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2화
제12편 수로 탈출 (1)
“3 황자가 나온 뒤에 규칙대로 진행하도록.”
황제의 말에 같이 있던 늙은 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나는 궁으로 돌아가 있겠다. 뒷일은 그대에게 맡기지.”
“충심을 다하겠습니다.”
기사의 대답을 듣고, 황제는 몸을 돌렸다.
황제가 몸을 돌리자, 늙은 기사가 다른 기사들에게 마나를 실은 명령을 내렸다.
“폐하의 호위대는 폐하를 모시고 황궁으로 돌아가라. 그 외의 기사들은 방진을 짜고, 전령들은 수도와 사령부에 소식을 전해라! 1급 비상사태다!”
“네!”
그의 말에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준비된 말을 타고, 도시로 달려가는 기사와 장비를 점검하고, 진형을 갖추는 기사들.
입구 근처에 진을 치고 있던 귀족들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들은 황제 일행을 따라, 도망치듯 도시로 향했다.
그건, 사절단들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돌아가십시오. 아직 돌아오지 못한 분들은 나오시면 저희가 모시고 돌아가겠습니다.”
기사의 말에 사절단들도 다른 귀족과 같이 수도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위험해 보이는데, 우리도 황궁으로 돌아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시드 백작도 카트린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평범한 기사였다면, 눈치를 볼 일도 없었다.
하지만, 유적에 들어가 있는 것은 그레시아 공작의 아들에다가, 여왕의 총애를 받는 귀족이었다.
마음 같았으면 안 나와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절단의 대표로서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먼저 들어가세요. 저도 검을 쓰는 기사이니, 제 한 몸은 충분히 지킬 수 있어요.”
카트린이 언제 가져왔는지 모를 검과 방패를 들어 보이며, 시드 백작에게 말했다.
드레스 차림의 귀부인이 검과 방패를 들고 하는 말이었다.
무척이나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지만, 신기하게도 그녀가 말하니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시드 백작은 카트린이 뛰어난 기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마땅히 말릴 방법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저는 사절단의 다른 분들을 보호해야 해서…….”
작위도 없는 여성이었지만, 여왕의 이모라는 위치는 백작이라도 함부로 대하기가 어려웠다.
“네. 먼저 들어가세요.”
백작의 정중한 말에 카트린은 평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에 백작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기사들을 남겨 놓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뵙죠.”
백작은 호위 기사 몇을 남기고, 사절단과 함께 성문으로 향했다.
잠깐 지체했을 뿐이었지만, 벌써 다른 귀족들은 저 앞에 가고 있었다.
몇몇 귀족들은 체통도 잊고 달려가고 있었고.
열심히 발을 옮기던 백작은 중간에 잠깐 뒤를 돌아보고는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남긴 두 기사와 카트린 말고도 카트린의 여자 수행원 하나가 더 남아 있었다.
말도 잘하고, 친화력도 대단해서 눈여겨보고 있었던 여성이었다.
다만, 샤를 자작이라는 놈과 친해 보여서, 마음에 안 들었는데, 이렇게 사고를 칠 줄이야…….
“미쳤군. 육체 능력자도 아니지 않는가. 국가의 일을 하러 왔으면서 저렇게 감정적으로 움직이다니.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줄 거라는 것을 모르는 건가!”
그의 말에 옆에서 같이 움직이던 젊은 호위 기사가 입을 열었다.
“모르셨습니까? 발레아 영애는 샤를 자작을 따라 여왕님의 군대에 참가했습니다.”
“하, 내전 때부터 따라다녔다고? 설마, 이번에도 그래서 따라온 건가?”
백작의 비웃음에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 발레아 영애도 내전 중에 계속 싸움에 참여했다는 뜻입니다.”
뜻밖의 이야기에 백작은 고개를 돌려 기사를 쳐다보았다.
“전훈도 많이 세워서 내전이 끝나고 영주 대리였던 그녀의 형제가 영주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녀가 원했으면, 그녀가 작위를 이었을 거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놀랄 만한 이야기였지만, 백작은 열심히 떠드는 기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척이나 잘 알고 있군.”
백작의 비꼬는 말에도 기사, 하비에르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카데미 후배였습니다. 공주, 아니 여왕님과 같이 다니던 후배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하비에르의 말에 오히려 백작이 입을 다물어야 했다.
카를로스 왕국의 사절단을 끝으로, 떠날 사람은 전부 떠난 것 같았다.
남은 사람은 기사들과 전투 능력이 있는 귀족들. 그리고, 아직 유적 안에 가족과 동료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사절단도 모두 떠났고, 카를로스 왕국의 사절단 일부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황태자도 남아 있었다.
황제도 다친 2 황자도 수도로 돌아가 버렸지만, 그는 피를 뒤집어쓴 채로 기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카트린은 기사들을 지휘하는 황태자를 보고, 감탄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돌아가신 우리 왕국의 왕자님들과 달리, 제국의 황태자는 훌륭한 것 같네. 저렇게 앞장을 서면, 죽을 가능성도 크겠지만, 나중에 가면 좋은 황제가 될 것 같아.”
카트린의 말에 같이 있던 발레아가 초를 쳤다.
“그게 우리나라에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네요.”
“어, 그렇게 되는 건가?”
카트린이 난감한 얼굴로 발레아를 돌아보았고, 발레아는 다시 한번 대답했다.
“네. 그렇게 되는 거랍니다.”
카트린은 검으로 치마 옆 단을 찢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아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말이 맞을 터였다.
사람을 파악하고, 관계를 유지하는 데는 발레아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제국에 와서도 얼마나 도움을 받았는지.
만약 카트린 혼자서 제국 귀족들을 상대했다면, 지금쯤은 방에서 기절해 있었을 터였다.
제국 귀족들과 사절단 사이를 능수능란하게 조율하는 발레아라면 제국과 왕국 사이도 잘 파악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녀가 안 좋다고 하면, 그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컸다.
물론, 발레아는 알렉스의 적인 제국이 싫어서 한 말이었지만, 그녀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 와중에도 유적 안에서 사람들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다만, 이제는 나오는 사람 수가 많지 않았다.
아직 나오지 못한 사람도 많았고, 3 황자 일행도 아직 보이지 않았다.
늙은 기사, 황실 기사단의 부단장은 난감한 얼굴로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쳐다보았다.
3 황자가 너무 늦었다. 3 황자가 밖으로 나와야 저 유적의 문을 닫을 터였다.
3 황자가 나오기 전에 마물들이 쏟아져나오거나, 3 황자가 저 안에서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큰일이 되어버릴지 알 수가 없었다.
더구나, 황태자가 이곳에 남는 바람에 그가 혼자서 결정을 내릴 수도 없었다.
결국, 그는 황태자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다.
“기사 일부를 안으로 보내서 황자님을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황태자는 그의 의견을 단박에 거절했다.
“안 돼. 안으로 보내봐야 마물들에게 휩쓸릴 뿐이다. 지금 여기 남아 있는 기사들로도 봉쇄가 쉽지 않아. 여기서 더 숫자를 줄였다가는 쏟아져나오는 마물들을 막지 못해.”
직접 마물들을 겪은 황태자의 말이었다.
부단장은 그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다만,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는 3 황자가 걱정될 뿐이었다.
* * *
위에서 사람들이 걱정하는 그 시각. 3 황자는 동료들과 함께 마물과 싸우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사냥이 왜 이래? 말이 안 되잖아!”
공황에 빠져서인지 잘생긴 얼굴은 험상궂게 일그러져 있었고, 늘씬한 몸에는 마물의 체액이 가득 묻어 있었다.
“젠장! 그때 그냥 나갈걸.”
황자는 마물을 잘라내며, 후회가 담긴 말을 토해냈다.
처음 이상한 마물을 만난 뒤에 그냥 유적을 빠져나가야 했었다.
그런데, 다른 형제들에게 뒤처졌다는 생각에 더 깊게 들어왔으니…….
그 당시에는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한 것인지, 지금 생각하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 마물들을 처리한 것도 다른 사람이었다.
그런데, 무슨 호기로 이렇게 돌아다닌 것인지.
유적을 빠져나가지 않을 거라면, 그 기사를 붙잡았어야 했다.
그 기사와 같이 다녔으면, 이렇게 마물들에게 포위되지도 않았을 텐데.
다들 쓸데없는 소리를 해 버려서, 지금 이렇게 생명이 위험해진 것이다.
벌써 따라오던 귀족 하나와 호위 기사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그에 비해 이피로스의 왕자는 멀쩡히 잘 붙어 있었다.
저런 허접한 실력으로도 잘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면, 육체 능력이 아니라, 생존 능력을 각성한 것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황자는 계속 검을 휘둘렀다.
황자는 검을 휘두르면서도 쓸데없는 생각이 계속 이어지는 것을 느끼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피를 너무 흘린 모양이었다.
어지러움이 심해지자, 황자는 그동안 해왔던 노력이 전부 쓸모없게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 황태자인 형을 따라잡겠다고 발버둥 쳤던 시간은 전부 무의미한 시간이었다.
자신도 쓸모없는 황자가 아니라고, 모두에게 외쳐댔지만, 황태자와의 거리는 더 멀어졌을 뿐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이렇게 죽게 되면 금방 모두 잊어버릴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이어질수록 더욱 죽고 싶지 않아졌다.
속국의 왕자도 살기 위해 저렇게 노력하는데, 제국의 황자가 마물에 휩쓸려 죽을 수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 기사도 저 왕자가 데려온 거였지?’
황자의 머릿속에 그 일이 떠오른 순간이었다.
황자의 눈에 이피로스의 왕자가 한쪽을 보며 크게 소리치는 것이 보였다.
“자작! 샤를 자작! 이쪽입니다! 구해 주러 오셨군요!”
황자도 그가 소리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멀리, 수로 끝에서 기사 한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얼마 전 보았던 기사였다.
그때도 놀라웠지만, 지금 보니, 그냥 놀랍다고 이야기할 게 아니었다.
카를로스의 기사는 그의 호위 기사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덤벼드는 마물들을 터트려버리며 전진하는 그의 모습은 어린 시절 들었던 용사의 모습 같았다.
* * *
막스 왕자의 고함을 듣고,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구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계속 고민했는데, 결국 구해야 할 모양이었다.
3 황자 일행이 앞에 있다는 것은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다.
3 황자 일행은 내가 지상으로 향하는 최단 경로에 자리 잡고 열심히 마물들과 싸우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피해 길을 돌아갈지, 아니면 그들을 도와줄지 한참을 고민했다.
황태자를 견제하려면 다른 황자가 살아 있는 편이 좋을 것 같기는 했지만,
적인 제국인을 구하는 것도 그리 마음에 드는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 결정은 막스 왕자가 해 주었다.
이렇게 들켰으니, 버려두고 갈 수는 없게 되었다.
혹시라도 저들이 살아남게 되면, 입장이 곤란해질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막스 왕자까지 다 죽이기도 그렇고.
결국, 구하는 쪽으로 결정되었다.
“제가 도착할 때까지 조금만 버티세요!”
나는 크게 외치며, 앞으로 달려갔다.
수로를 메운 마물들이 덤벼들었지만, 나를 막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