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4화
제24편 적과의 동행 (1)
이어서, 영주가 두 기사와 함께 구덩이 아래로 뛰어내렸다.
쿠에에엑!
구덩이에서 마물들의 괴성이 들려왔다.
괴성과 함께 피가 하늘로 치솟았다.
구덩이 가장자리에 엎드린 채로 그 광경을 지켜보다 사냥꾼 하나가 허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말 장관이야. 정말, 귀족은 다른 걸까? 마물들을 이렇게 쉽게 죽일 수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귀족이 다르기는 무슨, 영주님이 다른 거겠지. 유적에서 본 귀족 나부랭이 중에 이렇게 하는 사람을 본 적 있어?”
“하긴, 전 영주가 보낸 기사는 마을 근처까지 내려온 마물만 상대하다가 돌아갔잖아.”
그렇게 구덩이를 보며, 사냥꾼들이 주저리주저리 떠들고 있을 때, 그들 뒤에서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맑으면서도, 요염하게 느껴지는 소녀의 목소리.
발레아였다.
“슬슬, 정리된 것 같네요. 수고하셨어요.”
그녀의 말에 사냥꾼들이 벌떡 일어섰다.
“넵!”
“감, 감사합니다!”
그들은 처음 발레아를 봤을 때와 달리, 그녀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발레아가 그들에게 함부로 한 것도 아니고, 겁을 준 것도 아니었지만, 그들은 발레아를 무서워할 수밖에 없었다.
귀신을 부리는 것 같은 무서운 그녀의 능력과 적에게 자비를 보이지 않은 그녀의 행동은 사냥꾼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충분했다.
처음 사냥꾼들은 이런 사냥에 어린 귀족 영애가 같이 온 것이 마음에 안 들어 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은 추호도 가지지 않았다.
보통 영지의 주인이자, 대단한 기사인 영주는 그 위치와 실력으로 존경과 두려움을 가지게 했지만, 발레아는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산속에서 산뜻한 드레스를 입고, 지형지물을 움직여 마물들을 학살하는 어린 소녀라니.
거기다, 지금 그 소녀는 구덩이에서 솟구치는 피를 보며 고풍스러운 지팡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사냥꾼들은 어릴 때 이야기책에서 본 마녀가 떠오를 정도였다.
그렇게 사냥꾼들이 바짝 긴장한 채로 나란히 서 있을 때, 구덩이 아래에서 기사들과 젊은 영주가 올라왔다.
기사 중 한 명은 아예 마물의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나이 든 기사도 갑옷에 적지 않은 피가 묻어 있었다.
반면, 젊은 영주는 피 묻은 대검 이외에는 몇 방울의 피만 묻어 있었다.
사냥꾼들은 역시 같은 부부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할 때, 발레아가 말했다.
“그럼, 땅을 닫을게요.”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아는 한 줄로 깊게 팬 구덩이 쪽으로 지팡이를 가리켰다.
그리고, 지팡이 끝을 구덩이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으로 쭉 움직였다.
구구구구궁.
지팡이가 움직이자, 벌어졌던 땅이 다시 차례로 입을 닫았다.
마치 열린 지퍼가 다시 닫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구덩이가 모두 메워지자, 땅 위에는 마물들과 싸웠던 흔적이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이 지팡이 정말 좋아요.”
발레아는 내 옆에 다가와, 지팡이를 쥐고 방실방실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냥꾼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우리 병사들과 기사들은 이미 익숙해져 있는지, 표정 없이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다친 병사에게 포션을 먹이고, 가져온 물을 몸에 부어 피를 씻어 내렸다.
기사들이 피를 씻어내는 것을 보고, 나도 몸을 살폈다.
생각보다 많은 피가 튀어 있었다.
“이 산맥의 마물들이 이렇게 강했나?”
이번만이 아니었다.
나는 마물들의 둥지를 쓸어버릴 때마다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봉인지의 마물만큼 강한 마물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왕국을 돌아다니며 본 마물 중에는 마물 왕 말고 이렇게 강하고 많은 마물을 본 적이 없었다.
내 물음에 사냥꾼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유적을 찾기 전에는 마물들이 많이 모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강한 마물들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많지도 않았습니다.”
“유적이 나온 뒤에는 한동안 마물이 보이지 않기도 했고요.”
“그런데, 슬슬 영역이 늘어나서 걱정하기는 했는데……. 이 정도일 줄 생각도 못 했습니다.”
유적을 찾기 전에 마물이 모였다는 것은 유적에 있었던 지팡이 때문일 터였다.
약해져 있었고, 땅속 깊이 박혀 있었지만, 영향이 아예 없진 않았을 터였다.
내가 지팡이를 가져갔으니, 그 뒤에 마물이 보이지 않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뒤에 이런 마물들이 나타났다고?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나?”
내 물음에 사냥꾼들은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제가 사냥꾼으로 있었을 때는 본 적이 없습니다.”
“……내려오는 이야기에도 이런 일에 대한 것은 없었습니다.”
바로 고개를 흔드는 사냥꾼도 있었고, 다른 사람에게 들은 말도 떠올려보려는 사냥꾼도 있었다.
어쨌거나 대답은 같았다.
“있었다면, 대전쟁 때였으려나…….”
“무슨 소리야?”
“하도 안 떠올라서…….”
사냥꾼 중 하나가 엉뚱한 말을 꺼내 다른 사냥꾼들에게 욕을 먹었지만, 그 말은 내게 한가지 가능성을 알려주었다.
‘설마, 벌써 시작된 것은 아니겠지?’
예언자가 알려준, 마왕이 봉인을 풀기 전에 마물이 인간들 땅에 쏟아져 내려온다는 그때.
벌써 그 시간이 다가온 걸까?
“괜찮아요?”
발레아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없었다.
실제로 마물들이 쏟아져 내려온 것도 아니었고, 지금은 그냥 마물들이 조금 강해진 것뿐이었다.
다만, 아무래도 준비를 더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다른 영지의 마물도 확인을 해봐야겠고.
그래서, 나는 사냥꾼들에게 말했다.
“이번 사냥은 여기서 끝내지.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방금 묻어버린 멧돼지 마물들이 이 근처에서는 제일 강한 마물들이었다.
다른 마물들은 앞에서 전부 처리했고.
다른 마물들을 잡으려면 산맥 안으로 한참을 들어가야 했다.
“네. 충분한 것 이상입니다.”
내 말에 사냥꾼들이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보다 빠른 귀환이지만, 내가 생각해도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럼 돌아가지.”
내 말에 다들 기뻐했다.
이런 험난한 곳에서 숙식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멧돼지 마물을 잡는 것을 끝으로 마물 사냥을 끝냈다.
우리는 바로 사냥꾼 마을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레스티입니다. 자작님을 찾는 자들이 있어서 모시고 왔습니다.”
사냥꾼 마을에는 오랜만에 보는 용병 차림의 레스티가 사람들을 데리고 와 있었다.
그가 데리고 온 사람은 두 남자와 두 여성이었다.
남자 한 명은 깊게 로브를 눌러쓰고 있어 누군지 알 수 없었고, 기사 복장을 한 남자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두 여성은 나도 아는 사람이었다.
“누님을 여기서 또 보는군요.”
“그러게나 말이야.”
[인사드립니다.]
교단의 사제가 된 엘레나와 같은 사제이자 셀린 교단의 스파이인 조아나였다.
그리고, 처음 보는 기사도 내게 인사를 했다.
“신께 영광을. 신관 기사 디터입니다.”
나는 기사의 인사에 눈을 가늘게 떴다.
내 떨떠름한 반응에 기사가 의문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나는 그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신관 기사라는 놈의 몸에서 피 냄새가 가득 느껴졌다.
수많은 사람을 죽인 기사였다. 거기다, 그가 가진 마나도 익숙했다.
나는 이렇게 피 냄새를 가득 풍기고, 익숙한 마나를 가졌던 신관 기사를 전에 본 적이 있었다.
봉인지에 있는 셀린 신전의 유적에서 만났던 신관 기사.
‘추살대’라 불리는 자들이었다.
나는 황당한 눈으로 레스티를 쳐다보았다.
이단을 척살하기 위해 지옥 끝까지 찾아간다는 교단의 추살대와 같이 찾아오다니,
셀린의 신관이 미친 게 분명했다.
“제가 이분들을 모셔온 것은 이분 때문입니다.”
다행히 레스티는 미치지 않은 듯했다.
그는 내게 나머지 한 사람을 소개했다.
“제국의 3 황자님이십니다.”
소개를 받은 남자가 로브를 뒤로 젖혔다.
레스티의 말대로였다.
로브를 젖히자, 3 황자의 잘생긴 얼굴이 나타났다.
세파에 시달렸는지, 전보다 핼쑥해진 것 같았지만, 아직도 얼굴이 반짝이고 있었다.
분명 3 황자는 맞았지만, 그는 이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왜, 촌장의 집에 나 혼자 따로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제국 3 황자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없겠지만, 이건 누구에게도 보여줄수 없을 터였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당연한 내 물음에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결국, 3 황자를 바라보았다.
설명한 사람이 결정된 것이다.
3 황자는 쓰게 웃었다.
당연하게도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쓰게 웃는 것으로 끝낸 것을 보니, 뭔가 상황이 크게 안 좋아진 모양이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면…….”
3 황자가 사정을 설명했다.
뭔가 장황한 내용과 억울함이 가득 담긴 이야기였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그의 말을 줄이면 상황 자체는 간단했다.
황태자가 아버지인 황제를 죽이고, 황위를 차지했고, 다른 동생들을 죽이려는 상황.
황자는 살기 위해 교단의 도움을 받아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간단했지만, 간단한 상황이 아니었다.
황태자가 황제를 죽여버렸다고?
제국은 패륜을 벌여도 괜찮은 나라였나?
“형님은 일을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소. 백성들은 황제께서 급작스럽게 서거하셨다고 알고 있지. 귀족들은 대부분 상황을 알고 있지만, 이미 회유된 자들이 더 많아.”
황제와 함께 온건파의 수장인 재상도 목이 댕강 잘려 나간 모양이었다.
3 황자의 말에 따르면 황태자의 패륜을 알고 분노한 귀족도 적지 않지만, 그게 반란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거기다 힘이 있는 몇몇 귀족들은 달아난 2 황자 쪽에 붙은 모양이고.
“그런데, 왜 저에게 오신 것인지…….”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오. 마물 사냥에서 본 귀하의 능력이라면 나를 위험에서 지켜줄 수 있을 게 분명해.”
아니, 교단의 도움으로 도망쳤다면. 그냥 교단과 함께 달아나면 되는 거 아냐?
내가 기사를 쳐다보자, 추살대 기사는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얼마 뒤에 저희 기사단과 합류하기로 되어있습니다. 다만, 황자님이 계속 우기셔서 방향을 바꿔야 했습니다.”
신전기사, 아니 추살대 기사는 지금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호위대를 준비했는데, 호위 대상이 다른 사람의 호위를 받겠다고 난리를 치는 상황이었다.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오케이. 상황이 황당했지만,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 레스티가 이 일에 끼어든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어디로 가는 겁니까?”
이미 3 황자는 이곳까지 제국을 벗어난 상태였다.
내 기준으로는 충분히 도망친 것 같았다.
“남쪽에 있는 저희 교단의 신전입니다. 일이 조용해질 때까지 피해계실 곳입니다.”
기사의 말에 나는 레스티를 쳐다보았다.
레스티가 다른 사람 모르게 신호를 보냈다.
내 생각이 맞았다는 뜻이었다.
레스티는 그 신전이 목표였다.
남쪽에 있다는 교단의 신전.
분명 그곳은 셀린의 신전처럼 고대 왕국의 유적이 분명했다.
교단의 비밀이 잠들어 있는.
셀린 교단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