도 이 지하 광장에 그려져 있는 문양은 아카데미 학원의 한 건물 바닥에 그려져 있는 문양과 무척이나 비슷했다.
문양이 빛나기 시작하자, 황자도 두 사제들도 부서지는 문을 잊고, 자신들이 밟고 있는 문양이 빛나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그 순간.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문이 갈라졌다.
과한 힘에 철문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한 것이다.
“이건 도대체 뭐로 만든 거지? 내 검을 이렇게 버티다니, 도대체 소재가 뭐야?”
갈라진 문밖에서 들려온 말에 추살대장이 대답했다.
“고대 유물을 참고해서 만든 문이오.”
“푸하하하! 유물을 참고해서 만들었다고? 아니, 교단의 목적은 고대 제국을 모두 지워버리는 거잖아. 그런데, 그 유물을 연구해서 이걸 만들어 냈다고? 이렇게 웃기는 소리는 오랜만이야.”
상대의 비웃음에도 추살대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갈라진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그가 예상했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질베스터 백작?”
제국 사교계의 망나니이자, 부모가 의절까지 해버린 문제아.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백작 자리를 꿰찬 10대 검호.
그가 바로, 추살대장 앞에 나타난 사람이었다.
“설마, 10대 검호가 둘이나 왔다고?”
그의 놀람에도 상대는 다른 것을 보고 놀라고 있었다.
“설마, 공간 이동진? 교단이 이걸 숨겨 두고 있었어?”
백작은 한눈에 바닥에 그려진 문양을 알아본 것이었다.
“왜, 이런 수도원으로 왔나 했더니, 여기서 공간 이동을 할 생각이었군. 이러니, 교단이 숨겨 놓은 신전을 수백 년 동안 찾지 못한 거군.”
오랫동안 숨겨온 교단의 비밀이 들통났지만, 추살대장의 표정은 오히려 담담해졌다.
그는 검을 뻗어 백작을 가리켰다.
“이미, 늦었습니다. 당신은 성전을 찾을 수도, 교단의 비밀을 알릴 수도 없을 겁니다.”
“푸핫! 안 늦었어. 내가 공간 이동진을 모를 줄 알아? 너를 쓰러뜨리고, 공간 이동에 충분히 올라탈 수 있어.”
그의 말에 추살대장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제가 막을 겁니다.”
“흥, 몇 합이나 막을지.”
그렇게 말하며, 백작은 검을 치켜들었다.
추살대장은 이를 악물고, 그 검을 노려보았다.
그 순간, 갈라진 문에서 사람이 뛰어들어 왔다.
갑옷을 입은 기사.
판금 갑옷을 차려입은 그는 투구까지 내리고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갑옷은 추살대장이 처음 보는 갑옷이었다.
그렇다면 이 기사도 적이었다.
백작은 들어온 기사를 힐끔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우선 너는 여자들이나 치워.”
백작은 턱짓으로 두 여사제를 가리켰다.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들었다.
그리고, 그는 안으로 뛰어드는 대신, 검을 찔렀다.
옆에 있는 백작의 옆구리에.
푹.
“요하힘?”
백작은 놀라 급하게 몸을 빼며 기사에게 물었다.
나는 투구의 바이저를 올리며 그에게 말했다.
“요하힘은 죽었어. 그의 갑옷은 내가 잠시 빌렸지.”
나는 저번 삶에서 나를 죽였던 마지막 검호를 보며 씩 웃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