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9화
제19편 사절단 귀환 (3)
발레아는 자신을 불러내는 글을 보자, 바로 내게 알렸다.
그녀도 마찬가지로 내 방 벽에 글을 남긴 것이었다.
당연히 나는 몰래 발레아를 따라왔다.
발레아는 이동하면서 영역을 펼쳐서 나를 최대한 숨겨 주었다.
그건 상대와 마주쳤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발레아가 만든 틈을 이용해서 나는 상대의 지팡이를 자른 것이다.
“데이트했다는 상대가 너였지? 그런데, 이렇게 강하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당연히 그걸 아는 사람들은 모두 내게 죽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이런 실력을 숨기고 있을 줄이야. 우리가 뭔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걸까?”
상대는 뭔가 고심에 잠긴 듯했지만, 나는 그녀에게 시간을 줄 생각이 없었다.
나는 신검을 움켜쥐고, 발레아에게 말했다.
“지원 부탁해요.”
“맡겨 두세요.”
상대는 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
발레아의 실력이 일취월장했다고 하더라도, 직접 싸우면 실력이 차이 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를 돕고, 상대를 방해하는 것만이라면, 발레아의 능력은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달려들려고 하자, 상대는 지팡이를 던져버리고, 내게 양팔을 뻗었다.
“하, 어떻게 알고 지팡이를 잘랐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질 것 같나?”
그녀의 말처럼 맨손으로도 그녀는 세상을 얼려갔다.
그녀를 중심으로 얼어붙는 공간이 점점 커졌다.
마른 땅이 얼어붙고, 공기 중의 수분이 얼어붙어 냉기의 안개가 되었다.
발레아가 막아 보려 했지만, 그녀의 영역은 상대의 냉기에 계속 밀려났다.
그리고, 나는 다가오는 안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지팡이를 먼저 자른 것은 전에도 상대가 그 지팡이를 쓰는 것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언가를 죽인 뒤, 나를 죽이기 위해 찾아온 제국의 실력자 중에는 지금 내 앞에 있는 여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도, 그녀 때문에 무척이나 고생했고, 결국 죽어야만 했다.
물론, 그녀의 손에 죽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냉기를 피하려다가 다른 사람 손에 죽고 말았으니, 그녀의 손에 죽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 싸움에서 나는 그녀의 능력을 최대한 파악해놓았다.
지금 내 앞에서 냉기를 퍼트리는 여성의 능력은 사실 사물의 온도를 낮추는 능력이 아니었다.
그녀의 능력은 주변의 물, 혹은 액체를 조작하는 능력이었다.
물을 움직이고, 물의 온도와 부피를 바꾸는 능력.
땅을 치솟게 한 것도, 주변을 물을 끌어들이는 동시에 그 물을 얼려 땅을 밀어 올린 것이었고.
지금 내 앞에 눈안개를 만들어 낸 것도, 주변의 물을 끌어들여서 그 물을 얼린 것이었다.
전자레인지의 강화 버전이라고 할까.
따지고 보면 냉기 능력보다 더 무서운 능력이었다.
물을 다루다니.
발레아가 날린 수풀이나, 나뭇가지도 얼린 것을 보니, 생명체 안의 물도 제한이 없었다.
그렇다면,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대단위 군대도 일시에 전멸시킬 수 있는 무시무시한 능력이었다.
다행이라면, 이 능력도 다른 능력들처럼 다른 사람의 마나에 간섭을 받는다는 점이었다.
마나를 다루는 기사나 각성자는 그녀에게서 몸속의 물을 지킬 수 있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주변의 추위는 그대로 느낄 수밖에 없었고, 또한 열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전에 싸워본 바로는, 그녀 말대로 지팡이가 뭔가 대단한 유물은 아니었다.
능력을 마구 강화하는 것도 아니고, 마나를 엄청나게 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능력을 조금 더 세밀하게 조절할 수 있게 해 주는 유물일 뿐이었다.
지금처럼 광역으로 능력을 퍼트리는 것이 아닌, 지정한 방향으로만 능력을 보내는 유물.
지팡이를 사용하면 쓸데없는 피해를 줄일 수도 있고, 사용하는 마나의 양도 줄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지켜본 바로는 그런 이유로 지팡이를 쓰는 게 아니었다.
푹.
나는 눈안개 속으로 뛰어들었다.
살을 에는 추위.
입에서 나오는 입김도 바로 얼어붙을 정도였다.
마나를 열심히 돌려서 추위를 몰아내 보았지만, 나조차도 추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거기다, 눈 안개는 내가 움직이는 것을 방해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눈안개는 내 몸을 얼리고, 밀어냈다.
얼음물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
그래도 움직일 수 있었다.
죽기 전 마지막 싸움에서의 느낌과는 전혀 달랐다.
그때는 냉기에 닿기만 해도, 피가 터져 나올 정도로 차가웠었다.
절대 영도가 아닐까 하는 그런 추위. 지금처럼 사람이 추위를 느낄 만한 그런 온도가 아니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단 하나. 지팡이 때문이었다.
푸악!
나는 검을 휘둘러, 눈안개를 가르고, 여성 앞에 다가갔다.
눈 안개가 시야를 방해했지만, 충분히 가까워진 거리 덕에 상대를 볼 수 있었다.
여성, 아 맞다. 전에 싸울 때 이름을 들었었다. 하이케라고 했는데.
아무튼 눈안개 뒤에 나타난 그녀는 나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지팡이가 없으니, 능력을 한점에 집중시킬 수가 없었고, 그 피해를 그녀 자신도 입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물론, 자신의 능력이니, 면역도 있을 테고, 몸속의 물을 뜨겁게 해서 추위를 일정 부분 막아 낼 수 있었겠지만, 그건 나와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자신이 다치지 않을 정도로 능력을 제한한 채로 싸워야 했다.
물론 그 제한된 능력도 약한 것은 아니었다.
쩌저적.
결국, 나도 피부가 갈라지고, 피가 튀었다.
내가 다가가자, 눈안개가 날카로운 가시처럼 변해 주위를 휩쓴 것이다.
다만, 내 손에 들고 있는 검은 신검이었다.
피륙에 난 상처 정도는 상처가 나는 동시에 치료할 수 있었다.
나는 하이케의 몸 주위에 펼쳐진 반투명한 막을 보고 피식 웃고 말았다.
결국, 그녀는 자신에게 올 피해를 방어막 유물을 써서 막은 것이었다.
확실히 대체할 만한 유물은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 유물은 그렇게 강한 유물처럼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나도 혼자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눈 안개가 가시가 달린 눈 폭풍이 되어 주변을 쓸어버리려고 할 때, 내 뒤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살랑이는 바람이 아니라, 태풍 같은 바람이었다.
바람은 눈 폭풍을 날려버리고, 공기 중의 수분도 날려버렸다.
발레아가 한 일이었다.
시야가 다시 환해졌다.
놀란 얼굴의 중년 여성이 보였다.
집시 차림의 여성.
제국 귀족이 저런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신기했지만, 나는 그 궁금증을 묻어두고는 상대를 향해 몸을 날렸다.
쾅! 캉! 콰과과과!
얼음기둥이 솟구치고, 검에서 빛나는 선이 튀어 나갔다.
보이지 않는 검이 얼음기둥을 가르고, 물을 가득 머금은 땅이 수증기 폭발로 터져나갔다.
지팡이가 없었지만, 상대는 잘 싸웠다.
방어막으로 막아가며, 그렇지 못한 것은 그냥 몸으로 막으며 그녀는 열심히 나와 싸워갔다.
그렇지만, 싸움은 오래지 않아 끝이 났다.
상대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지팡이를 미리 잘라낸 것과 2 대 1이었다는 점도 있었지만.
그보다, 고통에 대한 내성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나와 달리 고통을 참아내지 못했다.
살이 갈라지고,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고통도.
피가 흘러나와 얼어붙는 느낌도.
창자가 흘러나와 눈앞에 꿈틀거리는 것도, 이겨내지 못했다.
“어, 어떻게 참, 참아낼 수 있었던 거지?”
그녀는 바닥에 누운 채로 내게 물었다.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내 몸을 확인했다.
이번 싸움에서도 옷은 누더기로 변해 버렸다.
신검으로 계속 치유해 할 상처들이 가득했으니, 옷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더구나, 방에서 나올 때는 막 잠자리에 들려고 했을 때였다.
갑옷 같은 것을 입을 시간이 있을 리가 없었다.
지금 입고 있는 것은 잘 때 입는 실내복이었다.
물론, 지금 누가 보더라도 실내복인지 알 사람은 없겠지만…….
다행히 지금도 상처는 계속 낫고 있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지금 낫고 있는 상처도 처음 났을 때의 고통은 그대로라는 것을.
“많이 죽으면 됩니다.”
내 대답에 하이케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말해 주기 싫은 걸까?”
“글쎄요.”
“참 이상한 싸움이었어. 나에 대해 잘 아는 사람과 싸우는 느낌이었으니까.”
“그럴지도요. 제국 십 대 검호, 하이케 맞죠?”
내 말에 상대는 눈을 크게 떴다.
“정말, 날 알고 있었어.”
그녀는 나를 보다가 피식 웃었다.
“이제는 별 상관없겠지. 그래도 아쉽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디에 가는지 이야기를 하고 나오는 건데…….”
그녀가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설마,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고, 우리를 따라온 건가?
급하게 나오는 바람에 또 죽어야 하나 걱정했는데, 잘하면 죽지 않을 수도 있을 듯했다.
“아쉬워, 좀 더 세상을 돌아보고 싶었는데…….”
그녀는 별이 쏟아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그녀의 말소리가 작아질수록, 추위가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결국, 숨이 멈췄다.
얼어붙은 땅이 녹기 시작했다.
그그그그긍.
이어서 엉망이 된 땅이 원래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발레아가 흔적을 지우기 시작한 것이다.
멀리 남쪽 성벽 위로 불이 하나둘씩 밝혀지는 게 보였다.
거리가 꽤 떨어져 있었고, 깜깜한 밤이었지만, 이 정도 소란이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곧 있으면, 확인하기 위해 기사와 병사들이 몰려나올 터였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찾지 못할 것이었다.
지형도 원래대로 돌아가고, 싸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을 테니.
시체도 땅속 깊이 가라앉고 있었다.
발레아가 작정하고 파묻고 있으니, 오랜 시간이 지나도 시체는 발견하지 못할 터였다.
발레아가 뒷수습하는 사이, 나는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는 지팡이를 챙겼다.
내가 반으로 잘라버린 지팡이를 유물 주머니에 넣고, 발레아와 나는 사람들이 오기 전에 왕궁으로 돌아왔다.
내 예상대로 사람들은 그곳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경계를 서던 병사들은 출동했던 기사들에게 혼이 났고, 밤에 있었던 일은 모두의 기억에서 지워져 갔다.
사절단이 떠나는 날 아침.
나는 일어나자마자, 대공녀를 찾아갔다.
그리고, 어리둥절한 대공녀에게 반으로 잘려 나간 지팡이를 보여 주었다.
“수리가 가능하겠습니까?”
지팡이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던 대공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아요? 지금 나, 화날 뻔했다는 거?”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생각해도 대공녀가 화날 만했다.
사절단이 떠나는 날 아침에 반으로 잘린 지팡이를 들고 와서 고칠 수 있냐고 물어보다니.
평범한 여성에게 꺼낸 말이라도 예의가 없다고 욕을 한 바가지는 먹을 일이었다.
더구나 상대는 대공녀.
다른 사람 같았으면, 왕실 모욕죄가 나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다만, 나는 그동안 쌓아온 우리의 신뢰를 믿었다.
그리고, 그 신뢰는 보답받았다.
“알렉스 공이니까 해 주는 거예요.”
역시, 되는 거였다.
어차피 유물 수리니, 낡은 유물만 고칠 리가 없었다.
나는 대공녀를 믿고 마음껏 지팡이를 자른 것이었다.
대공녀는 지팡이 가운데를 붙여 잡은 뒤, 정신을 집중했다.
우우우웅.
지팡이가 빛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