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5화
제25편 적과의 동행 (2)
세상은 내가 영지에서 내실을 다질 시간도 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마물들이 갑자기 강해지는 것도 불안한데.
거기다, 제국 황태자가 ‘왕위를 계승 중입니다.’를 해 버릴 줄이야.
‘설마, 내가 그 일에 일조한 것은 아니겠지?’
나비 효과도 아니고, 그렇게 일이 굴러가지는 않았겠지.
제국 수도에 마물이 좀 쏟아져 나왔다고 황태자가 황제를 죽일 리는 없을 터였다.
“암, 그렇고말고.”
“네?”
내 혼잣말에 레스티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잠깐 딴생각을 했어. 그보다, 이건 따로 설명이 필요한 것 같은데.”
내 말에 레스티가 자세를 바로 했다.
나는 지금 레스티를 데리고, 촌장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와 있었다.
마을 창고 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을 만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방음벽까지 치고, 레스티에게 사정을 듣는 중이었다.
교단과 황자에게는 잠시 시간을 달라고 한 상황이었다.
그들의 말만 듣고, 그들을 도와줄 수는 없었다.
레스티의 수신호로 레스티가 같이 있는 이유는 알 것 같았지만, 제대로 이야기를 들어 봐야 했다.
내 말에 그는 제일 먼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미리 알려드려야 했지만,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따로 말도 없이 황자 일행을 데려온 데에 대한 사과였다.
그의 사과에 나는 손을 저었다.
“상황이 급했다는 것은 알겠어. 그 점을 뭐라 할 생각은 없어.”
내게 알리기 위해, 도망치는 중인 사람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을 터였다.
더구나, 도망자가 제국의 3 황자였으니, 그로서는 내게 바로 데려오는 게 최선이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없지는 않았다.
“셀린 교단의 사제가 직접 데려온 것은 저들을 꼭 안내해야 한다는 여신의 뜻인가?”
그동안 나는 셀린 교단에게서 성기사로 인정을 받았다.
셀린 교단은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셀린 여신을 믿을 수는 없었다.
성기사로 셀린 여신에 충성을 바치는 것은 더욱 무리였다.
셀린 교단은 나를 자신들의 성기사로 대우했지만, 나는 아직 그들을 어떻게 대할지를 정하지 않고 있었다.
아직, 셀린 교단을 위해 뭔가 해야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셀린 교단이 처음으로 가져온 일.
이제, 내 생각을 정할 때였다.
나는, 레스티의 말에 따라서, 교단과 좋은 동료로 남을지, 거래 상대로 남을지 정할 생각이었다.
여신의 이름으로 강요를 할지, 아니면, 그동안의 도움을 꺼내며 부탁을 할지.
어느 쪽이냐에 따라, 나도 결론을 내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레스티의 대답은 내 생각과 달랐다.
“결정을 하시는 것은 영주님, 아니 성기사님이십니다. 셀린 여신님께서는 성기사님의 결정을 축복하십니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저희는 따를 뿐입니다.”
예상과 완전히 다른 말.
나는 그를 다시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나에 대한 셀린 교단의 기대치가 생각보다 훨씬 큰 모양이었다.
교단의 앞날을 정해달라니.
이건 성기사가 아니라, 이건 주교나 교황 취급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야, 평범한 동료나 거래 상대로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신검을 들었다고, 이렇게 믿고 따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여신이 그렇게 말했다는데 뭔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별수 없었다. 여신이 그렇게 말했다니,
그렇다면, 셀린 교단이 아니라 내 위주로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했다.
“우선, 황자를 쫓는 추격대 숫자는 얼마나 되고, 거리는 어느 정도지?”
내가 셀린 교단의 성기사라는 직함을 받아들인 가장 중요한 이유.
셀린 교단의 정보망 때문이었다.
레스티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조직이란 곳에서 나온 이들이 멀찌감치 따르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그 뒤로 나는 최대한 정보를 모은 뒤, 결정을 내렸다.
3 황자를 호위하기로.
셀린 교단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나는 발레아에게 사정을 설명한 뒤에, 일행을 데리고 돌아가 달라고 부탁했다.
“오헨이 잘 처리하고 있겠지만, 발레아가 영지를 지켜주었으면 해요.”
이번에는 발레아와 같이 가기가 어려웠다.
조직과 교단, 셀린 교단이 얽힌 일이었다.
중간에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 수 없었다. 잘못하면 죽음을 반복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것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괜히 일행을 데려갔다가, 영지에 피해를 줄 수가 있었다.
거기다, 3 황자가 원한 것은 나 하나뿐. 혼자 가는 것이 제일 좋았다.
물론, 그렇게 따지면 영주인 내가 가는 것도 말이 안 되었지만, 나는 다른 이들과 달랐다.
나는 어느 곳에서도 살아 돌아올 자신이 있었다.
다행히 발레아는 내 말을 들어주었다.
그녀는 내 일행을 데리고, 저택으로 향했고.
나는 3 황자 일행과 함께, 마을 사람들의 환송을 받으며, 사냥꾼 마을을 떠났다.
나는 이번에도 평범한 갑옷과 투구를 써서 신분을 감추었다.
카를로스 왕국의 영주가 제국의 일에 끼어들었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황자도 신관 기사도 내가 신분을 숨기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황자 일행과 마을을 벗어난 뒤, 신관 기사, 아니 추살대 기사가 입을 열었다.
“우선, 영지를 벗어난 뒤에 저희를 따르는 기사단과 합류를 할 생각입니다. 그 뒤에 바로 성지로 향할 것입니다.”
추살대 기사가 말하는 신관 기사단이라면, 다른 기사단일 리가 없었다.
그들은 내가 전멸시켰던 기사들과 같은 추살대가 분명했다.
* * *
3 황자가 사냥꾼 마을을 떠나는 그 순간.
산맥에서도 멀리 떨어진 작은 마을에 묵고 있었던 조직원들도 분주해졌다.
추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귀족이 3 황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렸기 때문이었다.
조직원들이 마을 사람들을 부려 짐을 싣는 사이, 갑옷을 입은 젊은 기사가 촌장 집으로 향했다.
그는 촌장의 집 문을 두드렸고, 잠시 뒤, 문을 열고 한 남자가 나왔다.
아침도 아니었는데, 지금 잠에서 깬 것인지 머리가 까치집이 된 남자였다.
남자는 헝클어진 속옷을 대충 여미며 기사를 바라보았다.
기사는 그런 모습에 개의치 않고, 남자에게 말했다.
“3 황자가 다시 움직입니다.”
기사의 말에 남자가 기지개를 켰다.
“역시, 아니었나 보군.”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기사는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네. 이 영지는 교단의 비밀 신전이 있기에는 제국과 너무 가까웠습니다.”
“그렇지? 그런데 왜, 거기로 간 걸까? 전에 조직이 파내던 유적이 있던 곳이라며.”
“외진 곳에서 후속 부대를 기다렸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교단의 추살대가 그쪽으로 내려가는 중입니다.”
기사의 말에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뭐, 지금 그걸 알아볼 때는 아니니까.”
기사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네. 지금은 3 황자를 쫓아서 교단의 비밀 거점을 확인해야 합니다.”
기사의 말에 남자는 혀를 찼다.
“수백 년간 대충 잘 지냈는데, 결국 이렇게 되어버리는구먼.”
“어쩔 수 없습니다. 마왕이 봉인을 풀 때가 가까이 온 이상, 더는 같이 가기는 어려우니까요.”
“그게, 위쪽과 황태자, 아니 황제의 결정이었지.”
“네. 황제께서 보위를 이으신 이상, 이제 물러설 곳은 없습니다.”
남자는 딱딱하게 굳은 젊은 기사를 보며 혀를 찼다.
밖으로 나돌면, 좀 풀어질 줄 알았는데, 이놈은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기껏 황실 기사가 되었는데, 이렇게 외지로 돌아다니는 게 답답하지 않아?”
“제국의 10대 검호를 수행하는 일입니다. 조직과 제국을 위한다는 사명을 가진 이상 개인적인 어려움은 개의치 않습니다.”
남자는 기사의 선언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전에는 이 정도로 딱딱한 녀석이 아니었는데…….
집안끼리 친해서 어렸을 때부터 보아왔던 녀석이었고, 그의 형도 그 인연으로 조직에서 데리고 있었다.
뭔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조직과는 거리를 두려고 했었던 녀석이었는데, 그런 녀석이 카를로스 왕국을 교환학생이라는 명목으로 다녀오더니, 사람이 변해버렸다.
죽은 형 대신에 조직에도 들어오고, 황실 기사도 되었으니, 나쁘지 않은 결과긴 했지만, 사람이 너무 달라져서 그는 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속으로 혀를 차며, 말을 돌렸다.
“놈들이 우리가 추적하는 것을 눈치채지는 않았겠지?”
“네.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두 황자에게 추적자를 붙여 두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겁니다.”
“두 황자를 놓아준 뒤에, 2 황자 쪽으로는 반대파들을 모이게 하고, 3 황자는 교단의 비밀 신전을 알아내는 데 이용한다라…….”
“지금까지는 문제없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예언자와 조직의 똑똑한 놈들이 준비해 놓았던 작전이니까. 시간이 좀 바뀌고, 예언이 조금 틀린다고 쉽게 망가지지는 않겠지.”
이렇게 잘되는 것은 잘 진행되는데, 몇몇 일들은 자꾸 틀어지는지, 그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이 왕국에서 벌어진 일들도 그렇고, 제국 수도에서 벌어진 마물 사태도 그렇고.
아직도 귓가에 황태자의 분노가 들려오는 듯했다.
“알았어. 나도 준비하지. 황자가 추살대 놈들과 합친 뒤에는 좀 흔들어 놓아야 할 테니까.”
그의 말에 젊은 기사가 그에게 경례를 올렸다.
“네. 기사 요하힘. 물러가겠습니다.”
요하힘이 물러가는 것을 보고, 그도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는 갑옷을 걸치고, 침대에 누워있는 촌장의 딸 옆에 금화 하나를 던져두었다.
밖으로 나오니, 한쪽에 분노와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노인 부부가 보였다.
이 마을의 촌장 부부였다.
제국의 10대 검호에, 백작이라는 작위를 가진 그를 저런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경을 칠 일이었지만, 그는 두 사람을 그냥 놔두었다.
어차피, 이 마을은 제국에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의 딸을 강제로 취한 미안함도 있었다.
다만, 그보다 손을 쓰지 않은 진짜 이유는 그가 손을 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조직원들과 함께 마을을 떠난 뒤에도 한 명이 마을에 남았다.
그는 요하힘이라 불리는 젊은 기사였다.
그는 두려움에 떠는 마을 사람들을 보며 검을 뽑았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조직이 이 마을에 묵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할 수는 없었다.
전에는 조직이 하는 일에 반대했었지만, 그건 과거일 뿐이었다.
조직의 목표를 듣고, 형이 죽음으로 행한 일을 듣고, 요하힘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게 되었다.
제국을 위해,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을 위해, 자신은 조직의 손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손과 발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의 작은 양심은 대의를 위해 충분히 버릴 수 있었다.
그는 그런 다짐을 이어가며, 사람들을 베어갔다.
늙은이와 젊은 여성과 어린아이까지.
마을에 살아 있는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도록.
그렇게 모든 이들을 죽이고, 마을에 불을 질렀다.
검에 피가 흐르고, 열기에 몸이 벌겋게 익었지만, 그는 불타는 마을에서 빠져나오는 사람이 있는지 지켜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