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1화
제11편 지팡이 시연 (2)
촤악!
검을 휘두르자 반투명한 체액이 허공에 뿌려졌다.
다시 검을 휘두르니, 털이 숭숭한 커다란 벌레의 다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뒤이어 검에서 빛나는 선이 쏘아졌고, 구멍을 빠져나오던 마물들이 반으로 갈라져서 구멍을 막아버렸다.
하지만, 구멍을 막아섰던 사체들은 뒤에서 따라오던 마물들의 입속으로 들어가 버렸고, 막힌 구멍들은 금방 다시 뚫려버렸다.
나는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마물들을 향해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내 검에 수십, 수백 마리가 산산이 분해되었지만, 그 이상의 마물들이 수로를 메워갔다.
수로를 덮어가는 마물들을 보고 있자니, 난감할 따름이었다.
“아무래도 사고를 친 것 같은데…….”
나라도 이건 막기 어려웠다.
도대체 땅속에 묻어두었던 수로의 다른 지역에는 얼마나 많은 마물이 살고 있었던 것인지.
비어있는 지하 유적 일부를 막은 뒤, 사냥터로 삼았다는 말은 거짓말이 분명했다.
엄청난 양을 죽여댔지만, 이래서야 상을 받기는 그른 것 같았다.
아니, 상을 받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수로 안에 있는 사람들과 수로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안전이 더 큰 문제였다.
다만, 내가 제일 먼저 지켜야 할 사람들은 밖에서 나를 기다리는 우리 왕국의 사절단이었다.
나는 구멍 앞을 막는 것을 포기하고,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벌써 수로에는 마나로 변형된 곤충과 땅속 짐승들이 가득했지만, 저 마물들은 나를 막을 수 없었다.
우리 영지나 왕국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여기서 한번 죽어야 할 일이었지만, 내가 제국 땅에서 죽어줄 이유는 없었다.
나는 양손에 검을 들고, 수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탓!
지팡이를 다시 잠근 뒤, 유물 주머니에 넣어두어서인지, 모든 마물이 나에게 덤벼들지는 않았다.
이 많은 마물이 모두 내게 덤벼들었으면, 나라도 살아남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양손으로 검을 휘두르며, 계속 위로 달려 나갔다.
* * *
같은 시각.
여유로운 사냥을 즐기던 황태자 일행은 갑작스러운 지진에 어리둥절했다.
“지진? 지진이 날 것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황태자의 말에 옆에 있던 중년 귀족이 대답했다.
“근래 예언이 많이 틀렸으니…….”
다만, 그의 말은 황태자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무슨 소리야. 자연 현상은 틀린 적이 없어. 그래서 예지를 막은 게 인위적인 것이 분명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잖아.”
황태자가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귀족은 말을 바꾸었다.
“그럼, 약한 지진이라 무시한 걸까요?”
그의 말에 황태자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제국의 수도에서 일어난 지진인데? 거기다, 약한 지진도 아닌 것 같은데…….”
천장의 틈에서 먼지가 쏟아지고 있었다.
쏟아지는 먼지를 보고, 귀족은 황태자에게 조언했다.
“아무래도 나가셔야겠습니다. 예언이 있건 없건 간에, 이 안은 안전하지 않을 듯합니다.”
황태자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가 봐도 이곳은 안전해 보이지 않았다.
“그게 맞겠지. 철수한다.”
“알겠습니다!”
황태자의 명령에 호위 기사들이 방향을 바꾸었다.
황태자 일행은 의심을 받지 않으려고 너무 많이 내려와 있었다.
늦지 않게 올라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중년 귀족이 중얼거렸다.
“그보다 괜찮을지 모르겠군요.”
“뭐가 괜찮지?”
그의 말을 들은 황태자가 그에게 물었고, 귀족은 자신의 생각을 황태자에게 말했다.
“지진 때문에 막아놓은 통로들이 뚫리지 않을까 해서요.”
그의 말에 황태자도 뭔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아. 몰아넣었던 마물들 이야기인가.”
“네. 지진으로 틈이라도 생겨서 마물들이 새어 나오면, 곤란할 것 같습니다.”
귀족의 말에 황태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정도 지진이면, 마물들이 나오기 전에 묻혀버릴 것 같은데…….”
“하긴, 그렇겠군요.”
오래전 일이었지만, 절대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튼튼히 막아놓았다고 들었었다.
황태자의 말대로 막아놓은 통로가 뚫리는 것보다, 수로가 무너지는 게 더 빠를 터였다.
마물 이야기를 하던 황태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수도 바로 옆 유적에 숨겨놓은 마물 떼라니, 뭐라 해도 이건 황가의 치부군.”
황태자의 말에 귀족이 급하게 부인했다.
“아닙니다. 그 당시에도 그런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몰랐다고 해도, 잘못한 것이 없어지지는 않아.”
황태자가 재차 하는 말에 귀족은 뭐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유적의 마물은 황실의 치부가 맞았다.
물론, 백 년도 더 지난 일이었고, 아는 사람도 몇 없었지만, 황태자 말대로 그 일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수도 옆에 있는 유적을 사냥터로 삼은 뒤 수백 년이 흐르는 동안, 마물들의 사체에서 흘러나온 변형된 마나가 계속 아래로 가라앉았었다.
지하 깊숙한, 수로의 제일 아랫단에 모인 마나는 봉인지 이상의 진득한 농도가 되었고.
결국, 이 유적에 자생하던 생명체들을 변형시켰다.
거대해지고, 강해진 벌레와 땅속 짐승들은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 지하 깊숙한 곳에서 서로를 잡아먹으며 성장했다.
그렇게 계속 숫자를 불리고 강해지다가, 어느 날 마물들은 그 숫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지상을 향해 올라오기 시작했다.
다행히 마물들이 유적을 빠져나오기 전에 유적을 지키던 기사들에게 발각되었고.
제국 황실은 놀라 바로 진압을 시작했다.
하지만, 고대 제국의 수로는 너무 깊고, 너무 넓었다.
한곳에 몰아넣을 수도 없었고, 죽여도 죽여도 마물의 수가 줄어들지 않았다.
그 와중에 유적을 정리하던 제국 기사와 병사, 귀족마저 수로 안에서 죽게 되었고.
결국, 끝없는 싸움에 지친 제국 황실은 유적 일부를 봉인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 일은 내가 황제가 되어도 백성들에게 알리기는 무리겠지.”
씁쓸한 어조로 말을 잇던 황태자였지만, 마지막 말만은 강하게 끝을 맺었다.
“하지만! 일이 마무리되면, 이 유적도 전부 정리할 거야.”
그의 말에 귀족은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훌륭한 황제가 되실 겁니다.”
그도, 황태자를 호위하는 기사들도 황태자가 훌륭한 황제가 될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그런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이 유적을 살아서 빠져나가야 했다.
귀족과 기사들이 황태자에게 고개를 숙인 그 순간.
콰아앙!
엄청난 소리와 함께 벽과 바닥이 터져나갔다.
“뭐지?”
“벽이 터졌어!”
“황태자님을 보호해!”
쏟아지는 먼지 속에서 고함들이 터져 나왔다.
그런 고함들을 뚫고, 황태자의 외침이 들려왔다.
“난 됐다! 무슨 일인지 확인해!”
하지만, 황태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확인이 필요 없게 되었다.
크아아아앙!
터져나간 벽과 바닥 안에서 마물의 괴성이 들려온 것이다.
“벽 안에 마물이 가득합니다!”
“막아!”
다시 한번 고함이 쏟아졌다.
“태자님을 모시고 유적을 탈출한다!”
이어 선임 기사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황태자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도 쏟아져나오는 마물들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엄청난 양. 황태자 일행이 막아 내기 어려운 숫자였다.
황태자는 반대하는 대신, 다른 명령을 내렸다.
“물약을 써!”
하지만, 이번에는 선임 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황태자님과 귀족분들만 쓰십시오. 어차피 저희는 마물들과 싸워야 하니, 큰 도움은 되지 않습니다.”
이런 난전에서는 효과가 작다는 문제도 있었지만, ‘마물을 피하는 물약’을 만들기가 엄청나게 어렵다는 것도 함부로 쓰기 어려운 이유가 되었다.
예언자가 가지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곳에 있는 물약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물약이 얼마나 만들기 어려운지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황태자는 재차 명령을 내렸다.
“작은 도움이라도 상관없다! 모두 살아서 나간다!”
“넵!”
“알겠습니다!”
황태자는 모두에게 물약을 나누어주었고, 황태자의 말에 사기가 오른 기사들은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확실히, 큰 도움은 아니었지만, 물약이 도움이 되었다.
마물들은 일행 앞에서 혼란을 일으켰고, 황태자 일행은 마물 떼를 뚫고, 지상을 향해 계속 나아갔다.
* * *
같은 시간, 지상도 혼란스러웠다.
아직, 유적으로 마물 떼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지만, 유적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것은 모두 눈치채고 있었다.
먼저, 2 황자 일행이 마물의 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고, 지상으로 올라와 있었다.
2 황자 일행에는 사망자도 있었다.
실전에서 사망자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황제 기사가 호위하는 황자 일행에 사망자가 생기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유적 아래서부터 전해오는 진동.
지진과는 다른 진동에 사람들은 모두 심각한 얼굴로 유적 입구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유적 입구를 지켜보는 사람 중에는 카를로스 왕국의 사절단도 있었다.
유적 입구를 보던 카트린이 흔들리는 바닥을 가리키며 발레아에게 물었다.
“이게 지진이 아니면 뭐지?”
“마물 웨이브예요.”
대답을 원한 것은 아니었는데, 발레아는 그녀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해주었다.
카트린은 뜻밖의 대답에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웨이브? 그건 봉인지나 북부 산맥에서 벌어지는 거 아냐?”
“숫자가 감당하기 어려우면 웨이브인 거죠.”
발레아는 카트린의 질문에 차분히 대답해주었다.
그녀의 대답에도 카트린은 이해가 안 되었다.
“아니, 웨이브가 될 정도로 마물을 집어넣었다고? 왜 그렇게 많이 넣어둔 거야?”
그게 가능한지는 둘째 치고, 사냥하자고 마물을 그렇게 많이 잡아 오다니…….
카트린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뇨. 마물 떼는 지하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고 있어요. 제국이 잡아넣은 게 아닌 것 같아요. 유적에 들어갔던 사람들도 모두 도망치고 있어요.”
발레아는 훨씬 전부터 지하에 영역을 펼쳐두고 있었다.
다만, 이 영역은 아직 유적 내부를 감시하기 위한 영역일 뿐이었다.
누구보다 담대한 발레아였지만, 제국 귀족이 득실거리는 이곳에서 마나가 가득 담긴 진짜 영역을 펼쳐두기는 어려웠다.
다른 귀족들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펼친 영역은 이제 겨우 유적의 상부만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누구보다 유적 내부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것부터, 마물들을 뚫고 지상으로 올라오는 사람들까지.
발레아로서는 오랜만에 즐거운 관람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홀로, 마물들을 썰어버리며 지상으로 올라오고 있는 한 사람을 보고 있자니, 다른 상황들은 전부 시시해져 버렸다.
“알렉스……. 경은 괜찮아?”
“네. 무사하시네요.”
“그럼, 뭐, 문제없겠네.”
발레아의 말에 카트린도 여유를 찾았다.
두 사람이 여유를 가지고 구경하는 사이, 유적 입구에서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모두 자신만만하게 유적으로 들어갔던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밖으로 나오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그때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사람부터, 공포에 질려 벌벌 떠는 사람까지.
피투성이가 된 사람도 많았고,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차례로 사람들이 빠져나오고, 피투성이가 된 황태자 일행도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는 입구로 나오자마자 멀리 떨어져 있는 황제에게 소리쳤다.
“문을 닫아야 합니다. 벽이 무너졌습니다!”
모두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황제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