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8화
제18편 사절단 귀환 (2)
사절단이 마물로 난리가 난 수도의 소식을 들은 것은 공국의 경계에 도착했을 때였다.
제국도 수도의 일을 해결하느라, 연락할 정신이 아니었고, 우리도 빨리 돌아가고 싶어서 웬만하면 야영을 한 덕에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이다.
제국으로 향할 때 들렸던 국경 요새도 건너뛴 덕에 우리는 그 소식을 공국에 와 있던 제국 기사에게 듣게 되었다.
“인사도 길게 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사절단을 호위했던 제국 기사들은 쉬지도 못하고, 말을 돌렸고, 사절단은 그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멀어지는 제국 기사들을 보며 시드 백작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요. 제국 수도에 마물이 쏟아져 나오다니…….”
“세상이 어수선하네요. 큰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카트린이 백작의 말에 답했다.
제국 기사들을 보낸 뒤, 우리는 관문을 지나 공국의 수도에 들어섰다.
나는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 다시 투구를 썼다.
카트린과 발레아가 마차 안에서 놀리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나는 바이저를 내리고, 다른 기사들과 함께 마차를 호위했다.
공국의 호의로 사절단은 다시 왕궁에서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왕궁에 도착한 뒤에, 시드 백작은 다시 공왕을 만나러 갔고, 관료들은 제국과 협의한 일을 공국과 조율하기 위해 행정부로 향했다.
카트린은 여러 생각이 많은지, 고민하는 얼굴로 방에서 쉬겠다고 했고.
발레아와 나는 대공녀를 만나러 갔다.
“두 분 다 어서 오세요!”
얼마 전에 봤을 때처럼 대공녀는 우리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떻게 되었는지 무척이나 궁금했어요.”
대공녀가 우리를 반가워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수리한 지팡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나는 슬쩍 마나를 움직여 방음벽을 치고, 입을 열었다.
지팡이를 수리해 주었으니, 대공녀는 비밀을 공유할 자격이 있었다.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할까요…….”
“사냥 때 이야기부터 하면 되잖아요. 황제의 생일 기념으로 마물 사냥을 했거든요…….”
시작은 내가 했지만, 이야기하는 것은 발레아였다.
발레아는 내가 한 일을 자신이 한 일인 양 대공녀에게 이야기했다.
확실히 발레아는 말을 잘했다.
대공녀도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버렸다.
나도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옆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 넣었고.
결국, 발레아의 이야기는 한바탕 모험 소설 같은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정말 대단하네요. 같이 있을 때도 느꼈지만, 알렉스 경은 정말 바람 잘 날이 없네요.”
“그래서 좋아요.”
발레아도 싱글거리며 대공녀의 말에 동의했고, 나는 부인할 말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건틀릿이 이상하다는 건 무슨 말이에요?”
이야기가 끝난 뒤, 대공녀가 내게 물었다.
그건 내가 이야기 중간에 끼워 넣은 말 때문이었다.
“이상하게 이 건틀릿을 쓸 때마다, 조금씩 마나가 소모되는 느낌이 있습니다. 분명, 대검처럼 파괴 불가만 걸려 있는 건틀릿인데, 뭔가 애매한 느낌이 든달까요?”
그냥 끼고 있을 때는 알 수 없었지만, 건틀릿으로 덩치들을 두들기다 보니, 건틀릿 안에서 마나가 꼼지락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가슴에서 건틀릿을 꺼내 대공녀에게 보여 주었다.
대공녀가 건틀릿을 이리저리 한참 동안 확인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뭔가 봉인이 된 것 같은데요?”
“봉인요?”
대공녀의 말에 우리 둘은 어리둥절해서 건틀릿을 바라보았다.
“정말 알아보기 힘든 봉인이에요. 알렉스 경이 말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거예요. 실력이 조금만 부족했어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고요.”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마왕도 아니고, 뭔가가 봉인된 유물이라니.
봉인을 풀면 건틀릿에서 흑염룡이라도 나오는 걸까?
“알렉스 경은 어떻게 알아채신 거예요? 저도 겨우 알아챘는데, 다른 사람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도 알지 못할 텐데요.”
하기야, 강화된 ‘마나 감응력’ 덕에 겨우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것도 긴가민가해서 이렇게 대공녀에게 물어본 것이었고.
어쨌거나 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그게 뭔지 알아봐야 했다.
나는 대공녀에게 물었다.
“봉인을 풀 수 없을까요?”
대공녀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고장 난 유물을 수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이에요. 이 봉인은 자물쇠로 잠근 것과 마찬가지예요. 잠근 방법을 알아내던가, 열쇠가 필요해요.”
대공녀는 불가능하다는 말이었다.
대공녀가 풀 수 없는 봉인이라면, 당장은 아무도 풀 수 없다는 말이었다.
나는 건틀릿을 유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당장 풀 수 없는 봉인에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뭔가 단서가 나올 때까지 전처럼 쓰면 될 터였다.
그러고 보니, 이 건틀릿을 보고, 단검이 한 말이 좀 이상했다.
[그 건틀릿은 ’용사’님들 물건은 아닙니다.]
용사들의 유물은 아니었지만, 분명 본 것 같은 뉘앙스의 말이었다.
하지만, 뭐에 또 비위가 상했는지, 뒤이은 내 질문에 단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는 그냥 그렇게 넘어갔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뭔가 다른 의미가 있었는지도 몰랐다.
나는 틈나는 대로 단검에게 다시 묻기로 했다.
그 뒤로 대공녀와 잡담을 나눈 뒤, 발레아와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하니, 최대한 쉬어주어야 했다.
마나를 쓸 수 있는 각성자라 해도, 정신적으로 피곤하고 지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 * *
그날 밤.
발레아는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잠자리에 들려는 그녀에게 누군가 초청장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물로 써진 초청장이었다.
물병에서 물이 흘러나와 책상 위에 써진 글귀는 정확히 발레아를 불러내고 있었다.
발레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초청장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벽에 손을 올렸다.
스르르르.
그녀의 몸이 벽에 스며들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발레아는 도시의 북쪽, 제국과 맞닿은 성벽 너머에서 다시 나타났다.
성벽과도 상당히 떨어진 벌판.
발레아는 알렉스가 제국 기사들과 일대일 대전을 벌었던 그 장소에 서서 입을 열었다.
“이렇게 왔으니, 모습을 보여주시죠?”
깜깜한 밤. 별빛만 흐르는 그곳에 발레아의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그녀의 목소리가 사라지기 전, 대답이 들려왔다.
“흠. 생각보다 성격도 담대한 것 같고. 지켜본 것과는 많이 다르네.”
발레아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발레아는 천천히 뒤로 돌았다.
그녀의 뒤쪽,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
지팡이를 쥔 신기한 복장의 중년 여성이었다.
여러 가지 문양이 가득한 나풀거리는 여러 겹의 옷을 입고, 액세서리를 가득 걸고 있는 여성.
다만, 부드러운 인상 때문인지, 그녀의 특이한 의상이 그렇게 천해 보지 않았다.
“왜 불러내신 거죠? 탁자에 협박을 써넣기까지 하면서요.”
“궁금한 게 있어서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결론을 내기가 어려워서 말이야. 더구나, 이상한 소식도 들어서 말이야. 빨리 확인하고 돌아가 봐야겠어.”
여성의 말에 발레아가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누구신지 말은 안 해 주실 것 같고……. 궁금한 게 뭔가요?”
여성은 지루해 보이는 발레아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는 나를 닮은 네 능력이 신기해서 따라온 건데……. 지금은 다른 게 더 궁금하단 말이야.”
여성은 표정을 굳히고는 발레아에게 물었다.
“제국 수도를 떠나기 전날, 장원에 왜 온 거지?”
발레아는 이번에도 그녀의 말을 부인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장원에 계셨던 분이시군요?”
“그래.”
발레아의 물음에 여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밤늦게까지 도시를 구경하고 있었는데요?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모두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네가 그날 구경하러 돌아다녔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단다. 남자하고 둘이서 데이트했다지?”
지켜보고 있었다더니,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런데, 내가 너를 느꼈던 그 장소는 데이트할 만한 곳이 아니거든. 접근조차 하기 어려운 곳이야.”
이어진 여성의 말에 발레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밀회를 나누려면, 남들이 보기 어려운 곳에 갈 수밖에 없었답니다.”
“하아, 결국, 쉽게 대답하지는 않겠다는 거구나. 나도 더는 시간을 주기 어렵겠고. 충분히 준비되었겠지?”
여성은 들고 있던 긴 지팡이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쿵.
지팡이를 내리찍자 마치 물결이 퍼져 나가듯이 지팡이를 중심으로 땅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읏.”
발레아가 작게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섰다.
방금 여성이 펼친 한 수에, 대화를 나누며 발레아가 쌓아 놓았던 영역이 파괴된 것이다.
물론, 전체가 다 파괴된 것은 아니었지만, 지팡이 주변의 일정 범위에는 그녀의 영역이 다가갈 수 없었다.
발레아는 놀랐다.
자신이 영역이 이렇게 파괴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나하고 비슷한 능력이라, 능력을 비교하면서 여러 대화를 나누었으면 했는데, 아쉽게도 그런 시간은 뒤로 미루어야겠다. 우선 너를 잡아 두고, 이야기를 들어야겠어.”
여성은 다시 한번 지팡이를 두들겼다.
좌좌좌좍.
그 순간, 지팡이가 두들긴 땅부터 얼어붙기 시작했다.
땅도, 수풀도,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얼어붙은 땅이 점점 넓어졌다.
발레아가 있는 지역 전체를 감싸듯이 얼음이 그녀를 포위해 들어갔다.
발레아는 표정을 굳히며 손을 펼쳤다.
콰과과광.
그녀가 밟고 서 있는 땅이 위로 솟구쳤다.
냉기가 따라오지 못하게 빠른 속도로.
하지만, 상대도 땅을 움직일 수 있었다.
지팡이를 두들기자, 여성이 밟고 서 있는 땅과 얼어붙은 땅 모두가 위로 치솟았다.
마치 작은 산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발레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도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자신이 상대할 만한 자가 아니었다.
능력이 미치는 영역과 능력의 힘도 모두 밀리고 있었다.
발레아는 땅속에 파묻힌 나뭇가지를 움직여 얼어붙은 땅을 뚫고, 여성을 공격해보고.
허공에 날리는 잡초를 붙잡아, 여성에게 쏘아 보냈지만, 여성은 그 모든 공격을 쉽게 막아 냈다.
송곳같이 변한 잡초는 여성 근처에서 얼어붙어 바닥에 떨어졌고, 나뭇가지는 그녀의 몸에 닿기 전에 얼어붙었다.
그리고, 발레아가 만들어 낸 환상마저 허공에서 차갑게 얼어붙었다.
“일정 공간을 자유자재로 변형하는 네 능력은 정말 대단한 거란다. 얼어붙는 능력을 기반으로 하는 나보다 훨씬 대단한 능력이지.”
손을 펼쳐 얼어붙은 풀과 나뭇가지를 흩어버리면서 여성이 말했다.
“그 나이에 그 정도 실력을 쌓은 것은 더 대단한 일이고.”
여성은 하얗게 질린 발레아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야기를 들어보고, 웬만하면 살려 줄게. 데이트하던 젊은 기사와는 다시 만나기 어렵겠지만, 그곳에서도 마음에 맞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을 테니까.”
그녀의 말에 발레아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은 싫은데요.”
발레아는 미소를 지으며 여성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직 데이트는 끝나지 않았어요.”
그 순간 흩어지는 나뭇가지 사이로 빛나는 검이 번뜩였다.
여성이 놀라, 지팡이를 치켜들었지만, 환한 빛을 발하는 검은 그보다 먼저 그녀가 든 지팡이를 잘라버렸다.
검을 든 남자는 지팡이를 자르고 바로 물러섰다.
순식간에 발레아 옆에 선 남자.
여성, 하이케는 잘린 지팡이를 쓰다듬으며 발레아에게 물었다.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니?”
“모르는 사람이 협박에 가까운 글로 사람을 불러내는데 혼자 나올 리가 없잖아요. 바보도 아니고.”
발레아의 말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발레아의 말에 제일 걸리는 것은 나일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