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3화
제23편 영주 알렉스 (2)
급하지 않은 여유로운 여행길.
마물 사냥을 하기 위해 영지 북쪽으로 향하는 영주의 순행이었다.
일행의 선두에는 디오구 기사가 깃발을 들고 나아가고 있었고, 그 뒤는 우고 기사가 따르고 있었다.
저번 순행에는 미겔이 따라나섰으니, 이번에는 우고 기사의 차례였다.
그의 뒤에는 나와 발레아가 나란히 말을 몰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나란히 다니는 경우가 많아졌다.
더구나 영지의 다른 이들도 우리가 이렇게 다니는 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발레아를 자작 부인으로 부르는 사람이 나올 정도였다.
발레아도 개의치 않고, 솔직히 나도 편했기에 우리는 작은 오해는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내 옆에서 말을 모는 발레아의 허리에는 길지 않은 지팡이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공국 성벽 밖에서 싸우던 상대에게서 구한 지팡이, 대공녀가 수리해준 지팡이였다.
처음부터 그 지팡이는 발레아에게 줄 생각이었다.
둘 다 비슷한 능력을 쓰고 있으니, 발레아에게도 유용할 게 분명했다.
발레아는 지팡이를 받고 무척 기뻐했다.
그녀의 능력에 맞는 유물이니 좋아할 만도 했지만, 발레아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기뻐했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듯했지만, 더 좋아해 주는 것이니 그냥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열심히 달린 덕분인지, 이제 산맥은 일행의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산맥을 보고 발레아가 말했다.
“생각보다 늦었네요.”
그녀의 말에 나는 쓰게 웃었다.
“별수 없지. 순행을 나왔는데, 바로 사냥꾼 마을로 향할 수는 없으니까.”
출발하기 전, 오헨 기사를 물아센 영지로 부르고, 내가 없을 때를 대비해서 사람들에게 일을 분배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사람들을 너무 잘 뽑은 모양이었다.
내가 마물 사냥을 가기 위해 자리를 비운다고 하자, 내가 뽑은 관료들과 집사장, 그리고 물아센 영지로 부른 오헨 기사까지 내 결정에 반대했다.
마물 사냥에 영주가 직접 나설 필요가 없다는 이유였다.
그들은 기사와 병사들만 보내도 충분하다고 말했다.
우고와 미겔 기사만 해도, 웬만한 영지의 기사단장 급이고, 내 자리를 대신하라고 부른 오헨 기사까지 자기가 가겠다고 나서버리니.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물론, 영주의 명령으로 일을 진행해도 상관이 없긴 했지만, 그런 식으로 하려면 제대로 조언하는 이런 부하들이 필요 없었다.
결국, 나는 순행이라는 핑계로 길을 나서게 되었다.
순행에 나섰는데, 바로 마물을 잡겠다고 산맥으로 향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이리저리 영지 안에 있는 마을들을 들려서 상황을 살펴야 했다.
다행히 마을들은 큰 문제가 없었다.
물론, 전생 기준으로는 영 엉망인 부분도 많았지만, 이쪽 세상 기준으로는 이 정도도 감지덕지했다.
세금을 깎아주고, 치안을 잡고, 등쳐먹던 놈들을 잡아들여 주는 것만으로도 영지민들은 충분히 만족했다.
봄 수확도 끝나서 굶을 일도 줄어들어서인지, 방문한 마을 사람들은 영주인 내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다.
그렇게 마을들을 들리며 길을 나아가다 보니, 곧바로 오는 시간보다 훨씬 더 걸려버렸다.
어쨌거나, 이제는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했다.
“다들 잘 따라오고 있나?”
나는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네. 걱정 없습니다.”
후안이 십여 명의 병사들을 대표해서 내게 말했다.
“헉, 헉, 네, 네, 저도 괜찮습니다.”
그 옆에 숨을 헐떡이던 젊은 남자도 내 물음에 열심히 대답했다.
그는 마지막에 뽑은 세금 징수원이었다.
그는 다른 이들보다 욕심도 있어 보이고, 젊어서 그런지 체력도 좋아 보여서, 순행에 데려왔다.
잘하면, 세금 징수원 이외의 일에도 쓸만해 보였는데, 아쉽게도 생각보다 힘들어하는 게 눈에 보였다.
하기야, 평범한 일반인이었으니, 힘들어하는 게 당연할지도.
“조금만 더 가면 된대요. 힘내세요.”
힘들어하는 그를 보고, 발레아가 고개를 돌려, 그에게 한마디 위로를 건넸다.
그는 얼굴이 빨갛게 변하더니, 몸에 힘을 꽉 주었다.
바로 전에까지 헉헉거리던 젊은이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모습에 작게 혀를 찼다.
아직까지, 발레아의 본성을 본 적이 없으니, 그에게는 천사가 미소를 지어준 것처럼 보일 터였다.
나는 얼마 안 있어, 충격을 받게 될, 그에게 속으로 위로를 보냈다.
그렇게 나는 일행과 함께 산맥의 진입로로 들어섰다.
전에 이곳에서 사냥꾼으로 위장한 조직원을 만났었는데.
이번에는 진짜 사냥꾼이 마중 나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마을 사람들이 영주님이 오시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주가 오는 걸 기다리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입에 발린 소리는 하지 않는 게 좋아.”
“하하, 저희도 전에는 제발 안 와주었으면 했습죠. 하지만, 영주님은 저희를 구해주셨잖습니까.”
사냥꾼의 말에 다시 살펴보니, 저번에 유적에서 구해준 사냥꾼이었다.
“거기다, 세금도 면제해 주시고, 식량도 남겨 주셔서 겨우 마을이 제모습을 되찾았습니다.”
사람이 많이 죽어서 마을에 좀 많이 남겨놓고 오기는 했었다.
그 뒤에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 다행히 잘 이겨낸 모양이었다.
그렇게 사냥꾼의 안내를 받으며 우리는 사냥꾼의 마을에 도착했다.
“알렉스 디 샤를 자작님의 행차 시다. 모두 고개를 조아려라!”
디오구 기사가 깃발을 들고 고함을 지르자, 마을 입구까지 나와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이런 행사에 익숙해져 버린 나는 고개를 숙인 사람들을 살피며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를 안내한 사냥꾼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의 표정도, 마을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사냥꾼 마을 주민들이 나를 기다렸다는 말도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다.
그날 저녁 식사는 이런 마을에서 준비하기에는 과한 만찬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을 중앙에 커다란 멧돼지가 걸리고, 마을 사람들이 열심히 준비한 음식들이 차례로 나왔다.
기꺼운 표정으로 가져온 것이라, 나도 일행도 즐거운 마음으로 식사를 했다.
그리고, 그들은 기사와 병사들에게는 마을 회관을, 발레아와 나에게는 촌장 집을 내주었다.
뭐, 발레아와 같이 왔으니, 이렇게 되는 게 당연했다.
앞서 마을에서도 여러 번 겪었고.
당연히 발레아와 나는 다른 방에서 편하게 잠을 잤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사냥꾼들과 함께 마을을 떠났다.
사냥에 참여할 수 없는 세금 징수원은 홀로 마을에 남게 되었다.
나는 그를 남기면서, 새로 뽑은 촌장에게 말해주었다.
“세금 면제는 이번뿐이다. 다음 세금부터는 이 징수원…… 이름이 뭐였지?”
내가 쳐다보자, 젊은 징수원은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누, 누누입니다.”
“아무튼 이 징수원이 받으러 올 거다. 우리가 다녀오는 동안 둘이 잘 이야기를 나누고, 과하게 느껴지면 나에게 따로 이야기하도록.”
내 말에 한쪽 팔이 없는 촌장이 씩 웃었다.
유적 일로 한쪽 팔을 못 쓰게 되었지만, 촌장도 사냥꾼 출신이라 기사인 우고와 비길만한 덩치였다.
“알겠습니다. 좋게 이야기하겠습니다.”
누누 징수원의 표정이 몹시 안 좋게 변했지만, 나는 그를 외면했다.
훌륭한 세금 징수원이 되려면, 많은 고난을 이겨낼 필요가 있었다.
권력과 힘으로 찍어누르기만 해서는 다른 평범한 세금 징수원과 다를 바가 없었다.
‘힘내라 누누! 너는 내 눈에 들었으니, 열심히만 따라오면 내가 크게 쓸 거다!’
그가 원하는 것과는 다를지 모르겠지만, 욕심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을 보니, 잘 이겨낼 수 있을 듯했다.
“암, 뭔가 얻으려면 열심히 굴러야 해. 날로 먹다니, 그건 내가 용서할 수 없어.”
억울해 보이는 누누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나는 일행과 함께 산을 올랐다.
사냥꾼들과 함께한 첫 마물 사냥은 생각보다 편했다.
사냥꾼들은 계속 마물들의 서식지를 파악해 오고 있어서, 마물들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었다.
더욱이, 사람을 보면 달려드는 마물들 습성 덕에, 다른 사냥처럼 사냥감의 도주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기사가 나서면 기세를 느끼고 숨어버리는 마물도 있었지만, 그런 마물들은 병사들과 사냥꾼들을 미끼로 유인하면 그만이었다.
더군다나, 우리 일행에는 치트키로 불릴만한 나와 발레아가 있었다.
크고 작은 바위가 가득한 산비탈.
사람들도 동물들도 접근하지 않던 그곳에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비탈 아래로 내 달리는 병사와 사냥꾼들이었다.
그들은 바위를 건너뛰며, 미친 듯이 아래로 달려가고 있었다.
거기다, 사냥꾼들은 달리며, 옆 사람에게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젠장! 너무 많잖아!”
“누가 확인한 거야. 이렇게 많이 있으면 말을 해야 했었잖아!”
“아니, 그때는 이 정도가 아니었다니까.”
상황이 안 좋게 되었는지, 사냥꾼들은 원인을 만든 동료에게 욕을 퍼부었고, 원인 제공자가 된 사냥꾼은 열심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잔말 말고 달려! 깔려 죽겠다!”
하지만, 그들의 외침은 뒤를 따라오던 동료의 말에 쑥 들어갔다.
그의 말대로 뒤에서 엄청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그리고, 이들을 쫓아 산비탈을 달려 내려오는 멧돼지 떼가 보였다.
온몸에 고름을 가득 달고 있는 거대한 멧돼지 떼였다.
집채만 한 멧돼지 수십 마리가 쏟아져 내려오는 모습은 거대한 산사태 같았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힘내십시오!”
그 소리에 질겁을 한 사냥꾼에게 후안이 소리쳤다.
후안도 병사 한 명을 어깨에 메고 그들과 함께 달리고 있었다.
그가 어깨에 멘 병사는 유인을 시작할 때, 마물에 받친 병사였다.
마지막 순간에 후안이 빼내 주어 정통으로 맞지는 않았지만, 한방에 뼈 여러 개가 부러지고 말았다.
이것을 보더라도, 확실히 일반인은 마물을 상대할 수 없었다.
후안도 마나를 담은 창으로 열심히 찔러봤지만, 겨우 피부를 뚫을 뿐이었다.
이제 겨우 초급 수련 기사 정도의 마나만 담을 수 있는 그로서는 이 정도 마물을 상대하기는 무리였다.
하지만, 후안은 실망하지 않았다.
워낙 쟁쟁한 사람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쟁쟁한 주군을 믿고 있었다.
그렇지만, 사냥꾼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루듯이 달려내오는 멧돼지들과 사람의 속도가 같을 리가 없었다.
순식간에 인간은 멧돼지 마물들에게 따라잡혔다.
“으악! 따라잡혔다!”
“유적에서도 살아남았는데, 여기서 끝이냐!”
“멧돼지에게 밟혀 죽게 된다니, 며칠 전 먹은 멧돼지가 저주하나 보다!”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멧돼지들의 콧김에 사냥꾼들은 호들갑을 떨어댔고, 그 모습에 후안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헛소리 말고 엎드려요!”
“여기였어?”
“살았다!”
그들은 후안의 말에 바로 땅에 엎어졌다.
바로 뒤에 마물들이 따라오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엎드린 그들의 머리 위로 빛의 선들이 지나갔다.
서걱, 서걱.
선두에 선 멧돼지 마물들의 몸이 마구 잘려 나갔다.
쏟아지는 살점을 뚫고, 뒤따라오던 마물들이 튀어나왔지만, 그 마물들도 더 앞으로 달려가지는 못했다.
쿠구구구구궁.
마물들이 밟은 땅이 무너져내린 것이다.
마치 원래부터 그런 것처럼 산비탈 일부분이 아래로 꺼져버렸다.
마물들이 구덩이 아래로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