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6화
제6편 샤를 자작의 대답 (2)
벽 앞에 서서 그가 문 앞에 선 여성들에게 물었다.
“누구시죠?”
그의 말에 뒤에 서 있던 예언가가 로브를 젖히며 앞으로 나섰다.
“샤를 자작이신가요?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샤를 자작이 맞긴 합니다만……. 본인이 누구인지 말도 안 하고 무엇을 물어보신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생각보다 까칠한 대답이 나왔다.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를 쳐다보던 알리나가 코웃음을 치며 앞으로 나섰다.
“아니, 그레시아 왕국의 귀족은 이렇게 예의가 없나? 손님을 이렇게 문밖에 세워두다니.”
하지만, 그녀의 말의 대답이 바로 들려왔다.
“대단한 분이 오셔서 긴장했습니다. 들어오셔도 됩니다만, 가까이 다가오시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솔직히 겁이 나는군요.”
그 대답에 알리나가 머리를 긁적였다.
“오, 실력보다 눈썰미는 좋네……. 요. 내가 너무 무시했나.”
그녀의 말에 예언가가 눈을 흘겼다.
“죄송합니다. 알리나가 저희 제국에서 제일 예의 없는 편이라…….”
“아니, 그게…….”
겨우 편해진 대화에 볼프 기사가 한숨을 쉬며 밖에서 문을 닫았다.
그는 생각보다 힘든 소개에 고개를 젓고는 복도에서 그들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방 주인의 허락 덕에 두 여성은 방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하지만, 방주인이 자리에 앉으라고 말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문 앞에서 서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방 주인이 반대편 벽 앞에 서 있으니, 서로 방 반대쪽 끝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셈이었다.
“저는 슈바벤가의 딸인 율리아 폰 슈바벤입니다. 샤를 자작님을 보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나는 알리나. 원래 이런 성격이고, 작위도 있으니, 좀 봐줘.”
예언자는 알리나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알렉스 디 샤를 자작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물어보시려고 이렇게 찾아오셨는지…….”
이제야 제대로 된 인사가 오가게 되었고, 예언가가 질문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먼저, 알리나가 방안에 방음벽을 펼치고, 예언자가 질문을 던졌다.
“얼마 전, 자작님의 영지에서 유적이 나오셨죠?”
그녀의 물음에 차가운 반문이 들려왔다.
“어떻게 아셨죠? 그건 아는 사람이 없을 텐데…….”
충분히 예상했던 말이었는지, 예언자는 사과하고, 차분히 말을 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유적을 탐사하던 용병들과 안면이 있어서…….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 유적에서 그 용병들이 발견한 유물들을 건네받기로 했었습니다.”
사실과는 다른 이야기였고, 이것도 떳떳하게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었지만, 아예 없는 일은 아니었다.
경매장에 나온 유물들을 구하는 대신, 유적을 발견한 용병들과 거래를 하는 귀족들도 많이 있었다.
아예 용병을 부려 유적을 찾는 귀족들마저 존재했고.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이렇게 내놓고 말하는 귀족은 없었다.
그것도 다른 나라의 사절단에게.
“……그들이 말한 유물 중에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이 있어서, 염치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물론, 지금 한 말처럼 그 안에 대단한 유물이라도 나온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긴 했다.
다만, 이것이 전부 거짓말이라는 점이었다.
“그 유물은 지팡이입니다. 혹시 가지고 계시면 양도할 수 있는지 여쭈어보려고 찾아왔습니다.”
알리나는 예언자의 말에 한껏 인상을 썼다. 그녀의 저자세가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그녀도 꾹 참고 자작의 대답을 기다렸다.
“죄송합니다만, 그런 지팡이는 보지 못했습니다.”
자작의 말에 알리나도, 예언자도 기사의 투구를 노려보았다.
두 사람은 가려진 투구 안의 얼굴을 노려보는 것 같았다.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시간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잠시 뒤.
예언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보지 못하셨다면 어쩔 수 없네요.”
한껏 당겨졌던 분위기가 확 풀려버렸다.
그녀는 침울한 얼굴로 자작에게 물었다.
“혹시, 저희가 그 유적을 탐사하게 해 주실 수 없을까요? 무너진 유적이라 영지에는 쓸모가 없을 텐데요.”
하지만, 자작은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안 됩니다. 솔직히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 용병들에게 영지민들이 많이 죽고 다쳤습니다. 솔직히 당신들에게 그 죄를 묻고 싶을 정도입니다.”
당연한 말이기에, 예언자는 한숨을 내쉬고, 방안에서 물러섰다.
“감사합니다. 오늘 불쾌하게 만든 것은 내일 다른 사람 편으로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방을 나갔다.
자작은 두 사람이 방을 떠날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복도에서 기다리던 볼프 기사가 밖으로 나온 알리나에게 물었다.
“이야기는 잘 되었습니까?”
“아니. 꽝이야.”
알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습니까…….”
“아무튼 고마워. 이렇게 신경을 써서.”
“아닙니다. 도움이 되어서 다행입니다.”
두 여성은 기사를 앞세우고 복도를 걸었다.
우울한 표정의 예언자를 보고, 알리나는 두 사람만 감싸는 방음벽을 펼쳤다.
“할머니, 괜찮아?”
“율리아!”
“눼에에……. 율리아.”
“하아. 이럴 때면 정말 내 능력이 막힌 게 한스럽네.”
“그 능력이 막혀서 여기에 온 거잖아. 능력이 멀쩡했으면, 왔을 리도 없는데…….”
율리아는 자신의 후손을 흘겨보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저렇게 함부로 말하다니.
하지만, 그 덕에 우울한 마음은 조금 풀린 듯했다.
“그럼, 아예 확인도 안 된 거야? 따로 고문이라도 해야 하나?”
알리나의 말에 예언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야. 그 영주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
“그럼 확인이 된 거잖아.”
예언자, 율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전처럼 미래를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어렴풋이 미래를 느껴서, 눈앞의 사람이 거짓을 말하고 있는지만 느낄 수 있는 거라, 확신이 안 들어.”
“그래도 틀린 적이 없잖아. 다시 확인해 볼래? 난! 율리아를 미워해.”
알리나의 말에 예언자는 피식 웃었다.
“그건 보지 않아도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
“그럼, 문제없잖아.”
알리나는 입을 삐죽 내밀었지만, 예언자는 아쉬움이 남은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의심 들 만한 부분이 적지 않아서…….”
“또, 뭐가.”
“그는 우리가 들어온 뒤에 계속 가만히 서 있기만 했잖아. 말은 계속 나누긴 했지만, 계속 움직이지 않는 게 무척이나 어색했어.”
예언자의 말에 알리나는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아, 그건 나 때문일 거야.”
“알리나 때문이라고?”
예언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못 알아차릴 거로 생각했는데, 내 실력을 어느 정도 알아차린 것 같아. 그 자작, 이야기하는 내내, 나를 경계하고 있었어.”
알리나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와중에도 그렇게 잘 대답하다니, 감각이나 정신력 쪽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
“그런 건가…….”
마지막 의심이 풀리자, 예언자는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땅이 꺼질듯한 한숨을 보고, 알리나가 방음벽을 거뒀다.
그녀는 모두가 듣도록 크게 말했다.
“나는 그보다 왜 방안에서 계속 투구를 쓰고 있는지가 궁금했다니까.”
“샤를 자작 말입니까?”
“어, 뭔가 알아?”
예상대로 볼프 기사가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처음 만날 때부터 바이저를 내리고, 얼굴을 보여 주지 않더군요. 그래서 저희 기사들 사이에서도 여러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볼프 기사도 이유를 모른다는 말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예언자를 달래기 위한 말일 뿐이었다.
“뭐라고들 했는데?”
알리나는 볼프 기사를 재촉했다.
“못생겼다는 말도 있긴 했지만, 상처 때문일 거라는 말이 제일 많았습니다. 아마도 내전 중에 큰 상처를 입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말투를 보니, 볼프 기사도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알리나는 볼프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엥? 기사라면 상처가 자랑스러울 텐데?”
“그거야 나이가 좀 있는 기사 이야기죠. 아직 10대 후반의 어린 기사에게는 힘든 상처일 수도 있습니다.”
알리나는 깜짝 놀랐다.
“엑, 그렇게 어렸어?”
“네. 작위를 얻은 것도 미래를 생각해서 내린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흠, 그렇게 어리면, 실력이 안 좋다고 비하할 정도는 아니네. 그대로 잘 크면 제국에서도 인정받는 기사가 될 것 같고.”
그렇게 다시 주억거리던 그녀는 마지막에는 결국, 고개를 젓고 말았다.
“그래도, 그 실력에 작위를 주는 것은 좀 너무했어.”
그녀의 말에 조용히 듣고 있던 예언자가 입을 열었다.
“그의 아버지가 이번에 카를로스 왕국의 실권을 잡은 공작이야. 전부터 여왕의 호위 기사를 했고, 내전 중에도 대단한 활약을 했대.”
예언자가 입을 연 것이 반가워서 알리나는 과장된 목소리로 알렉스와 카를로스 왕국을 욕했다.
“쯧쯧, 역시, 인맥이었나. 이러니, 다른 왕국들이 제국을 못 쫓아오는 거야. 작위에 인맥이라니.”
복도를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두 여성이 방을 나가고, 한참을 지난 뒤에도 갑옷을 입은 기사는 계속 가만히 서 있었다.
그렇게 조용히 서 있다가 더는 참을 수 없는지, 결국, 기사가 입을 열었다.
“이제 움직여도 됩니까?”
기사의 목소리는 조금 전에 들었던 목소리와 전혀 달랐다.
알렉스의 목소리가 들린 게 아니라, 하비에르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었다.
그는 말과 함께 눈을 굴려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그밖에 없는 방 안은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의 귀에 여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네. 이제 괜찮아요. 투구를 벗으셔도 돼요.]
발레아의 목소리였다.
“휴우. 그럼 끝난 거겠지.”
기사는 한숨을 내쉬며, 투구를 벗었다.
투구를 벗자, 땀범벅이 된 하비에르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의 앞에 바닥이 불쑥 위로 솟아났다.
사람 높이 이상으로 솟아난 바닥.
하비에르는 솟아난 바닥을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처음 본 광경도 아니었고, 조금 전 그가 이 방으로 끌려온 것도 같은 방법이었지만,
저 능력은 볼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솟아난 바닥이 다시 가라앉으며 그 안에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레아와 알렉스였다.
“수고했어요.”
“수고하셨어요.”
“와, 그렇게 무서운 사람인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잠깐 살기에 휘말렸는데, 죽는 줄 알았습니다.”
하비에르는 의자에 주저앉아 땀을 훔쳤다.
따지고 보면, 하비에르는 그냥 서 있기만 했지만, 그래도 그는 제 몫을 해 주었다.
예언자들이 오기 전, 나는 하비에르 기사에게 내 대역을 부탁했다.
그에게 어떤 말도 행동도 하지 않고, 갑옷과 투구를 쓴 채로 그냥 서 있는 것만을 부탁한 것이었다.
그 대신 예언자와 말을 한 것은 발레아의 도움을 받은 나였다.
발레아가 내 말을 하비에르 기사가 말을 하는 것처럼 예언자 일행을 속인 것이다.
그녀는 환상을 일으켜서 하비에르의 입을 움직였고, 내 음성을 하비에르의 입에서 나오게 했다.
다행히 예언자 일행은 속아주었고, 이렇게 무사히 지나가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복잡하게 일을 처리한 것은 예언자의 능력 때문이었다.
두 번의 죽음으로 확인한 바에 따르면 그녀는 내가 가까이 있으면, 자신의 능력을 막은 사람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거기다, 앞에 선 사람이 거짓을 말하는 것인지도 알 수 있었고.
그래서, 나는 앞에선 사람이 거짓말도 하지 않고, 내가 가까이 있지도 않은 방법을 쓴 것이었다.
나 대신, 하비에르를 세우고, 나는 아래층에서 목소리만으로 예언자를 상대한 것이었다.
결국, 이번 성공은 전적으로 발레아의 덕이었다.
나는 미소를 짓고 있는 발레아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성공한 것은 기뻤지만, 갈수록 빚이 늘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갚을지, 다른 일과 달리, 막막할 따름이었다.
* * *
그날 예언자와 그녀의 호위는 바로 요새를 떠나갔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메시지창은 내 성공을 축하해 주었다.
<위기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새로운 ‘저장 시점’을 설정하시겠습니까?>
나는 당연히 ‘네’라고 대답했다.
두 번의 죽음과 세 번의 도전 만에 나는 다시 위기를 넘어갈 수 있었다.
사절단도 다음날, 제국을 향해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