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7화
제17편 사절단 귀환 (1)
다음 날 아침.
카를로스 왕국에서 온 사절단이 황궁을 떠났다.
오랜 세월 적대했던 나라에서 온 사절단치고는 꽤 많은 성과를 가지고 돌아가게 된 것이었다.
공식적으로는 평범한 축하 사절일 뿐이었지만, 그들은 관료들과 무역과 긴장 완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피로연 등에서 귀족들과 두루 친목을 나누기도 했었다.
물론, 그런 일들이야 다른 사절단과 다를 바 없는 일이었지만.
마물 사냥에서의 활약 덕분에 사절단은 다른 사절단과 달리, 모든 이들의 시선을 모을 수 있었다.
덕분에 사절단은 즐거운 마음으로 수도를 떠날 수 있었다.
황태자는 응접실 테라스에 기대어 서서 황궁을 벗어나는 사절단을 바라보았다.
그가 서 있는 테라스에는 황태자의 집사장과 30대 남성이 같이 서 있었다.
황태자는 점점 작아지는 사절단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직접 벌인 일이 이렇게 엉망이 될 줄은 몰랐군. 카를로스 왕국과 얽힌 일이라서 일이 꼬인 걸까? 아니면 그냥 운이 나쁜 걸까?”
그의 말에 같이 있던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중간에 좀 이상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황태자님이 원하시던 대로 된 것 아닙니까?”
그의 말에 황태자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30살은 족히 넘어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는 아직도 나이에 맞지 않게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이 남아 있었다.
“원하는 대로라…….”
황태자의 쓴 표정에도, 남자는 손가락을 꼽아가며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2 황자님도 다치고, 3 황자님도 겁을 잔뜩 먹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거기다, 제국인들 모두가 마물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잖습니까.”
그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얼마 전 제국 남부에서 벌어진 마물 웨이브도 황태자에게 도움이 된 것처럼, 이번 일도 황태자에게 이로울 수밖에 없었다.
유적 사냥용 마물에 손을 썼던 것도 쏟아져나온 마물 덕에 묻혀 버렸고.
겁을 먹은 그의 동생들은 더 이상 자신을 방해하기 어려울 터였다.
쏟아져 나온 마물 덕에 귀족도 제국인들도 자신의 말을 잘 따를 터였지만, 황태자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황태자님이 걸리시는 것은 그 기사 때문이시겠군요.”
“아, 카를로스 사절단으로 온 어린 기사 말인가요? 그 기사, 상 받았다면서요? 생각보다 실력이 좋은 모양이네. 알리나 님의 감이 떨어진 걸까요?”
남자의 말에 황태자도 집사장도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10대 검호라는 이들은 전부 생각 이상으로 제 멋대로였지만, 지금 앞에 있는 남자는 그중에서도 특출나게 예의가 없었다.
제국 황태자를 앞에 두고, 저렇게 떠들어대다니.
저게 그의 원래 성격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으면, 성격 좋은 황태자라도 참을 수 없을 터였다.
“어떻게 할까요. 영지에 따로 사람을 보낼까요?”
집사장의 말에 황태자는 잠시 고민했다.
잠시 뒤, 그는 결론을 내렸다.
“아니, 거기에 신경 쓸 때가 아니야. 예언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어. 할 일이 산더미인데, 계속 미련을 남겨둘 수는 없지.”
“알겠습니다.”
황태자의 말에 집사장이 고개를 숙였다.
남자가 황태자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다음 단계로 가는 겁니까?”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제국 내부를 정리해야 할 때가 된 것이었다.
반대하는 세력을 정리하고, 황제의 자리에 앉을 준비를 하는 제일 중요한 일을 할 시점이 다가온 것이다.
“끄응, 좀 더 쉬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군요.”
남자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하이케도 없는데, 혼자 움직이려면 상당히 귀찮아지겠네요.”
남자의 말에 집사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이케 님이 안 계십니까?”
“뭔가 확인해 봐야겠다고 새벽같이 나가던데. 하이케 성격으로 봐서는 한참은 안 돌아올 것 같더라고.”
“언제쯤 돌아온다는 말도 없으셨습니까?”
남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이케가 그런 이야기를 할 리가 없지. 이번에는 뭐에 꽂힌 것인지 모르겠지만, 충분히 맛본 뒤에 돌아오겠죠.”
두 사람의 대화에 황태자가 끼어들었다.
“그럼, 장원에는 아무도 없는 건가?”
“원래 있던 이들은 다 있는데요. 뭐, 저도 황궁에 있고. 하이케 하나만 빠진 거죠. 뭐.”
하이케와 눈앞에 남자는 황제 기념일 동안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서 장원에 대기시켜 놓았던 이들이었다.
행사도 끝났고, 사절단들도 돌아갔으니, 더 대기시켜 놓을 필요는 없었다.
검호 하나가 휭하니 떠나버린 것도 그런 이유였고, 남자가 황궁으로 놀러 온 것도 같은 이유였다.
황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제국의 황태자도, 10대 검호라는 자들을 마음대로 움직이기 쉽지 않았다.
공식적인 일이라면, 황태자라는 위치로 찍어누르면 그만일 텐데, 조직 일은 그렇게 하기가 어려웠다.
황태자는 다시 한번 다짐했다.
하루빨리 황제가 되어 조직을 바깥세상에 끄집어내기로.
황태자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남자가 벗어놓았던 망토를 걸쳤다.
“그럼, 슬슬 돌아가 볼까. 황태자님 얼굴도 봤으니, 나 혼자서라도 장원을 지켜야…….”
그가 혼잣말처럼 꺼낸 작별 인사는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그는 난간을 움켜잡고, 수도의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낮게 중얼거렸다.
“말이 씨가 된 건가…….”
그리고, 그는 난간을 뛰어넘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는 아래로 떨어져 내리며 황태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남자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황태자도 집사장도 어리둥절했지만, 그들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황궁을 지키는 기사들의 외침을 무시하고 남자가 달려가는 방향으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밥 짓는 연기가 아니라, 화재로 만들어진 연기였다.
“장원 쪽입니다.”
연기가 솟아오른 방향을 보고는 집사장이 말했다.
집사장의 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귀족들의 옛 거리에서 불길이 솟구치고 있었다.
옛 거리의 집들이 불타고 있었다.
평범한 화재가 아니었다.
황태자의 눈에도 불타는 지붕 사이로 회색 물체가 스쳐 지나가는 게 보였다.
너무 멀어서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황태자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회색빛 물체들은 분명 얼마 전 유적 안에서 본 것과 같은 것들이었다.
마물들, 수로에 있던 마물들이었다.
“당장, 기사들을 보내! 종을 쳐! 마물이다!”
황태자는 고함을 쳤다.
집사장이 놀라 복도로 내달렸다.
땡땡땡땡!
곧이어 종소리가 퍼져나갔다.
황실 기사들이 뛰쳐나가고 병사들이 달려가는 게 황태자의 눈에 들어왔다.
황태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 마물들이 수로의 마물과 같은 마물들이라면, 마물들은 조직의 장원에서 쏟아져 나온 게 분명했다.
아직도 옛 수로와 연결된 곳은 그곳밖에 없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도시, 제국의 수도 안에 마물이 퍼진 것이었다.
마물에 대한 경각심을 이야기할 때가 아니었다.
제국 수도 안에서 마물이 나왔다는 것은 경각심 이전에,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는 수도 기사단과 황실 기사단이 책임을 져야 할 일이었다.
황제와 유력 귀족들이 모두 모여 있는 제국의 수도에 마물이 나타나다니.
이건, 기사단만이 아니라, 황실 기사단과 수도 기사단을 책임지는 황태자가 욕을 먹을 사안이었다.
황태자는 굳은 얼굴로 방을 빠져나갔다.
할 일이 많았다.
당장, 귀족들이 다치기 전에 마물들을 처리해야 했다.
제일 중요한 것은 황궁 근처에 마물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해야 했다.
한 마리라도 황궁 안에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황제의 진노를 직접 받아야 할지도 몰랐다.
거기다, 빨리 장원에 남아 있는 시설들도 다 폐쇄해야 했다.
조직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들키면 안 되었다.
조직을 외부로 드러내려 하는 이때, 마물이 쏟아져 나온 곳이 조직의 아지트라는 것이 알려질 수는 없었다.
수단과 방법을 쓰지 않고, 비밀을 묻어버려야 했다.
그는 제 손으로 묻어버려야 할 조직원들을 떠올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황태자는 자신이 황제가 된 뒤에, 마왕을 쓰러뜨린 뒤에, 그들 모두에게 사과하기로 다시 한번 다짐했다.
그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지금은 악당이 될 때였다.
황태자는 복도를 빠르게 걸으며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 * *
같은 시각. 카를로스 왕국의 사절단은 여유로운 여행을 이어가고 있었다.
제국에 올 때와 같은 제국 기사들이 사절단을 호위하고 있었다.
사절단에 남아 있던 긴장도 제국 수도가 낮은 구릉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자, 모두 풀려버렸다.
사절단은 긴장된 자세를 풀고, 진짜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기 시작했다.
보고서를 정리하는 관료에, 잠으로 그동안의 피로를 풀려고 하는 시드 백작.
제국 기사들과 대화를 나누는 기사들까지.
긴장이 풀린 사절단은 평화로운 여행자들처럼 보일 정도였다.
카트린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마차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복잡했다.
잠시 사절단이 되어 여러 가지 사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이제 돌아가게 되면 다시 그 모든 일이 그녀를 덮칠 것이었다.
하루빨리 결혼하라는 가문의 압박과 성격에 안 맞는 사교계.
여왕의 이모라는 위치와 마음껏 검을 휘두를 수 없는 자신의 상황까지.
더구나, 전에는 노처녀라고 비웃던 사람들까지 낯빛을 바꾼 채로 다가오는 것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부럽네…….”
카트린은 반대쪽에 앉아서 눈을 감고 있는 발레아를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발레아에게도 어려운 일이 많겠지만, 저렇게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을 보니,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창밖을 보며 자신도 도망칠 방법을 떠올리던 카트린은 낯선 연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거, 연기 아닌가요?”
카트린의 말에 사람들은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쳐다보았다.
멀리, 구릉 위로 가느다란 검은 연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구릉 너머가 제국의 수도였으니, 수도 어딘가에서 난 연기가 분명했다.
“불이라도 난 건가?”
카트린도 다른 이들도 평범한 화재로 생각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그건 발레아도 마찬가지.
우리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 몰래 눈을 맞추었다.
* * *
구릉 너머에서 사절단이 보고 있는 연기를 보는 사람이 있었다.
가벼운 외출복을 입은 여성이었다.
나이를 종잡기 어려운 여성.
그녀는 양산을 펴들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도시를 바라보았다.
“수도에 뭔가 일이 생겼나?”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수도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알아서들 하겠지. 뭐.”
뭔가 일이 벌어진 듯했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이 처리할 일이었다.
이미 떠나온 곳의 일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지금 그녀의 눈앞에는 더 중요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날 장원에 있던 그녀를 건드린 묘한 느낌이 카를로스 사절단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새벽부터 황궁 앞에서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멀리, 작아져 가는 사절단을 바라보는 여성은 10대 검호 중 한 명인 하이케였다.
그녀는 전날 느낀 막연한 기운을 따라 카를로스 사절단을 따라나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