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3화
제3편 예언자의 이야기 (1)
그 난리를 피우며 요새를 빠져나오고, 숲을 박살 내며 싸웠으니, 경계가 강화되는 것은 당연했다.
요새의 성벽 위에는 병사들이 가득해서 몰래 넘어가기는 불가능했고,
어느새 벌판과 숲 주변에도 병사와 기사들이 깔려있었다.
생각보다 싸움이 길어진 모양이었다.
암살자 흉내를 내더라도 이런 경계 속에서 요새로 들어가기는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숲 가까이 와 있던 병사들에게 조용히 접근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수풀 사이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 조용해졌는데요? 싸움이 끝난 것 아닐까요?”
“그래서 확인해 보겠다고?”
“아뇨. 말이 그렇다는 거죠. 기사님들이 가셔서 확인하시겠죠.”
“염병, 저게 가려는 모습들이냐. 딱 봐도 겁에 질린 모습인데.”
나는 그 소리에 요새 쪽 벌판을 쳐다보았다.
몇몇 기사들이 숲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벌판에 서 있었다.
검을 치켜들고 있는 기사들은 하나같이 딱딱하게 얼굴이 굳어 있었다.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 숲을 갈아엎는 싸움이었는데, 기사님들이라고 별수 있나요. 그런데 정말 일대일 싸움 맞나요? 귀족분들이 싸울 때도 저런 광경을 본 적이 없었는데…….”
“나도 모르지. 나무만 터트리는 능력을 가진 귀족이 있었을지도.”
“그런 능력이면 숲에서는 무적이겠는데요. 판금 갑옷도 못 막을 것 같던데.”
“무적은 무슨, 저런 폭발 속에서 능력을 쓴 당사자는 괜찮고? 같이 휩쓸려 죽을 게 뻔해.”
“근데, 한참을 싸우던데…….”
병사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나도 치유 능력을 가진 신검이 없었으면 이렇게 싸우기는 어려웠을 것이었다.
거기다, 신검이 있더라도 아슬아슬했다.
나는 붉은 선이 남아 있는 손등을 슬쩍 쳐다보았다.
전에도 보았지만, 신검이라고 무한정 치료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확실히 한계가 있었다.
치료를 받은 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 같기는 했지만, 이번에도 치료가 점점 늦어지는 바람에 조금 위험했었다.
“어쨌건 간에, 꼴을 보니 우리보고 가보라고 할 것 같아.”
“……그렇겠죠.”
나는 병사들의 걱정을 덜어주기로 했다.
툭. 툭.
평범한 병사 두명을 기절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나를 흘려 넣어 바로 깨지 못하게 만드는 것도.
물론 죽이는 게 더 쉬웠지만, 죽은 사람 옷을 입는 것보다야 살아있는 사람의 옷을 입는 편이 나았다.
다행히 젊은 쪽 병사의 덩치가 컸다. 그의 옷이 나에게 맞을 정도로.
나는 병사의 옷을 벗겨 낸 뒤에 엉망이 된 옷을 벗고, 그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제국군 문장을 박아넣은 낡은 가죽 갑옷과 가죽 투구까지 쓰고, 단검에 내 모습을 비춰보았다.
귀족이라서 그런지, 깔끔하고 잘생긴 게 좀 튀긴 했지만, 흙먼지와 파편들이 가득 쓸고 간 얼굴은 평범한 젊은 병사로 보일 만했다.
나는 병사들을 그냥 버려두고, 요새로 향했다.
조금 수색만 해도 방치된 병사들이 발각될 듯했지만, 그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평범한 병사처럼 보이기 위해, 마나도 쓰지 않고, 조심스럽게 요새로 달려갔다.
벌판을 반대로 달리니 사람들의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달려가는 내게 길 근처에 있던, 기사 두 명이 내 쪽으로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기사의 물음에 나는 팔을 들어 그에게 보여주었다.
내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팔이었다.
물론, 피가 났던 상처는 모두 치료되었지만, 피가 덮여있는 팔을 봐서는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날아온 나무 파편에 다쳤습니다. 피가 너무 많이 나서 요새로 복귀하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쯧, 어쩔 수 없지.”
내 말에 기사가 혀를 찼고, 다른 기사가 그에게 말했다.
“다른 병사 하나 붙잡아서 보내자고.”
“아니, 딱 집어서 보냈다가, 기개도 없는 기사라고 욕먹으면 어떻게 하게.”
“그럼 네가 가 볼 거야?”
“젠장, 그게 되나. 지금도 덜덜 떨리는데…….”
계속 달리는 뒤로, 기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병사 말대로 기사들은 갈등 중이었다.
웃기는 일이었지만, 내게는 도움이 되었다.
내가 요새로 들어갈 때까지 잠깐만 시간을 끌어주면 충분했다.
요새의 문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통과할 수 있었다.
나는 치료소로 가다가 다시, 다른 길로 빠졌다.
이번에도 조금 전에 지나갔었던 골목길을 지나, 성에 도착했다.
전에는 병사 한 명이 지키고 있었는데, 비상이 떨어져서인지 한 명이 더 늘었다.
나는 평범하게 문으로 다가갔다.
“정찰조가 무슨 일이야.”
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가 다가가는 내게 물었다.
“헉, 헉, 숲에서 싸우던 분이 성에 계시는 여성분에게 전하라는 말이 있어서요.”
나는 지친 모습을 보여주며 그에게 말했다.
“성은 당분간 출입 금지야. 우리에게 말하면 바로 전해주지.”
하지만, 병사는 내 말에 고개를 저었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병사 흉내를 내는 것도 여기까지인 모양이었다.
나는 아쉬움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줘보기로 했다.
“직접 말하라고 하셨는데…….”
“그래도 안 돼.”
“후회하실 텐데요.”
“비상인 거 보면 몰라?”
안타깝게도 병사들은 내가 준 기회를 잡지 않았다.
적이었지만, 군기가 잡힌 훌륭한 병사들이었다.
나는 한 걸음 내디디며 양손을 뻗었다.
병사들의 목이 각각 손에 잡혔다.
나는 바로 힘을 주었다.
우직.
바닥에 허물어지는 병사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후회할 거라고 했는데…….”
옷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자주 지나가는 곳도 아니었다. 괜히 여기서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죽은 병사들을 뒤에 남기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안으로 들어온 뒤에는 오히려 다니기가 수월해졌다.
싸움터에서 돌아온 것 같은 병사가 복도를 바쁘게 지나가니, 막는 사람이 없었다.
고용인들은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기 바빴고, 경계를 서던 병사들도 여자에게 보고하기 위해 왔다는 내 설명에 통과시켜주었다.
그렇게 몇 층을 올라가니, 예언가가 있는 방이 나왔다.
방 앞에는 기사 둘이 서 있었다.
요새에서 알리나 대신 호위를 세워준 것 같았다.
하지만, 알리나가 누구와 싸우러 간 것인지를 조금만 생각했어도, 이런 호위가 의미 없으리라는 것은 깨달았을 터였다.
“형식이란 것도 중요하니까…….”
그래도, 영주가 된 뒤에는 이런 일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이해하는 것과 인정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거기다, 방에 예언자가 있는 것도 감각으로 확인했으니, 더는 조심할 필요가 없었다.
기사들이 내게 고개를 돌리는 사이, 나는 가슴에서 검을 빼내, 그대로 휘둘렀다.
“뭐, 뭐야!”
놀란 기사들이 검을 뽑으려 했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검에서 빛이 튀어 나가 복도를 갈랐다.
서걱!
기사들은 검집에서 반쯤 검을 빼내다가 몸이 잘려 나갔다.
쿵. 쿵.
숨이 끊어진 기사들은 허물어졌고, 나는 죽은 기사들 사이에 서서, 방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자, 방 중앙에 서 있는 예언자를 볼 수 있었다.
방 안에는 그녀밖에 없었다.
방안으로 한걸음 들어갔다.
예언자는 내가 나타난 것을 보고, 눈이 커졌다.
“설마, 당신이 왔다는 것은…….”
그녀가 나를 보며 뭐라 말하려 했지만, 지금은 이야기를 들어줄 때가 아니었다.
나는 다시 대검을 휘둘렀다.
보이지 않는 마나검이 예언자를 잘라갔다.
카아앙! 카앙!
역시, 예상대로 그녀는 멀쩡했다.
그녀를 감싸는 방어막이 마나검을 막아선 것이었다.
하지만, 충분히 예상했던 바였다.
나는 검에 마나를 더 밀어 넣었다.
점점 밝아지는 빛.
나는 균열이 가기 시작하는 방어막을 향해 계속 검을 휘둘렀다.
쾅! 콰앙!
“미안하지만, 이 방어막은 쉽게 부서지는 방어막이 아닙니다. 그렇게 우격다짐으로 검을 휘두른다고 보이지 않는 방어막을 깰 수 없습니다.”
확실히 이 방어막은 내가 본 어떤 방어막보다 강력해 보였다.
예언자는 대단한 유물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 말대로 방어막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방어막도 마나로 만들어진 것.
‘마나 감응력’이 있다면 그 모습을 충분히 볼 수 있었다.
방어막이 보이니 우격다짐으로 공격할 이유도 없었다.
쾅! 쾅! 콰직!
균열이 가는 곳만 검으로 후려치니, 결국 방어막은 깨지고 말았다.
동시에 예언자의 귀걸이에 불이 붙었다.
“꺄악!”
예언자는 비명을 지르며 귀걸이를 던졌고,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 어떻게…….”
나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손을 뻗어 목걸이를 뜯어냈다.
“아, 그건…….”
알고 있는 목걸이였다.
마나를 증폭하는 목걸이. 나도 가지고 있는 물건이었다.
“반지도 빼내. 손가락을 자르기 전에.”
손에 낀 반지들도 전부 유물이었다.
중요한 예언가니 이런 유물들을 차고 다니는 것이 이해되긴 했지만, 도대체 얼마나 돈을 처바르고 있는 건지…….
예언자는 나를 보더니, 반지를 빼내 내게 건네주었다.
“알리나가 막지 못했고, 방어막도 막지 못했으니, 이런 반지는 소용없겠죠. 그런데 알리나는 죽은 건가요?”
예언자의 물음에 사실대로 대답해주었다.
“그래. 그녀는 죽었다.”
내 말에 예언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다시 물었다.
“저도 죽일 건가요?”
“알아낼 것 알아내고.”
이번에도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내 말에 예언자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당신도 살아남지 못할걸요? 제가 죽으면 조직, 아니 제국 전체가 당신을 찾아낼 거예요.”
나도 예상했던 이야기였다.
이렇게 이리저리 고생하는 것도 그런 이유였고.
그래도, 더 이야기를 듣기 위해 슬쩍 찔러보았다.
“어차피, 지금은 능력도 제대로 쓰지 못하잖아. 지금도 당신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할까?”
“……그것도 아시는군요. 제 능력을 막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었군요.”
아니, 그건 우연이 맞았다.
능력의 충돌 때문에 발생한 우연.
덕분에 이렇게 고생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찾을 거예요. 알리나도 죽었으니, 더 집요하게 찾을 거예요. 내가 여기 오게 된 이유를 아는 사람에서부터 여기 오는 사절까지. 많은 사람이 죽겠죠.”
나도 알고 있었다.
사절단과 관계없이 보이도록 미리 달려왔더라도, 예언자가 죽어버리게 되면, 의심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살려달라고?”
“네. 전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이 세상을 위해 저는 아직 더 살아남아 있어야 합니다.”
예언자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눈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자신을 전적으로 믿는 사람에게서나 볼 수 있는 눈빛이었다.
예언자가 저렇게 확신을 한다라.
아마도 그녀의 말은 사실일 터였다.
하지만,
“네가 살아있다고 나를 안 찾을까?”
그녀의 확신이 나와 왕국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
역시, 그녀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손을 뻗어, 예언자의 목을 잡았다.
“우선, 자리를 옮기지, 할 일이라는 게 뭔지도 알아야 하니까. 마침 손님들도 오고 있으니, 딱 지금이 좋아.”
복도에서 기사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방해자들이 오기 전에 떠나야 했다.
그리고, 손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파파팍.
목 주위에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예언자가 쓰러졌다. 기절한 것이었다.
나는 깨진 창을 확인하고, 벽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검에서 쏘아진 빛에 벽이 허물어졌다.
예언자를 업고 빠져나가기에는 깨진 창문이 너무 좁았다.
나는 예언자를 들쳐메고, 터져나간 벽 밖으로 뛰어내렸다.
이 성의 창과 벽은 도대체 몇 번째 부시는 건지.
뒤에 보수를 할 사람들에게 미리 사과했다.
나는 기절한 예언자를 들쳐메고, 북쪽으로 달려갔다.
요새의 병사와 기사들이 나를 쫓기 시작했다.