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1화
제21편 귀환 파티 (2)
발레아가 미소로 주위의 접근을 모두 차단해 준 덕에, 이어진 파티는 힘들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발레아에게 분산되었고, 곧 나보다 훨씬 중요한 사람들이 입장했기 때문이었다.
“행정부의 재상이자, 귀족회의의 고문관이신 안드레스 데 그레시아 공작님과 공작부인이 입장하십니다.”
먼저 공작이 공작부인과 함께 파티장으로 들어섰다.
공작은 언제나처럼 무표정했지만, 공작부인은 전보다 얼굴이 밝았다.
아무래도 공작부인은 공작령보다 수도의 사교계가 취향에 맞는 모양이었다.
공작 부부 뒤에는 마누엘이 따라 들어왔다.
아무래도 내가 눈이 너무 높아진 모양이었다.
마누엘도 왕국의 제일가는 실권자인 공작의 아들이니, 어디서 꿀릴 게 없는 청년이었다.
하지만, 왜 이리 없어 보이는지…….
나름 서기관으로 일도 열심히 하고, 약혼까지 했으니, 장래가 밝은 청년일 텐데.
저렇게 같이 나오니, 내 눈에는 아직도 공작부인의 치맛자락을 벗어나지 못한 철부지로 보일 뿐이었다.
공작과 슬쩍 눈이 마주친 것 같았지만, 그는 곧 다른 귀족들과 인사를 하느라 이쪽에는 신경도 쓰지 못했다.
공작부인도 마누엘을 데리고, 파티장을 종횡무진으로 누비고 다녔다.
그렇게 공작 부부가 한바탕 시선을 끈 뒤에, 이번에는 왕국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 들어왔다.
어린 여왕의 입장이었다.
“카를로스 왕국의 왕이자, 귀족 중의 귀족, 기사 중의 기사이신 아이샤 데 카를로스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집사의 말에 모두 대화를 멈추고, 자세를 바로 했다.
이어, 파티장의 음악이 바뀌고, 아이샤가 홀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샤는 머리에 우아한 왕관을 쓰고, 낮에 보았을 때와 다른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여왕님 예쁘시죠?”
발레아가 작게 속삭이는 말에 나는 주위에 작은 방음벽을 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컸네요.”
내전 전에는 아이처럼 보이던 아이샤였지만, 이제는 한 명의 소녀처럼 보였다.
물론, 키도 아직 작고, 젖살도 그대로였지만.
그녀의 깊은 눈과 어른스러운 표정은, 그녀의 나이를 몇 살은 더 먹은 것처럼 보이게 했다.
내 말에 발레아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흔들면서도 그녀는 뭔가 안심이 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린 여왕이 들어오자, 파티에 와 있던 모든 사람이 여왕에게 고개를 숙였다.
여왕은 고개를 숙인 사람들을 지나, 홀 안쪽의 왕좌에 앉았다.
“모두 고개를 들어라.”
여왕의 말에 사람들은 고개를 들었고.
“이 파티는 제국으로 떠났던 사절단이 무사히 돌아온 기념으로 개최한 파티다. 사절단은 오랜만에 고국의 파티를 즐기고, 다른 이들은 사절단에게서 여러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어진 여왕의 무난한 축사에 모두 박사로 화답했다.
짝짝짝.
그리고, 다시 처음의 파티 분위기로 돌아갔다.
다만, 사람들의 시선은 전과 달리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공작 일가와 여왕이 내게 쏠렸던 시선을 가져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사절단에 참가했던 관료들과 시드 백작, 카트린 주위에도 사람들이 몰렸다.
이 파티에는 사절단을 호위했던 왕실 기사들도 참가했지만, 아쉽게도 그들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카트린이 발레아를 데려가 버렸다.
“발레아! 네가 좀 도와주어야겠어. 실제로 일은 네가 거의 다 했잖아.”
카트린이 발레아를 끌고 가버리자, 다시 사람들이 내게 다가오려 하는 게 느껴졌지만, 이번에도 그들은 내게 말을 걸지 못했다.
대단한 사람이 내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잘생긴 중년 귀족. 이 왕국의 재상인 그레시아 공작이었다.
그는 잔을 하나 들고 내 옆에 섰다.
그는 파티장을 둘러보며 내게 말을 걸었다.
“자작도 파티의 주인공 중의 한 명일 텐데. 왜 이런 구석에 있지?”
자작이라…….
아들에게 할만한 호칭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불러주니 나도 편했다.
“습관이 쉽게 바뀌는 게 아니라서요. 이곳에서 보는 장면도 꽤 재미있고요.”
내 대답에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는 사실을 이야기한 것뿐이었지만, 공작은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덕분에 대화가 끊어져 버렸고, 나는 다른 주제로 대화를 돌려야 했다.
“그보다, 사절단 귀환 축하 자리치고는 파티가 화려하네요.”
나는 대화를 돌리는 김에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내 말에 공작은 마나를 둘러 주변에 방음벽을 만들었다.
“그건, 여왕의 치적을 홍보하는 파티니까.”
이어서 공작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 파티의 진짜 목적을 이야기해 주었다.
“아직도 수도의 귀족들은 여전한가 보군요.”
왕위에 오른 지도 몇 개월이 지났는데도, 여왕을 방해하는 이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앞으로도 달라지지는 않겠지. 곧 있으면 여왕의 남편감을 찾느라 또 난리일 테고.”
벌써? 아이샤의 나이는 아직 10대 초반이었다.
“몇 년은 남았을 텐데…….”
“다들 빨리 정하려 할 거다. 지금도 어린 여왕에게 휘둘리는 판이라……. 고삐를 죄고 싶어 하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여왕을 마음대로 휘두르지 못한다고, 남편을 붙일 생각을 하다니…….
나는 힐끗 공작을 쳐다보았다.
“공작님도 그중에 한 사람이겠군요.”
“글쎄, 여왕이 제어할 만한 남자가 있을지는 모르겠군.”
공작은 내 말에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계속 귀족들의 인사를 받는 중인 여왕을 보며 작게 혀를 찼다.
“벌써 결혼 이야기라니, 역시 왕도 할 만한 게 못 되는군요.”
“아니, 그런 말은 될 수 없는 자의 외면일 뿐이다.”
내 푸념에 묵직한 대답이 넘어왔다.
나는 다시 공작을 보았다.
공작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왕 바로 아래. 일인 지하, 만인 지상에 오른 남자는 아직도 부족한 것일까?
“그런가요.”
이야기가 딱딱해져서인지, 이번에는 공작이 주제를 돌렸다.
“자작도 결혼할 때가 된 것 같은데.”
문제는 그게 영 귀찮은 주제였다.
“바빠서 생각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손위 형이 아직 결혼을 안 하기도 했고요.”
“마누엘은 여름에 할 거다.”
그런 것치고는 공작부인이 너무 열심히 아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것도 딸을 가진 귀족들에게.
내가 그쪽으로 시선을 보내자, 공작은 작게 혀를 찼다.
저 광경은 공작도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어찌 되었건 앞으로 자작에게 매파가 많이 갈 거다. 본인의 실력으로 작위를 얻게 되었다는 것을 모두 알게 되었으니, 왕국에서 자작을 눈여겨보지 않을 사람은 없겠지.”
공작 말대로, 이 파티에서도 나를 눈여겨보는 귀족들 대부분이 내 결혼에 관심이 있어서일 터였다.
자신의 딸과 가족을 소개하거나, 아니면 중매라도 해볼 생각일 게 분명했다.
“다만, 쉽게 결정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자작은 여왕과 가깝고, 내 자식이기도 하니, 결혼에 정치를 떼놓을 수 없을 테니까.”
“아직 결혼 생각도 없지만, 글쎄요. 그런 것까지 생각하면서 상대를 결정하고 싶지는 않군요.”
말을 하면서 내 눈은 무의식적으로 발레아를 스쳐 지나갔다.
“아마, 그때가 되면 제 결혼은 다들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적어도 몇 년은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시간을 반복하는 내 능력 때문이라도, 결혼 생활이 쉬울 리가 없었다.
거기다, 가까운 미래에 마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마왕까지 봉인을 깬다는 말을 들었는데, 결혼을 생각할 리가 없었다.
“그건 무슨 뜻이지?”
내 말에 공작은 이마를 찡그렸다.
“글쎄요. 아직 말씀드릴 때는 아닌 것 같네요.”
여왕도 아니고, 공작에게 이 모든 사실을 말해 줄 이유가 없었다.
말해 봤자, 쉽게 믿지도 않을 테고.
적어도 뭔가 징조가 보이기 전까지는 몇몇 동료들에게만 말할 생각이었다.
“너는 어렸을 때부터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였는데, 이제는 더 알 수가 없구나.”
공작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주위에 펼쳐놓은 방음벽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어쨌거나, 무사히 다녀와서 다행이다. 수고했다.”
평범한 말이었다.
집에 돌아온 가족에게 전하는 평범한 인사.
하지만, 나는 그 인사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설마, 공작이 잘 다녀왔다고 말하려고 나에게 온 건 아니겠지?
공작은 떠나기 전, 공작답지 않게 주저하며 내게 말했다.
“아만다에게 안부 전해줘라.”
하지만, 나는 그의 부탁을 거절했다.
“직접 말씀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가…….”
공작은 내 대답에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멀어져갔다.
공작이 떠난 뒤, 예상대로 나는 귀족들에게 파티 끝까지 시달렸다.
귀족들은 정중한 어조로 자신을 소개했다.
그들은 나와 안면을 익히기를 원했고, 자신들의 모임에 나와주기를 원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딸과 손녀, 조카를 소개했다.
사람들에게 시달리던 나는, 아들을 잃은 귀족이 자신의 며느리까지 소개하는 것을 보고 질려버리고 말았다.
나는 결국, 파티를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발레아의 도움을 받아 파티장을 탈출했다.
그렇게 축하 파티가 끝나고, 다음날 나와 발레아는 여왕을 따로 만나게 되었다.
여왕 정도 되면 소문 때문이라도 개인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게 어려웠지만, 발레아와 나는 상관없었다.
여왕과 만나는 자리는, ‘여왕의 다과모임’. 아카데미에서 친했던 친구들과의 모임이었기 때문이었다.
발레아와 나, 여왕 이외에도, 몇 사람이 더 있었지만, 지금 수도에 있는 것은 발레아와 나밖에 없었다.
여왕과 비슷한 어린 나이라는 훌륭한 핑계도 있으니, 우리 세 사람이 만나는 것을 의심할 사람은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오랜만에 만난 동기들이 수다를 떠는 자리라고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할 이야기는 그런 게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발레아의 도움으로 추적자를 쓰러뜨릴 수 있었습니다. 흔적은 남기지 않았으니, 제국과 조직은 알지 못할 겁니다.”
나는 여왕에게 제국을 다녀오는 동안 벌어진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지팡이를 원하던 두 여성과 유적에서 벌어진 일. 의심스러운 황태자와 수도 외곽에 자리한 조직의 아지트까지.
여왕은 눈을 반짝이며 발레아와 내 이야기를 들었다.
여왕에게 보고하는 자리였지만, 이렇게 다과를 앞에 두고 응접실에서 이야기하고 있으니.
아이에게 모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 같았다.
나는 최대한 자세히 말해 주었지만, 예언자에게 들었던 마왕의 부활은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죽어서 과거로 가는 내 능력을 말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대신 나는 추측인 것처럼 비슷한 이야기를 꺼냈다.
“뭔가, 예언가가 속해 있는 조직은 애초에 큰 목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나라의 왕자들을 움직여 내전을 일으키고, 옆 나라에 마물을 끌어들이는 지팡이를 심어야 할 정도의 일이겠죠.”
여왕은 내 추측을 바로 알아들었다.
“마물, 봉인지의 마물들이 움직일 거라는 건가요?”
“최악의 경우 마왕이 깨어날 수도 있고요.”
“설마, 그렇게까지는…….”
마지막 내 말에는 여왕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마물들이 움직이면, 내 말이 기억날 터였다.
그렇게 여왕에게 고민을 넘겨준 뒤, 나는 마지막으로 기사단장을 만난 뒤, 영지로 돌아왔다.
영지에 있는 오헨 기사가 두 팔을 벌리고 나를 맞이했다.
내가 제국에 다녀온 사이, 영지에는 일거리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